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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25주간 수요일 미사강론 - 북산성당 부주임 이균태 안드레아 신부님 ~

 
 

 

축일: 9월24일

메르체데의 성모마리아

 

 

1218년 8월 1일, 성모께서 베드로 놀라스코에게 발현하시어

회교도의 노예가 된 그리스도교를 구출하는 수도원을 창설하라고 분부하셨다.

 

다음 날 그가 야고보 왕에게 가서 그 사실을 말하니

 왕도 똑같이 그러한 성모의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조금전 부터 페냐포르트의 라이문도라는 성인도 왕에게 초대를 받아

아라곤에 와 있었는데 그분도 성모 마리아로 부터 같은 말씀을 받았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된 세 사람은 대단히 놀라며

바르셀로나의 주교 베렌가리오를 방문해 자세한 말씀을 여쭙고, (8월10일?)

8월15일을 기해 ’메르체데의 성모 마리아회’라는 새 수도원을 창립했다.

 

 

이보다 벌써 20년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기사 여러명이 역시 같은 목적을 위해

신심회를 세운 일이 있었는데 베드로 등은 그 회의 규율을 기초로 새로운 회칙을 작성하고

즉각 13인의 동료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 수도원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인가를 얻은 해는 1235년이었다.

 

1212년 사라센들은 유명한 톨로사의 격전에서 패배해

거의 스페인에서 소탕 당하고 겨우 남쪽에 있는 그라나다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베드로는 수도원 창립 후 즉시 그 지방에 가서 불쌍한 노예 400명을 위해 대금을 내고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베드로 놀라스코는 또한 "노예인 신자들에게 자유를 줘야 할 때,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을 인질(人質)로 바칠 각오를 가져야 한다."라는

회칙의 제4서원에 따라 북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대신해 쇠사슬에 결박되어

투옥 당한 일도 있었다.

 

그때 사라센들은 그를 죽이려고 돛대도 키도 없는 작은 배에 태워 바다로 띄워 보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베드로는 그러한 고난과 피로와 노령으로 매우 몸이 허약해져서 수도원 총장직을

후임자에게 넘기고 수년간의 여생을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보속으로 지냈다.

 

이와같이 세상에서 많은 공적을 세운 성인은 1256년, 마침 성탄절 밤에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1628년에 시성되었다.

 

*성 베드로 놀라스코St. Peter Nolasco 축일:1월28일

 

 

     

       

       

       

      찬미예수님!

       

       

      오늘의 미사강론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미사 강론

       
       

      복산성당 부주임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나자렛 예수라는 한 인물이 운동을 일으켰다.

    « 하느님 나라 »라는 운동이었다.

    그 운동의 슬로건은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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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믿고 회개하시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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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계시는 분처럼 여겨졌던 그 하느님이, 백성의 눈물과 한숨과

    한탄에 눈도 꿈쩍하지 않으실 것처럼 여겨졌던 그분이 실은

    한 많은 백성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계셨다는 내용의 슬로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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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구호 아래 예수라는 그 분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모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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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은 호숫가에서 고기를 낚던 어부들도 모으고,

    세금 징수원도 모으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열정으로

    똘똘 뭉친 레지스탕스도 모으고,

    셈 밝히는 데에 아주 뛰어난 사람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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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 주위에는 여성들도 많았다.

    벼라별 사람들이 그분 주위로 모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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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는 장정만도 5천이 넘는 때도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와 만나면서 하느님을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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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분과 함께 하는 삶의 풍요로움, 당당함, 행복, 자유, 평등을 체험했다.

    예수와 함께 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그 하느님을 전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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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을 알릴 때에 주의 사항 혹은 선교 강령이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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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산 성당 맞은 편에 있는 울산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신도들에게 밥도 주고,

    또 신도들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울산 시내에 있는 많은 중고등학생

    아이들에게 아침에 등교할 때에, 김밥 한 줄을 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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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아침밥을 교회가 챙겨준다.

    어디 그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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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과외공부도 시켜주고,

    아이들에게 영어 성경공부도 시켜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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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 수도 많고, 그 많은 신도들이 꼬박꼬박 십일조도 잘 내고 하니까,

    그런 사업들도 할 수 있다는 게, 그 맞은편에 건물 하나 덩그러니

    참 멋지기는 하지만, 늘 « 돈 »이 조금 아쉬운(?) 복산 본당 신부로서는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아가 생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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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우리나라의 선교 역사를 고려해 볼 때,

    오늘 복음의 선교 행동 강령은 선교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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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우리나라는 6․25 전쟁의 피해로 경제 사정이 매우 힘들었다.

    그 때 당시 못사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유엔과 미국을 위시한 서방에서는

    우리나라에 많은 구호물자들을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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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로 보내준 구호물자들은 대부분 교회나 성당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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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사람들은 성당이나 교회를 찾아가서 구호물품들을 받았다.

    그 때 나온 말이 ‘밀가루 신자’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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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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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이 신앙의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과는 전혀 상관없이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신자가 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먹고사는데 한시름 놓을 만큼의 생활이 되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처럼, 교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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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때 당시에 구호물품을 받기 위해서 신자가 되었지만,

    신자로서의 삶이 정말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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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진리의 말씀보다는 ‘구호물품 받아가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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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구호물품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그저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만 했다.

    물론 예수께서도 배고파 죽겠다고 소리치는 5000명에게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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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들을 구원에로 초대하고, 그들의 삶의 질을 한층 더 높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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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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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알리고자 한 하느님은 깊은 명상을 통해서,

    혹은 면벽 수양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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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과의 친교와 나눔, 정의와 평화와 공동선을 위한

    연대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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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라는 것이 천주교 신자 숫자 하나 더 늘리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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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짝 교우 집안에서 성당 다니지 않는 배우자에게 세례 받으라고 잔소리하고,

    은근히 협박해서 신자로 만드는 것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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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에 우선하는 것은 믿는 이들이 먼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사실 선교의 일차 대상은 바로 믿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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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공동체 자체가 선교의 일차 대상인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부터 하느님을 믿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복음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한다면, 결코 제대로 선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