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재에 저항했던 행동하는 신학자
디이트리히 본 회퍼
루터 킹 목사-투투 주교에 영향
‘고백교회’ 설립, 히틀러에 저항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
본 회퍼는 뉴욕 할렘의 한 흑인교회 주일학교에서 근무하며 소수인이 겪는 사회적 불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됐다. 1960년대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써서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준 영국 성공회 주교 로빈슨(J. A. T. Robinson)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큰 신학자 셋으로 루도르프 불트만, 폴 틸리히, 디이트리히 본회퍼를 들었다. 1960년대에 『세속도시』라는 책을 써서 신학계에 선풍을 일으켰던 현 하버드 대학교 하비 콕스 교수도 본회퍼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학자들 중 하나다. 미국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 남아공 인권운동가 데스몬드 투투 주교도 본회퍼로부터 영감과 용기를 얻은 이들이다. 한국에서도 본회퍼가 쓴 책이나 그에 관한 책이 20여권 출판되어 있다.
정신과 의사 대신 목사의 길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의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여자 형제 사비네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의 신경과 및 정신과 교수, 베를린 병원의 정신 병동 과장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훌륭한 가문의 딸로서 대학을 졸업하고 자녀들을 학교 대신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신과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부모의 기대와 달리, 열네 살 되었을 때 자기는 신학을 전공하여 목사가 되리라 공언했다. 그의 형이 “교회처럼 보잘것없고, 허약하고, 재미없고, 쪼잔하고, 브르조아적인 기관에서 평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당부하자, 그는 “형이 말한 것이 진짜라면, 내가 그걸 개혁해야지.”하고 대답했다.
본회퍼는 튜빙겐 대학에 입학하여 일 년 다니다가 로마를 방문하고 1924년부터 그 당시 아돌프 폰 하르낙 같은 신학자들이 주도한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중심지 베르린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거기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여 생겨난 신정통주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저서를 읽었다. 하르낙은 본회퍼에게 “과학적 신학을 경멸하는” 바르트의 사상을 경계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성을 감지하고 그 약점을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보완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교가 현대 세계의 상황에 응답해야 한다는 하르낙의 입장과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주의적이어야 한다는 바르트의 주장을 절묘하게 종합해서 자기 신학을 구성했다.
본회퍼는 1927년 베르린 대학을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 21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에서 그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했는데, 바르트로부터 ‘신학적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2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독일인 교구로 가서 1년간 봉사했다. 여기서 투우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 국제 금융시장에서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29년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와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에 끼친 초월주의 철학의 영향력을 밝히는 논문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목사로 안수 받을 나이가 되지 못해 1930년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신학이 없다.”고 할 정도로 미국 신학이 독일 신학의 수준에 미흡하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그는 그의 삶을 바꾸는 경험을 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 밑에서 공부하며 같이 공부하던 흑인 학생 프랑크 피셔를 만난 것이다. 피셔는 본회퍼에게 뉴욕 할렘에 있는 한 침례교회를 소개하고, 본회퍼는 그 교회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미국 흑인들의 영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 교회 목사가 사회정의를 외치는 설교를 들으면서 흑인 등 소수인들이 겪는 사회적 불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이런 문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 사물을 ‘억압 받는 자들의 시각에서’ 보기 시작하고, “여기야 말로 죄와 은혜와 신의 사랑에 대해 진정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했다. 나중 이 때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나는 말장난에서 현실로 돌아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유대교 박해-독재에 투쟁
1931년 본회퍼는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가 조직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그리스도교의 이론적인 면만을 천착하는 신학자가 아니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하는 행동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1931년 11월 15일 드디어 25세의 나이로 베를린에 있는 성 마태 교회에서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33년 1월 30일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평탄하던 본회퍼의 삶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은 이틀 후 본회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을 ‘잘못 인도할 지도자(Verführer)’가 될 수도 있는 ‘지도자(Führer)’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방송은 도중에 끊겼다. 그해 4월에는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비판하면서, “교회는 바퀴에 깔린 희생자에게 반찬고나 붙여주는 일에 만족하지 말고 바퀴 자체의 바퀴살을 틀어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본회퍼는 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나치 정권을 지지하고 나설 때 그의 동료들과 함께 ‘고백교회’를 설립하여 나치정권에 대항했다. 1933년 9월 아리안(독일인종)이 아니면 교회를 맡을 수 없다는 법령이 채택되고 본회퍼에게 베를린 동쪽에 있는 어느 교회를 맡으라는 제안이 왔을 때 그는 이것이 인종차별 정책이라 비판하면서 이 제안을 거절했다. 나치 정권에 협력하는 독일 교회에 실망한 본회퍼는 영국 런던에 있는 독일인 교회 둘을 2년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1933년 가을 독일을 떠났다.
1935년 영국에서의 계약이 끝나고 인도 간디 아슈람에서 간디의 지도로 비폭력 저항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주 좋은 기회였지만 독일에서 고백교회 목사들을 훈련할 지하 신학교를 이끌기 위해 독일로 돌아왔다. 그가 할 일은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자금을 모으는 일이기도 했다. 이 신학교를 도와준 후원자 중에는 룻 폰 클라이스트-레쪼우라는 여자도 있었는데, 본회퍼는 후에 그 여자의 손녀 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하고, 약혼한지 석 달 만에 나치 정권에 의해 체포되었다.
1937년 9월 게스타포는 신학교를 폐쇄하고 11월 27명의 목사들과 졸업생들을 체포했다. 다음 2년간 본회퍼는 나치의 눈을 피해 작은 마을에서 불법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신학 교육을 계속했다. 이때 본회퍼는 그의 신학교 지도 경험을 기초로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책 『제자됨의 값』과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내었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풀이한 처음 책에서 그는 도덕적으로 해이하면서도 용서를 받는다는 생각의 ‘값싼 은혜’를 공격하고, 예수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비싼 은혜,’ ‘제자됨의 값’을 강조했다.
본회퍼는 평화주의자로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도 없었고, 나치 정권을 위한 군복무에 임할 수도 없었다. 이를 거절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에 속했다. 본회퍼는 도저히 독일에 계속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1939년 6월 유니온 신학교의 초청을 받고 다시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으로 온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라인홀드 니버에게 쓴 편지에서 “제가 미국으로 오기로 결심한 것이 실수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독일 국민들과 함께 독일 역사에서 이런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내야 합니다.”고 하고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에 돌아온 본회퍼는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이 금지되고 정기적으로 그의 활동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1년에는 인쇄매체로 글을 쓰는 것도 금지 당했다. 그러면서 그는 1938년부터 매형을 통해 알게 된 반나치 저항 운동에 가입했다. 이들은 결국 히트러를 암살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본회퍼도 이런 생각에 동조했다. 그는 암살 음모에 가입하는 것을 구차스럽게 정당화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단 그 죄를 다른 사람과 다음 세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본회퍼는 주로 해외연락 책임을 맡았다.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등을 다니며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1943년 4월 6일 본회퍼와 그의 매형 도나니가 체포되었다. 암살 음모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은 아니지만 조사 도중 도나니가 14명의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켜 준 것이 드러나고, 이어서 그의 사무실을 뒤지다가 본회퍼의 국외활동과 반나치 단체의 암살 음모에 관련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옥중에서 형장의 이슬로 최후
본회퍼는 재판을 기다리며 테겔 군용 감방에 18개월 동안 갇혀 있었다. 거기 있으면서 저작활동을 계속했다. 그에게 호의적인 간수의 도움으로 그가 쓴 것을 그의 친구 에베르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 등에게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후에 『옥중서간』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1944년 7월 20일 본회퍼가 속해 있던 반나치 단체의 히틀러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 음모와 관련된 문서들이 발각되면서 본회퍼의 관련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1945년 2월본회퍼는 그 동안 지내던 테겔에서 떠나 몇 군데 중범자 감옥을 거쳐 플로센버그에 있는 수용소로 옮겨졌다.
1945년 4월 8일 증인도, 재판기록도, 변호인도 없이 사형선고가 내리고, 4월 9일 새벽 교수형으로 39년 2개월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들어오기 3주전, 나치 독일이 무너지기 한 달 전이었다. 그의 형과 두 매형들도 얼마 뒤 다른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의사가 한 말이다.
“나는 본회퍼 목사가 바닥에 꿇어 앉아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에 더할 수 없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너무나도 경건한 모습으로 하느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사형장에서 그는 다시 짧게 기도하고 교수대 계단을 올랐다. 당당하고 침착하였다. 몇초 후 그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의 50년 가까이 의사로 일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이처럼 전적으로 순복하면서 죽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신학을 삶으로 옮긴 실천 신학자
해방 신학-민중 신학의 모태
기독교 본질 종교 아닌 복음
값싼 은혜-헐값의 용서 비판
본회퍼는 “어떤 미친 운전수가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나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느니 그 자동차에 뛰어 올라 그 미친 운전수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질문은 평화주의자이며 목사였던 그가, 더욱이 인도의 성자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배우려 했던 그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마치 ‘평화의 왕’이라 불리는 예수님이 “내가 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가지게 되는 의문과 같다. 물론 평화라고 하여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본회퍼 자신도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였다.
역사 종교 없는 시점으로 달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수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나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임무라 생가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뛰어 올라 그 미친 운전수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본회퍼 자신이 본래부터 폭력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폭력을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하려 하지도 않았다. 마치 초등학교 운동장에 어느 살인마가 나타나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하고 있을 때 평화주의자나 목사라고 하여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본회퍼의 행동도 그가 스스로가 말하는 “책임 윤리”라는 원칙에서 나온 결과라 이해해야 될 것이다.
사실 본회퍼에게는 너무나도 자상한 면이 있었다. 1944년 성탄절 38세의 본회퍼가 18세 연하의 약혼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그가 얼마나 여리고 로맨틱했던가 하는 단면을 볼 수 있다. 지금 쯤 우리 두 사람의 본가에서는 쓸쓸한 날을 맞이하겠네요. 하지만 나는 여러 차례 이런 경험을 했지요. 내 주위가 쓸쓸하면 쓸쓸할수록, 내가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더욱 분명해지네요. 마치 영혼이 고독하면 고독할수록,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알지 못하던 감각이 발달하는 것과 같지요. 내가 한 순간도 외로움이나 고독감을 느낀 적이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내가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인가요? 그것은 외부 환경에 좌우되지 않지요. 그것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나는 날마다 당신이 나와 함께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본회퍼의 저술은 초기 몇 작품의 경우를 제외하면 조용한 연구실에 앉아서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발표된 것이 아니다. 그의 신학사상은 주로 나치 정권에 저항하면서 행한 강연이나 설교, 편지, 일기, 메모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발표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서 나온 그의 저술을 보면 단행본으로 『성도의 교제』, 『행위와 존재』, 『창조와 타락』,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 『윤리』, 『저항과 복종』 등이 있고, 1986년에는 지금까지의 저작을 다시 편집하여 전16권으로 된 전집이 출간되었다. 그 후 그의 약혼자와 교환한 서신이 공개되어 출판되고, 2000년에는 그의 삶을 담은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기도 했다.
그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중요한 신학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본회퍼의 사상의 근간은 그의 그리스도론이다. 베르린 대학에서 행한 그의 강연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와 역사의 중심이며 신과 자연의 중보자라는 것이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도 “그리스도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화두처럼 계속 붙들고 있었지만 이제 그는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pro me)’라기보다 ‘우리를 위하여(pro nobis),’ 결국에는 ‘남을 위하여(pro aliis)’ 산 분이라 정의하고, 특히 그가 “남을 위한 존재(Dasein-für-andere, being-for-others)”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보살 사상을 연상하게 하는 발언이다.이것도 그리스도를 ‘따름(Nachfolge, discipleship)’의 문제와 관련되는 사상으로, 키에르케고르를 강의하면서 자극을 받고 만들어낸 말이다. 교회가 “예수 따름”의 숭고한 사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해결사 신 등장은 천박한 일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 없이 무한정 쏟아 내는 은혜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는 은혜다....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덮어 줄 값싼 덮개를 값싼 교회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하느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그러면서 그는 루터가 말한 은혜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을 통해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함을 전제로 한 은혜라고 하였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는 “까마귀처럼 ‘싸구려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의 독을 받아 마신 결과 우리에게는 예수를 따르는 삶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름대로 표현해 보면, 값비싼 은혜는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인데 반해, 값싼 은혜는 예수의 십자가를 ‘타고’ 가려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 위해 사는 것이 참된 신앙
본회퍼는 감옥에 있을 동안 어느 모로 보나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들은 감옥의 힘든 삶이나 연합군의 폭격 속에서도, 심지어 사형 선고를 받고도 결코 ‘종교적 위안’을 구하지 않았다. 본회퍼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결국은 비종교적 내지 탈종교적인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미래를 이끄는 선구자들이라는 것, 그리고 역사는 결국 종교가 없는 시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이와 같은 시대에 예수의 기별이 어떻게 의미 있게 전달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란 그리스도교가 입고 있는 일종의 ‘외투’로서, 이제 그것을 벗어 던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어떻게 “우리는 이 ‘성년의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을 창안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졌다.
본회퍼는 자기가 던진 이 질문에 체계적인 답을 주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을 통해 이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미루어 알 수는 있다. 그는 인류의 역사가 신화의 ‘고대 시대’를 지나, 종교의 ‘형이상학적 시대’를 거쳐, ‘성년의 세계(world come of age)’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칸트가 말한 이 용어를 빌려 쓰기는 했지만 칸트 식으로 지금이 도덕적으로 더 훌륭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사람들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가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이제 우리는 ‘세속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특히 그는 중세의 연극에서 앞뒤 이야기의 흐름이 맞지 않을 때 신을 등장시켜 문제를 해결할 때처럼 ‘기계에서 튀어나온 신(deus ex machina)’ 같은 신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나 한계에 부딪쳤을 때 불러들이는 도구로서의 신, 주변으로 밀려났다가 필요할 때마다 가끔씩 해결사로 등장하는 신은 안 된다고 보았다. 본회퍼는 참된 신은 초월적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 중심에 계시는 분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를 두고 우리는 ‘하느님 앞에,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없이’ 산다고 표현했다. 이런 하느님은 고난 받고 약한 하느님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결국 신의 고난에 동참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처럼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본회퍼는 성년의 세계, 세속화된 세계에 사는 우리가 복음을 ‘비종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가 믿음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비종교적’이라는 말은 카를 바르트가 종교와 복음을 대비시켰을 때의 의미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다른 종교와 달리 종교가 아니고 복음이라고 주장했다. 본회퍼도 이런 주장을 배경으로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의 테두리에서가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참된 신앙을 위해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형이상학적이고 내세 중심주의적인 상징체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오늘 내 삶을 역동적으로 이끌어 줄 새로운 영성의 차원을 희구한다는 뜻으로 “나는 종교적이 아니라, 영적이다(I am not religious, but spiritual).”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사신(死神)신학, 세속화신학, 상황윤리, 평화신학,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등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본회퍼에 대한 이해와 오해에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그가 공리공론의 신학자가 아니라 그의 신학을 직접 삶으로 옮긴 실천의 신학자라는 데 크게 감명을 받는다.
하버드 대학교 하비 콕스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테겔 군인 구치소 19호 감방의 수감인이 성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아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완전한 인간적인 존재에 가까웠고, 그는 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들려줄 가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에버하르트 베르게 지음 김순현 옮김, 0『디이트리히 본회퍼』,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예수 하버드에 오다』, 유석성, “디이트리히 본회퍼” 등을 참조했음)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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