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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주님 공현후 토요일 강론 모음 ~

2014 1 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2-30)


The on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the best man, who stands and listens for him,
rejoices greatly at the bridegroom’s voice.
So this joy of mine has been made complete.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말씀의 초대

 요한의 첫째 서간의 마지막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참하느님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셨음을 상기시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고 계신다고 말하자, 요한은 자신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하며 예수님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영원한 생명이시며 참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는 이해력은 분명 하늘에서 온 지혜를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이들에게 따뜻한 빛처럼 다가오는 깨달음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그의 책 『신적 위로의 책』에서 사물을 비움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참된 인식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가득 차려면 비워라. 도달하기 위해서는 뒤로 물러나라. 영혼이 더욱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더욱 벗어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욱 적게 사물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하느님이 아닌 모든 사물이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순수하게 하느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앞서, 그리고 더욱 잘 알아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마침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오셨음에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게 된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를 그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자신을 철저하게 비움으로써 비로소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종교와 신학에 대한, 우주의 이치와 기원에 대한 지적인 욕구에 넘친 학자와 현인은 지난날도 오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지식욕으로 밝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 안에 주님을 채우고자 하는 겸손한 신앙인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물건을 사면 꼭 항상 끼어서 오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없어서 사용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반드시 필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 물건을 잘 이용하고자 한다면 사용 전에 이것을 반드시 꼼꼼하게 봐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사용설명서’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DSLR 카메라를 처음 구입했을 때, 그냥 잘만 찍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셔터만 누르는 것으로는 제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사용설명서를 그제야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가 원하는 내용이 또 미처 몰랐던 내용들이 가득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물건을 구입하던지 사용설명서는 다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다보니, 가지고 기능을 다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이 떠올려집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쓴다는 스마트폰을 얼마 전 과감하게 구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스마트폰으로 기도서와 성가책을 볼 수 있으며, 일정관리, 내비게이션, 카메라 등의 기능까지 이용한다는 말에 자신도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겠다고 구입하신 것이었지요. 하지만 어떻게 그 기능을 다 써야 하는지를 모르겠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전화 기능만 있으면 되는데 비싼 돈 주고 괜히 샀어.”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잘 쓰지 못하는 것이지요. 만약 꼼꼼하게 설명서를 보고 따라했다면 소위 신세대처럼 스마트폰을 잘 활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용설명서를 잘 보고 숙지하는 것이 그 물건을 잘 사용하는 비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잘 가르쳐 주는 주님께서 주신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그 누구보다도 잘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시지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의 말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이 사용설명서를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설명서대로 살아가지 않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을 중요하게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나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작아지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커지려고만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이 생길 때 내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용설명서를 얼마나 잘 읽고 가슴에 새겼는지를…….

성경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주님 뜻에 맞게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의 한 시간은 오후 늦은 한 시간보다 훨씬 중요한 법이다.(로버트 H. 슐러)

 

아름다운 퇴장을 위하여

 

-남상근 신부-

예수님에 앞선 선구자,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이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인 세례자 요한. 요르단 강물로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그가 이제 역사의 뒷면으로
물러납니다. 이미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며 잉태된 말씀을 알아보았고
,
자신이 베푸는 물의 세례가 아니라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분이 오시리라 예고하였으며 나아가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조차 풀 자격도 없노라 하였던

세례자 요한. 그가 주님의 길을 다 예비하고 나서 퇴장하는 것입니다
.
점점 커지셔야 하는 분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드리면서 물러서는 의연함
.
정말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하고 또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인간 세상에서 자기 자리가 아님에도

차지하려고 벌어지는 이전투구와 한번 장악하면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는

추하고 치졸한 탐욕을 목격하면서, 우리는물러섬이 없는 사회의 잔인함을

느끼곤 합니다. 마치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듯, 홀연하게 또 품위 있게

떠나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은 당당한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아름다운 사람, 세례자 요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는 곳과는 다른 장소에서 세례를 베푸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새로운 스승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며 질투를 느끼며, 심지어는 자신의 스승이 무능하게 취급당하고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런 현상을 보고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담담하게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복음의 전달자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진실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어찌 보면 겸손 자체가 세례자 요한의 영성이라 하겠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돋보이기 위해 자신을 낮춥니다. 그래서 겸손이 모든 덕목의 기준이자 시금석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 나로 인하여 주님의 모습이 드러납니까? 나를 통해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는 지극히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어찌 보면 겸손이란 현대인들이 지키기에 너무 힘든 덕목이 아닐까요
?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면 사회 속에 묻혀 버린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사회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지만, 나의 커짐만을 바랄 뿐이지 주님께서 커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점점 커지고 주님은 점점 작아지다 못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나의 겸손이 작아질수록 주님 역시 작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오만이 주님께 죄스러울 뿐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어도

-김찬선신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오늘 요한의 편지는 죽을죄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런데 죽을죄란 어떤 죄입니까
?

일반적으로 죽을죄란 그 죄를 지으면 사형에 처해지는 죄입니다
.
논란이 있지만 사형에 처하는 판단기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
죄가 너무 클 뿐 아니라 죄질이 아주 나쁘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개과천선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
과거에 크고 나쁜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 죄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

하느님 앞에서 죽을죄란 그러면 어떤 죄입니까
?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사람이 죽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고
,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사형은 안 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데

하느님 앞에서 죽을죄가 있다고 오늘 편지는 말하는 것입니까?

복음의 가르침을 놓고 볼 때 죽을죄란

과거 지은 죄의 크고 나쁨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도 하느님의 용서보다 크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큰 죄인의 회개를 더 기뻐하시니 말입니다
.

그러므로 죽을죄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도 바라지도 않고
그래서 회개 없이 스스로 죽어가는 죄입니다
.
하느님께 용서의 기회를 드리지 않는 죄입니다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살 것입니다
.
특히 다윗처럼 하느님께 죄를 지었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하면 오히려 살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
다윗의 죄는 참으로 크고도 큽니다
.
임금이었으니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하였겠습니까
?
바세바와 간음죄를 지은 것으로 부족하여

그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지었으니 죄질이 아주 나쁩니다.
그러나 그 죄를 나단이 깨우쳤을 때

다윗은 바세바나 그 남편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느님 사랑과 용서 안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

실제로 우리는 신문을 통해 흉악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얘기를 간간이 듣습니다
.
그는 죄에 머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매이지도 않고 하느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요한이 편지에서 얘기하는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이고
,
이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는 한에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죄란 하느님을 거부하고 떠나는 것인데

하느님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떠나 자기 안에 갇혀 있지도 않고
하느님을 떠나 세상 안에 머물지도 않겠지요.

! 그러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여주헌신(與主獻身)

- 이영선 신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분명하게 살며 말하는 세례자 요한의 이런 증언을 들으며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

여주헌신(與主獻身
)
'
경축 이영선 신부님 사제서품. 여주헌신 자애목자 기원
'
'
우리 주님처럼 몸 바쳐라
.

우리 주님을 위해 몸 바쳐라
.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라
.'
이런 뜻으로 알아듣는 말씀입니다
.

사제수품 때 선친께 받은 선물입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사제품을 받는 날 붓글씨로 써서 표구까지 해서 선물이라고 건네셨습니다. "사제수품 축하한다." 하시면서요. 보는 순간 아찔했습니다. 사제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너 알아서 해라." 찬성인지 반대인지 애매한 말씀 때문에 맘고생 꽤나 했는데. 선배 신부가 신학생 때 "부제품 받아 봐야 알지." 부제품 받고 오니까 "서품 받아 봐야 알지!" 하신 분이
.

중요한 제 짐입니다. 가지고 다니며 벽에 걸어놓고 가끔 보는데 그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합니다. 오늘처럼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사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으면 어김없이 정수리를 꿰뚫고 들어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교회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게 지켜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하는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서커스 공연을 보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줄타기입니다. 공중에 설치된 기다란 줄 위를 마치 평지를 걷듯이 걷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줄 위에서 폴짝 뛰기도 하고, 그 위에서 줄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라는 감탄사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유명한 줄타기 곡예사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정말로 쉽게 줄을 타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죠?”

곡예사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비결은 간단해요. 오로지 목적지에만 시선을 고정하면 됩니다. 밑을 보면 절대 안 돼요. 머리가 가면 몸도 따라가거든요. 아래를 보면 분명히 떨어지고 말지요. 항상 내가 가려는 곳만 바라보면 줄을 쉽게 탈 수 있습니다.”

이 곡예사의 말은 우리 인생살이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뒤를 바라보면서 과거에 연연하며 후회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아래를 보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불안해하며 발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까요?

당연히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보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요? 바로 주님을 우리 시선의 목적지로 삼아야합니다. 그래야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영유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로 떠나는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동거 동락했던 제자들이 떠나는 것이 어찌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의리도 없는 자식들 같으니라고.’고 한 바탕 욕을 퍼부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는 가장 낮은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떠올리며 지금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이 커지기보다는 내가 더 커지기 위해서 노력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보지 않고 다른 것을 보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크게 흔들렸고, 남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가져야 한다는 욕심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으려 했으며, 인간적인 손해는 절대로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수시로 했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반복해서 할 때 그것은 우리 것이 된다. 우수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윌 두란트).

 

진정한 제자직

 

-정찬호-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를 가리켜, 신랑의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하는 신랑 친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신랑 친구, 즉 쇼쉬벤(shoshben)은 당시 유다인의 혼례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부와 신랑의 대변자로
행동했는데, 청첩장도 만들고 혼인 잔치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부 방을 지키다가, 안전하게 신랑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역할을 소홀히 하여 신부를 엉뚱한

사람에게 내주면 혼인 잔치는 무산이 됩니다. 장시간 서성이며 신부를 지키던 쇼쉬벤은 어둠 속에서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척 기뻐합니다. 자기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감 때문입니다. 쇼쉬벤이 신부를 신랑에게 내어주며

아쉬워하는 법은 없습니다. 신부는 신랑의 차지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신부인 이스라엘을 신랑인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완수되었을 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바로 그런 기쁨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제자됨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
그분 뒤를 따라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제자직(discipleship)’일 것입니다

 

 

겸손으로 알아야지만

-김찬선신부-

내일은 성탄이 끝나는 주님의 세례 축일이고
주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합니다.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기 전에 교회의 전례는 오늘
,
주님께서 요한과 함께 세례를 베푸셨음을 전하고

세례자 요한이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증언하는
요한복음의 얘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요한의 투옥 사이에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나봅니다
.
무슨 말다툼이 있었을까요
?
자기들 영역에 왜 침입을 하였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의 항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
먼저 세례운동을 펼치고 명성을 얻은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불만이었고 항의였을 것입니다
.
이에 요한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자기들이 하고 있는 세례운동에 예수님이 침입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고 있는 세례운동이 사실은
주님의 복음 선포 활동을 준비하는 것임을,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는

오실 분 그리스도와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의 관계
,
신랑과 친구의 관계
,
그분이 커지시도록 자신은 작아져야 하는 관계임을 분명히 합니다
.

저의 형제 중에 참으로 요한과 같은 형제가 있습니다
.
충실한 형제이고 아주 지혜로운 형제입니다
.
그가 지혜로운 것은 많이 배워서가 아닙니다
.
그는 필요한 만큼만 배웁니다
.
필요한 만큼만 배우는 것이 그의 지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런 면에서 그는 才勝德하지 않은 사람
,
즉 德이 才能보다 뛰어난, 德勝才한 사람입니다
.
그러나 그가 정말 지혜로운 것은

자신이 나설 때와 빠질 때를 아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도록 자신을 발판으로 내어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我勝他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밟고 올라가도록 발판이 되어줍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
,
저는 머리로 너무 잘 압니다
.
그런데 이것은 머리로 알아 되는 것이 아닙니다
.
겸손이라는 전 존재적인 덕으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

올라서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
,
추월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
,
앞자리가 아니면 못 견디는 사람
,
이런 사람은 아무리 머리로 알아도 발판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

남의 밑에 있는 것이 편한 사람
,
드러나지 않는 것이 편한 사람
,
모든 사람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삼을 줄 아는 사람
,
그래서 모든 사람이 승리자가 되게 하는 것이

자기의 기쁨인 자만이 그리 될 수 있습니다
.

우리 형제, 그 형제가 시간이 지나고 나이 먹어도

계속 그런 형제로 남기를 기도하고
저도 그러한 형제가 되었으면 바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전삼용신부-

하루는 교수 신부님과 신학 세미나 하는 데 다녀왔습니다. 특별히 스페인에서 시작된 한 공동체의 체험담을 듣고 왔습니다.

한 사제가 있었는데 어떤 자매와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순결하였습니다. 둘은 수도회와 비슷한 공동체를 창설하였습니다. 그 공동체는 비록 동정으로 살아가지만 남녀의 사랑을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건전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놓아두는 분위기입니다.

사실 그 사랑 안에서 둘은 정화되고 성숙되어 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그리스도와 성모님처럼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각각의 숙소가 따로 있지만 기도와 식사 같은 것을 함께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혹시 눈이 맞아 둘이 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면 집을 따로 마련해 주어서 살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결을 지키며 삽니다.

낮에는 각자가 학교, 은행, 병원 등에서 일을 하고 번 돈은 공동으로 모아 필요할 때마다 나누어 씁니다.

지금 그 창설자 사제는 돌아가셨고 공동 창설자 자매는 아직 살아계신데 나이가 드셨어도 매우 여성스럽게 꾸미고 다니신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런 공동체를 우리나라에서 설립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아무리 영적이라고 하지만 사제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작년까지 우리를 가르치시던 한 교수신부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올해부터 몸이 안 좋아 가르치시지 않는데 알고 보니 가정을 꾸렸고 벌써 애가 둘씩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겉보기에는 정통교리를 매우 중시하고 매우 친절했던 사제다운 사제였습니다. 또 주위에도 적지 않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이런 문제로 옷을 벗고는 합니다.

옛날에는 신학생이 길가에서 여자와 단 둘이 이야기만 하더라도 퇴학을 당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신부님은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 뒤돌아 앉아 있다가 나가시면 돌아 앉아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보는 것까지 정결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성교육 시간이 있었는데 시작 전에 신부님이 교실에 성수를 뿌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이 그렇게 죄악시 되었던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였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성적인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서로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모상을 본따 만드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관계인 것처럼 사람도 남자와 여자가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요한에게 그것을 알려줍니다.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교회는 신부이고 그리스도는 신랑입니다. ,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입니다.

, 예수님께서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신 것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바로 남녀 간의 구체적이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현 교황님의 첫 번째 교서인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베네딕도 교황께서는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존재하지만 사랑의 원형은 바로 남녀의 사랑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그런 사랑 자체를 죄악시 하고 있기에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성숙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사제가 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갑자기 좋아지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꼭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분들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더라도 남자가 여자 앞에서 남자이고, 또 여자가 남자 앞에서 여자일 수 없을 때, 그것이 더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또는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일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만이 신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내 아내나 남편,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것이라고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모습처럼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스도께 봉헌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순결한 신부이고 교회의 시작인 성모님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시지만 당신의 사랑을 성전에서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봉헌하였고 자신은 작아졌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으면 절대 사랑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봉헌하셨기에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다시 찾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중 가장 작은 하나도 절대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소유할 권한이 있고 또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은 오로지 우리가 주인님, 혹은 주님이라 부르는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던 이 신비를 다시 한 번 되새겨봅시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박물관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무릎을 꿇고 활을 쏘는 용사의 조각상이라고 합니다. 이 병마용은 왼쪽 다리를 꿇고 있고, 오른쪽 무릎은 땅에 닿아 있으며, 상반신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었는데, 형형한 눈빛은 왼쪽 전방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은 오른쪽에서 화살을 당기고 있지요.

지금까지 출토된 병마용들은 대부분이 약간씩 훼손되었기 때문에 인공적인 복원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 병마용은 완벽하게 보존되었으므로 전혀 손을 보지 않았다고 해요. 심지어 옷의 문양이나 머리카락의 결까지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전문가들은 무릎을 꿇은 병마용이 원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지켜온 이유가 낮은 자세 덕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 병마용의 높이는 1.2미터로, 기립하고 있는 병마용들이 1.8~1.97미터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지요. 지하에 건설된 병마용갱은 천장이 무너지면 건장한 병마용들이 머리로 받치기 때문에 낮은 자세의 병마용은 덜 손상되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꿇은 자세의 병마용은 오른쪽 무릎과 두 발이 삼각형을 이루면서 몸을 지탱하고, 그 중심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당연히 두 발로 서 있는 병마용들에 비해 넘어지거나 깨질 확률이 아주 낮은 것입니다.

이렇게 무릎 꿇은 궁사 병마용의 모습은 우리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경쟁에서 이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가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어떤 나약함이나 위축된 모습처럼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살리는 현명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자기를 한없이 낮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 성경말씀을 아마도 평생토록 자신의 삶 안에서 지키셨던 분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누구도 세례자 요한을 못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들이 헛일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겸손함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 실천하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 여인이 미술관에 그림을 감상하러 왔습니다. 미술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여인은 꿇어앉은 채로 그림을 감상했습니다. 미술관 직원이 그토록 힘들게 그림을 감상하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내일 학생들을 데리고 미술품을 감상하러 올 텐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 미술품들이 어떻게 보일지 미리 알아두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눈높이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눈높이를 낮추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우리들과 하나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느님이신 분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어 이 땅에 오셨고 이로써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이러한 겸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겸손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자기를 살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용기는 근육처럼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루스 고든)

가장 슬기로운 사람 

-김찬선신부-

슬기로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여러 기준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슬기로운 사람 중의 슬기로운 사람은
아마 자기 주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슬기로운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이고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가장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무엇보다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자기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인간은 끊임없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처럼 모든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자기 것인 양 착각하였고
모든 것을 자기 좋을 대로 하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요한은 이 점에 있어서 아주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가 당시 누렸던 명성을 생각할 때
아무 것도 아닌 우리도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과 비교할 때
요한의 이런 태도는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요한은 그에 따라 처신을 잘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우리는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의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첫째로 가난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가진 것이 없었던 것은 물론 존재 자체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없는 나를 있게 하시고
부모를 주시고
형제를 주시고
성격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머리를 주시고
의지를 주시고 그리고
재물도 주시고 정말 다 주셨습니다.
뭘 가지고 내 것이라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고 얘기합니다.
이는 성자께서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요한이나 우리 또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된 Missionary들이고
하늘의 Missionary인 한 내 좋을 대로 할 수 없고
주어진 Mission을 수행해야 하는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놓고 하느님과 경쟁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식인데 내 자식으로 만들려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내 아내로 만들려 합니다.
아내가 하느님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기에
그것이 싫어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남편들을 종종 봅니다.
하느님을 시기 질투하는 것이지요.
오늘 요한은 자기한테 오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기뻐하며
주님을 따르는 무리는 더 커져야 하고
자기를 따르는 무리는 작아져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색시를 넘보지 않는 정결함의 본보기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만드는 세상

- 이건복 신부-

2년 전 저를 참으로 사랑하셨고 이 땅의 모든 사제를 위하여 특별한 지향을 가지고 평생을 기도하던 고모 수녀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연세가 드시고 얻은 폐암으로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가 하느님께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헤어짐이나 이별의 고통보다는 아름답고 행복한 선종 안에서 감사의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종하시기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조카 신부인 저에게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청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수녀님께서는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하다시며, 세상에서 수녀로 사는 동안 그 어떠한 아쉬움도 없이 살게 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당신과 함께 생활한 수도회 장상 수녀님들과 동료 수녀님들, 후배 수녀님들에게 모든 공을 돌리셨습니다.(이 자리를 빌려 고모 수녀님과 함께해 주셨던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모든 수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를 희망하고, 후손들한테는 명예롭고 위대한 조상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물론 후손들에게 훌륭한 업적을 남겨 존경받는 위대한 인물로 남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그러한 일을 맡겨주시고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느님보다 자신의 이름이 앞서 불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더욱이 공적으로 교회를 위해 부름을 받고 이에 응답한 교회 봉사자들은 더 많은 하느님의 은총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기에 하느님 앞에 더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요한 세례자처럼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뵙고 예수님의 앞길을 열어드렸듯이, 우리도 우리를 통하여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잘 헤아리며 살아야겠습니다. 오늘따라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하게 한 생을 마무리하신 고모 수녀님, 당신을 기억하기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당신 안에서 기억하게 되기를 바라셨던 아름다운 겸손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고모 수녀님, 천국에서 지켜봐 주십시오.

-엄종건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이에 요한의 제자들, 즉 조금 전 어떤 유다인과 논쟁을 했던 제자들이 자기 스승에게 이릅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게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못 마땅히 여기면서 퉁명스럽게 말하는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여기저기 자칭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이 각자 자신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두었습니다. 그 중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내용으로나 수적으로 으뜸이었습니다. 그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선두자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향해 세례자 요한이 하는 대답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

첫째로, 사람은 하늘이 주시기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
둘째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분께서 가실 길을 닦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는 것이 또한 그렇습니다
.
셋째로,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고 하면서, 주님의 등장을 더 없이 기뻐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

그리고 그는 끝으로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이 대답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참으로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큰 겸손이고 참으로 큰 물러남입니다
.

애청자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물러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물러나는 일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은 다시 또 없는 듯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물러날 때가 왔을 때는 표시 내지 않고, 떠벌리지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서는 삶,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

강론을 마치면서 우리 함께 1베드로 5,5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원로들에게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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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동신부-

잎은 나뭇가지에 그대로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그 잎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실제로 평화롭고 단순합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와서 “당신은 훌륭하군요! 당신은 멋지군요!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 하고 말하면, 그 잎사귀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평화를 잊어버립니다. 아주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면, 그 잎사귀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잊어버립니다. 마음은 더 이상 평화롭고 행복하지 않습니다.<스님들이 쓰신 ‘공부하다 죽어라.’ 중에서>

세상이 어떻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 마음으로 성실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비록 화려한 조명을 받지 않아도 훌륭한 조연으로 영화가 아름다워 집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를.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를.

자녀는 자녀의 자리를. 교사는 교사의 자리를.

정치인은 정치인의 자리를. 학생은 학생의 자리를.

신앙인은 신앙인의 자리를. 수도자는 수도자의 자리를. 사제는 사제의 자리를.

평생 묵묵히 자기 자리 지키고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오늘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요한을 봅니다.

남들이 뭐라하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람 요한에 ‘나’를 한번 비춰보십시오.

아름답습니까?

자신의 자리를 잘 지켜, 아름다운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양승국신부-

<신림동, 장충동>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증언", 다시 말해서 "고별사"를 남기고 인류구원사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러한 고별사를 하게 된 배경이 있는데, 소위 "세례 원조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신림동에 가면 떡볶이 집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장충동에 가면 돼지 족발집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밀집되어 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상당수의 음식점 주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가 "내가 원조"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심리 근저에는 원조에 대한 집착이랄까 애착심이 깔려있는 듯 합니다.

세례자 요한 시대 당시 "세례!" 하면 요한이었습니다. 당연히 세례의 원조는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까지 그냥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운동, 갱신운동, 자정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운동은 당시 유다 백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세리와 창녀들까지 요한에게 찾아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활동을 개시하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보자 하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슬슬 속이 끓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아이들 표현에 따르면 "꼭지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스승 세례자 요한은 요즘 손님이 없어서 파리를 날리고 있는 반면 예수님네는 몰려드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 찬 나머지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한때 잘 나가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드레아를 비롯한 중요 인사들마저 세례자 요한 당 사무국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예수님 당으로 입당하는 판국이었습니다.

찬밥 신세가 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갑자기 쇠락해져간다는 느낌을 받았고, 여기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스승의 태도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존경하는 송봉모 신부님의 해석에 의하면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쇠락도 예수님의 흥성함도 모두 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지녔다면 그것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원조, 영원하고 참된 원조는 오직 한분 주님뿐이십니다.

우리가 찾아갈 때 마다 단 한번도 손해 보지 않게 하시는 분, 찾아갈 때 마다 맛갈지고 정성어린 음식, 영양가 만점인 음식을 주시는 주님, 단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표현까지 쓰면서 주님이야말로 원조중의 원조, 마지막 원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미국의 사회학자인 안토니 캠보로 박사가 95세 이상을 산 50명에게 설문을 보내서 연구조사를 했답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 것입니까?”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세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답도 이 세 가지 중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첫째, 늘 여유를 가지고 삶을 돌아보며 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되돌아보면서 보다 값진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좀 더 모험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현실 처리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멀리 바라보고 좀 더 모험심을 가지고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셋째, 죽은 뒤에도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내가 한 일과 내가 살아왔던 삶이 남에게 도움과 모범이 되도록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좀 더 가치 있는 시간을 살고 싶다는 고백이지요. 그리고 이는 아마 모든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으며,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항상 이유는 있습니다. 사는 것이 바빠서, 자식 때문에 그리고 그밖에 작고 커다란 이유들 때문에……. 하지만 그 무엇 무엇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면 평생가도 자신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아마 요한의 제자들은 그동안 세례자 요한에게 쏠렸던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예수님께로 향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똑같은 세례를 주고 있다는 것. 이걸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상도에 어긋난다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제자들이 이런 불쾌한 감정을 스승이신 세례자 요한에 표현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비판하여 자신을 조금 더 높이려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합니다. 즉, 주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부와 명예 등의 세속적인 욕심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만약 제자들의 바램처럼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했다면 역사에 어떻게 기억되었을까요?

우리도 이제는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높이려는 욕심보다는 주님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 무엇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세례자 요한과 같이 진정으로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때문에’라는 이유를 붙이기보다는 ‘~ 불구하고’라는 강한 실천의지를 간직합시다.

 

일치와 화해를 희망하여

-박영대 -


요즘 길을 오가며 MP3를 사용한다. 음악을 듣는 건 아니고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목사의 성경 강의를 듣는다. 김 목사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이루어 낸 공동번역 성서를 가지고 강의한다. 새로 배우는 게 많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요한과 예수의 세례운동이 그 당시 사회에서 어떤 의미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때는 죄를 없애기 위해서 반드시 성전에서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다. 제물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죄를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세례만으로 죄를 없앨 수 있다는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운동은 성전체제에 정면 도전하는 반란이고, 제물 장사로 배불리던 이들에게 고약한 영업 방해(?)였다. 물론 가난한 이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을 게다. 김 목사의 강의를 들으면서 새삼 성경을 볼 때 그 사회 문화 배경을 살피며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김진호 목사와는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 모임에서 주로 만난다. 2005년에 개신교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불교 ‘참여불교재가연대’, 천주교 ‘우리신학연구소’, 시민사회단체 ‘종교자유정책연구원’과 ‘기업책임시민센터’를 중심으로 만든 모임이다. 만나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지난해 2005년 인구센서스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는 그 의미를 되새기는 대화 모임을 가진 바 있다. 그 자리에서는 어느 종교 신자가 더 많이 늘어났는지를 따지지 않았고, 이를 자성과 쇄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분위기에서 마음을 담은 충고가 오갔다.

오늘날 종교 자체가 갈등과 폭력의 불씨가 되곤 한다. 그 배경에는 자기만 옳다 여기고 이웃 종교를 없애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근본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근본주의는 이웃 종교의 참모습이 ゾ昰适測?관심도 없다. 자기 편견을 덧씌워 마구잡이로 비난하고 공격한다. 이 근본주의는 성장 제일주의라는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

보고 싶은 왕 언니

-박기호 신부-

 

본당의 봉사직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힘이며 활성화 기능의 연대입니다.
봉사의 역할은 본당 운영에 절대 요구되지만 동시에 개인생활에 보람과 활력이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더 잘할 이가 있을 때입니다.
자리를 내줄 수 있습니까? 자신의 신앙생활에 소중한 의미를 가진 역할을 다른 희망자에게 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능력이 있거나 쓸 만한 후배가 나타날 때 끌어들이고 선뜻 자리를 내주는 분위기는 공동체 성장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역할이 진정한 봉사였다는 자기 검증이 되고 동시에 다양한 인재를 불러 모아 활성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 공동체를 먼저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누구나 선망하고 보람 있는 일을 기꺼이 후배에게 내주고 자신은 물러서서 뒷바라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그런 겸허하고 도량 넓은 선배, 진정한 ‘왕 언니’를 가진 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축복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런 왕 언니가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패권주의에 밀려나신 분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왕 형’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소중한 역할을 서슴없이 예수님께 내드렸습니다. 서로의 목표는 자기 명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 건설에 있었으므로 오직 하느님 나라는 점점 커져야 하고 인간의 힘은 점점 작아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공현 후 토요일

- 김창환 신부 -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다 땅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가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기 위해서 몰리는 것을 이야기 하며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반응에 요한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라는 대답을 하며 자신의 사명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이제 자신의 시대는 끝이 났으며 드디어 오셔야 할 분이 오셔서 하늘의 일을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그 다음은 사라지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단순히 자기를 ‘신랑의 친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하는 신랑의 들러리입니다. 들러리의 임무는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때 그의 임무는 끝이 납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임무도 신부인 인류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도록 잘 준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다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덧붙여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하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이 말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자세가 얼마나 예수님을 증언함에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칫 그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따름을 통해서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우쭐 될 수도 있었지만, 본인의 임무에 충실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자세!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부산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오늘의 강론’을 마치면서 저 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본받아 사제의 직분에 충실하며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상대방을 놓아주고 높혀주는 사랑
-

최정훈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강론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 강론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보니 예전에 본 어떤 드라마가 생각이 납니다. 쭉 연결이 되는게 아니라 한편씩 다른 주제로 해서 사랑이 무엇일까하는 이야기로 풀어갑니다. 아마 주인공은 대학교 학장 선거에서 떨어진 중년의 교수와 결혼식 날 신부를 빼앗겨 버린 바보같은 남자입니다. 이 두 사람이 삶의 회의를 느끼고 자살하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서는데 우연히도 마주보는 건물에서 서로를 발견합니다. 거기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 둘은 자살을 하기보단 자신의 삶을 조금더 연장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이 둘은 사랑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와의 사랑, 그 어떤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던 사람의 사랑 등 여러 가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랑이 이것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감동을 받았던 부분은 아마 마지막 편인 듯 합니다. 신부를 빼앗겨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바보 같은 남자 주인공은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 여자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습니다. 그 여자도 바보 같은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 설명할 순 없지만 어쨌든 드라마의 끝은 그녀의 결혼식 때 주인공이 그녀를 데리고 도망가기로 서로 약속을 하지만, 주인공은 그녀의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많은 풍선을 띄워 그녈 축하하면서 드라마는 막이 내립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사랑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사랑하니 가지려 하고 사랑하니 커지려 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달리 사랑하니깐 버리려하고 사랑하니깐 작아지려 하는 모습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도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인 듯 합니다.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았놓고선 어느순간 부터 다른 곳에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보고 요한의 제자들이 시기할 때, 요한은 함께 시기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합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자신을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데도 요한은 작아지려고만 합니다. 사랑하니깐 말입니다. 한평생 사랑하려고 했던 하느님 그 하느님을 요한은 자기만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인 예수님을 높이고 옆에서 단지 그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려는 요한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였으면 합니다. 가지려 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을 놓아주고 높혀주는 사랑을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사랑으로 마음대로 하려 하지 않았나 반성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생활 이렇게만 하라!

-오상선신부-


 

기도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생각된다.
늘 기도를 하는데도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는 느낌을 갖는다.

오늘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 생활을 다시 점검하라고 하시나보다.

1. 먼저 주님께서는
첫번째로,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
고 촉구하신다.
즉,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상 나는 기도하면서 그냥 의무적으로 하지
정말 주님 그분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들어주신다는
그런 확신을 갖고 기도하지는 않을 때가 많은 것같다.

2. 둘째는 우리의 청원을 다시 살펴보라고 촉구하신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기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뜻(즉, 우리의 욕심과 바램)에 따라 기원하는 것인지를
다시 살펴보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청이 가납되지 않은 듯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우리의 뜻에 치우쳐 있는 청원이기 때문이리라.
기도에는 순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 욕심과 바램이 이루어지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느님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청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청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식별해야 함을 재삼 깨달아야 하겠다.

3. 세번째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지은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라
고 촉구하신다.
우리는 죄지은 형제를 쉽게 비판하고 싫어하고 욕하기 일쑤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안에 특히 죄지은 형제들이 제1순위가 되기를 바라신다.
사실 우리가 죄지은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기도는 욕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죄지은 형제가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자세야말로
내가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위한 전제조건이란 말일게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를 통해 내가 소홀하고 있는 기도의 문제를 따끔하게 짚어주신다.
그렇다!
이런 자세로 기도해야만
나는 하느님을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청하며
영육으로 가장 곤궁에 처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가 해야할 가장 큰 의무이리라.

오늘도 특별히
내가 기도해야 할 그 형제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주님, 그 형제가 죄의 어둠에서 헤어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뜻이요 바램임을 확신하기에
당신께서는 이 청을 들어주시리라 믿삽나이다>
하고 소박한 기도를 바쳐본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양승국신부-


<주어진 몫이 크던지 작던지>


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자주 맞닥트리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 있습니다. 하산 길 끝에는 늘 수많은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걸어 내려오다 보면 이집 저집에서 달려 나와 반갑고 환한 얼굴로 ‘따뜻한 방에서 요기 좀 하고 가시라’며 초대합니다.


간판들도 경쟁이 대단합니다. ‘전국 맛 자랑 방영된 집’ ‘KBS, MBC, SBS 방영된 집’ 어떤 식당은 반대로 나갑니다. ‘KBS, MBC, SBS 아무데도 방영 안 된 집’


한 식당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그 식당은 이상하게 그날따라 파리만 날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큰 식당이 썰렁했습니다. 주인이나 종업원들도 맥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린 백여 명이나 되는 단체손님들이 바로 옆 식당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식당 주인이나 종업원들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사람 사는 것처럼 바뀌었습니다.


이웃식당의 잘 나가는 모습을 본 주인 아저씨의 얼굴은 그야말로 참혹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우리 집은 파리 날리고 있는데, 옆집은 사람들로 북적대니 마음이 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심정이 똑같았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세례자 요한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던 반면 예수님께서는 서서히 구원사 무대의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런 최근의 상황 앞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은근히 심기가 불편해지다 못해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한 때 그렇게 잘 나가던 스승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요즘은 거의 손님이 떨어져 파리만 날리고 있는 반면, 예수님 가게 쪽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 찬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런 상황 앞에서 그저 묵묵부답인 스승의 태도가 못마땅해서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 때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런 아리송하고 묘한 말을 건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한때 잘 나가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드레아를 비롯한 중요인사들이 속속 ‘세례자 요한 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예수당’으로 입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완전히 찬밥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가 급격히 쇠락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여기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스승의 태도를 보고 크게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 세례자 요한을 향해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냥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라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세례자 요한은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은 자신의 쇠락도 예수님의 흥성함도 모두 다 하느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그간 자신이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무대의 새로운 주인공인 예수님께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인류 구원사의 현장에서 사라지면서 남긴 ‘고별사’의 핵심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지녔다면 그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달란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몫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100을 지니고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50을, 어떤 사람은 20을, 어떤 사람은 0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애초부터 그렇게 주셨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10밖에 안가지고 온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지든지 볶든지 하느님이 부여하신 그 10으로 겸손하게, 자족하며 한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00을 지니고 온 사람 역시 하느님이 주신 그 풍요로움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게 그 100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되돌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우리 각자 그릇의 크기는 제각각 다릅니다. 자신이 타고 난 그릇의 크기가 근본적으로 작은데 큰 그릇을 보면서 ‘왜 내 그릇은 이렇게 작나?’하고 한탄하면서 지낸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고통스런 가시밭길이겠습니까?


자신이 타고난 그릇의 형태가 세모인데, 한평생 ‘왜 나는 네모가 아니고 세모인가?’하며 지낸다면 그 삶이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크던지 작던지 늘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그 몫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쌀 100포대>

 

요즘 심심찮게 들리는 말들 가운데 하나가 이런 말입니다. 일부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고액과외를 통해서 번 돈으로 고급 승용차를 구입한다든지, 해외여행을 다니는 등 상류층 못지 않은 호화판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참으로 격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 "그냥 두었다가는 큰일나겠다"는 걱정이 드는 현실입니다.

이런 걱정에 사로잡혀있던 제게 참으로 흐뭇한 소식 한가지가 전해져왔습니다. 지난 1월 3일 청주에 사는 한 대학생이 몇 달간 땀흘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 전액으로 20kg들이 쌀 100포대를 사서 불우한 이웃들에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남자 대학생은 "불우한 이웃들에게 전해 달라"는 쪽지 한 장만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대학생이 쌀과 함께 보낸 종이 쪽지에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과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아껴 쌀을 마련했습니다. 얼마 안되지만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 쌀을 보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쌀가게 주인의 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밝힌 한 남학생이 380만원을 건네며 "쌀 100포대를 구청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며 "100포대 가격인 430만원에는 부족한 돈이었지만 장사를 시작한 지 30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이고 학생의 마음씨가 너무 착해 그 돈만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자선 중에 가장 으뜸가는 자선은 겸손한 자선입니다. 남보란 듯이 떠벌리는 자선이 아니라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자선, 할 일을 다 했으면 미련 없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자선, 끝까지 신문기자들의 취재를 거부하는 자선, 그것만큼 아름다운 자선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참으로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참으로 큰 겸손이고 참으로 큰 물러남입니다.

우리가 한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물러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물러나는 일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은 다시 또 없는 듯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물러날 때가 왔을 때는 표시 내지 않고, 떠벌리지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서는 삶,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빛나는 조연의 기쁨을...

-상지종신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주연에게 쏠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유독 조연에게 더 시선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가가 의도했던 안했던 조연이 주연보다 더 관심을 끈다면, 이미 조연은 자신의 역할을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연은 주연을 받쳐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받쳐준다는 것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조연이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주연도 제대로 살아날 수 있기에, 조연 역시 꼭 필요한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연으로 머물 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지요.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아름답습니다. 조연은 자신을 통해 주연이 한층 더 빛을 낼 때 기뻐합니다. 조연은 자신이 작아짐으로써, 그리고 이를 통해 주연이 커짐으로써 보람을 느낍니다.

세례자 요한, 분명히 조연이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주연이 되라고 떠밀었지만, 요한은 분명 자신의 자리, 자신의 역할을 알았고, 그것에 충실할 뿐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통해, 자신의 증언을 통해, 구세주가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에 만족하면서 벅찬 기쁨을 느꼈던 빛나는 조연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미있는 사람, 가치있는 사람, 모든 이에게 기억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커다란 착각이 무엇이냐 하면... 제 경우에 한정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을 주연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못 살지만 않으면(잘 살지는 못한다 해도) 주위에서 ’신부님, 신부님’ 하면서 신자분들이 따릅니다. 그러다가 보면 극단적으로는 ’교회’ 또는 본당’이라고 하는 나라의 왕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요.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으로는 자신을 드러내곤 합니다. 주님을 드러내는 조연으로서의 빛나는 의미와 가치를 져버리고, 주님의 자리에 박차고 들어 앉아서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라는 멋진 드라마를 완전히 망쳐 놓는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구요.

오늘 또 다시 세례자 요한을 보면서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빛나는 조연으로서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기쁨에 넘쳐 외치는 요한의 음성을 제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요한의 초연함, 굳건함을 제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제이기 전에 나약한 한 사람이기에, 굳센 의지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쉽게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기에, 거룩한 주님 교회의 사제단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믿음의 벗들에게 부탁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가 조연으로서의 자신의 의미와 가치와 자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작정 추켜세우는 것이 사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가 사제일 수 있도록, 사제를 사제로서 사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위의 어떠한 칭송이나 부추김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준비하고 드러내는 조연으로서의 자신의 길을 충실히 걸어 갔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그리고 그렇지 않은 다른 신부님들께는 외람되지만, 많은 신부님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세례자 요한처럼 그렇게 굳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인간적인 유혹에 넘어가 조연으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주연이 되겠다고 덤벼들지 모릅니다. 아니 주연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조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애정어린 충고를 외면하고 오히려 주연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불만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저의 과민한 추측에 불과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리라 희망을 가져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많은 신부님들이 계시고, 함께 하는 소중한 믿음의 벗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땅의 모든 사제들이 빛나는 조연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함께 하는 모든 믿음의 벗들이 옆에서 항상 커다란 용기와 힘이 되어주시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예수 안에 사는 세례자 요한

-박상대신부-

복음서들이 시사하는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정확한 시점과 장소에 관하여는 이미 논한바 있다.(목요일 복음산책)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투옥 직후 갈릴래아 지방으로, 루가복음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개념을 도입하여 "지금과 여기",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비교하는 대비구조 안에서 요한으로부터 예수에로의 점진적인 이양작업으로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시점과 장소를 각각 논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구원사적 활동의 점진적인 이양작업은 말보다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례자 요한 스스로는 자신의 철저한 선구자적 임무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문제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마르 1,5)는 보도를 미루어 볼 때 세례자 요한은 상당히 많은 수의 제자들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세례자가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에 인접한 베다니아에 처음으로 등장하신다.(1,29) 여기서 요한복음은 세례자가 예수께 세례를 베푼 것에 관한 보도는 생략하고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를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한다. 세례자의 증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은 그의 제자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가 예수를 따라갔고, 안드레아의 형 베드로와 함께 예수의 첫 제자가 되었음으로 보증된다. 나아가 필립보와 나타나엘까지도 예수와의 대화를 통하여 첫 제자단에 합세한다.(1,35-51) 그후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첫 번째 기적(2,1-12), 해방절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서 치러진 성전정화와 활동(2,13-25), 니고데모와의 대화(3,1-13 또는 15), 그리고 제3인칭의 독백형식으로 기록된 복음에 관한 요약설명(3,16-21) 등의 보도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 가운데를 파고드는 예수님의 활동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동시에 첫 제자단의 예수께 대한 신뢰심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계속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은 살림 가까이에 위치하여 물이 많은 애논에서 계속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23) 살림과 애논지역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요르단강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서 사마리아 지방과 베레아 지방의 경계지역으로서 데카폴리스 지방에 속하는 곳이었다. 한편 예수의 일행은 유다지방에 머물면서 세례를 베풀었다.(22) 그러나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푼 것은 아니고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4,2) 예수의 세례는 분명 요한의 세례와 다르다. 공관복음서 어디에도 언급이 없는 예수의 세례는성령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예수부활 이후에 가서야 비로소 베풀어졌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성령의 세례’(1,33; 3,5)가 요한이 베풀던물의 세례’(1,26)와 대비하여 이를 능가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면 이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부의 세례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벌이는 활동에 대하여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는 가운데 언급된 세례자의 마지막 증언인 셈이다. 이 증언은 요한의 제자들이 표시하는 불만과 질투가 부당함을 설명하는 것이며, ’신부인 예루살렘이 준비하고 맞이하여야 할신랑이 바로 예수임을 증명하는 증언인 것이다. 이 증언을 끝으로 요한은 역사 속의 인물로 사라지게 된다. 구원역사의 장()에는 오직 예수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예수만이 메시아요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 대하여 마지막 증언을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입에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0)는 말을 담았다. 점점 작아져 없어질지라도신랑의 친구로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쁨에 벅찼던 세례자 요한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점점 작아 없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삶은 점점 커져 전부가 되실 그리스도 예수의 삶 안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