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하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는 우리의 현세적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믿고 받아들인 뒤에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절대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간단히 설명하면 작은 컵 하나에 바닷물을 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성’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신앙’해야 하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성에서 엉뚱하게 벗어나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성을 초월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에게 우리 인간의 존재는 미스터리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사물만을 인지할 뿐인데 우리는 그런 개미들을 저 높은 곳에서 바라다보며 그 가는 길을 빤하게 파악하고 있지요. 행여라도 손가락을 내밀어 개미가 기어오르게 한다면 개미로서는 정말 희한한 체험을 하는 셈입니다. 난데없이 손가락이라는 거대한 물체가 자신의 눈 앞에 생겨난 셈이니까요.
삼위일체를 올바로 믿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 삼위일체를 학구적으로 파고 든다면 세상의 모든 종이를 글씨로 채워도 무의미한 짓이 되고 맙니다. 왜냐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당신을 그렇게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이유는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세 분이서 온전히 한 마음으로 일한다는 것은 곧 ‘최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세 존재가 온전히 하나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 외에는 없기 때문이지요.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고 두 사람이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두 사람은 같아지게 됩니다.
모양이 같은 컴퓨터라도 어떤 운영체제와 프로그램을 설치하느냐에 따라서 쓰임새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지만 다른 모양의 컴퓨터라도 같은 운영체제와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같은 목적으로 쓰이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떨어져 있는 두 존재를 진정으로 하나로 묶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셨지요. 우리는 바로 이 ‘사랑’으로 나아가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각각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리기가 힘들다고 생각된다면 그 중의 하나만 떠올리고 그분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왜냐면 세 분은 결국 한 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천지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아버지를 향해 사랑의 공경을 드려도 좋고, 우리를 구하러 인간이 되어 오신 외아들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며 그분을 사랑해도 좋고, 모든 신앙인을 하나로 모으는 성령을 직접 느끼면서 사랑해도 좋습니다.
삼위일체를 절대로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삼위일체는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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