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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진방

~ 힌두교 - 이슬람 회통시켜 시크교 창시 / 구루 나낙 ~

                                 



힌두교-이슬람 회통시켜 시크교 창시
신은
 초월이면서
동시에 내재

유일신
 인정하고 윤회도 믿어
신과 합일하는 것이 니르바나

구루 나낙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조화를 통해 양 종교의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크교라는 또 다른 종교의 창시로 귀결됐다. 그리고 오늘날 시크교도가 많은 푼잡 지역에서는 분리 독립 운동의 기운이 일고 있기도 하다. 구루 나낙(Guru Nanak, 1469~1539)은 시크교(Sikhism)의 창시자다. 시크교는 16세기 인도 동북부 푼잡 지역에서 생긴 종교로서, 현재 푼잡 지방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 약 2천5백만 신도를 가지고 있다. 구루 나낙은 1469년 4월 15일 지금의 파키스탄 라호르 부근의 한 마을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 지역 이슬람교도 지주의 소작물을 관리하던 회계사였다. 남편과 아들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와 누나가 있었다.

파키스탄 힌두교 가정서 탄생

그가 태어났을 때 한 점성술가가 찾아와 그를 보고 나서 아기에게 합장을 하며 “내가 이 어린 구루 나낙이 어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살지 못하는 것이 한이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가 와서 한 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구루 나낙은 자라면서 힌두교 친구들 뿐 아니라 이슬람교 친구들과도 사귀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삶과 종교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6세에 마을 훈장으로부터 힌디어와 수학을 배우고 그 후 학교에 들어가 이슬람 문헌,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을 공부했다. 그의 총기와 깊은 종교적 안목에 선생님과 학생들은 놀랐다고 한다. 한 번은 그가 밖에서 자고 있는데, 코부라가 와서 그의 머리에 비치는 햇볕을 가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나낙은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돌보면서도 계속 명상에 너무 골똘하고, 또 마을 주위의 숲에 있던 이슬람이나 힌두 종교인들과 종교문제로 토의하는데 시간을 보내느라 가축 돌보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면 좀 더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하여 부모는 16세의 아들에게 어느 상인의 딸을 신부 감으로 구해주었다.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얻었다. 아버지의 생각대로 정부 기관에서 일 자리를 얻어 낮 동안은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밤늦도록, 그리고 아침 일찍, 그는 그의 이슬람교 친구 마르다나(Mardana)와 함께 현악기의 일종인 라밥에 맞추어 종교적인 노래를 부르는 데 시간을 보냈다.

나낙이 30세 되었을 때, 어느 날 이른 아침 그의 친구 마르다나와 함께 강으로 목욕을 하러 갔다. 물속으로 뛰어 들어간 다음 다시는 물위로 나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가 없어,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여기고 포기했다. 그런데 3일 후에 숲에서 나왔다. 그는 숲속으로 들어가 신을 만났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은 그에게 꿀 한 컵을 주고, 그는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마셨다. 이어서 신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그리고 너의 이름을 받들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가서 내 이름을 전하고, 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라. 세상에 물들지 말지어다. 내 이름을 외우는 일, 자선, 정결례, 경배, 명상을 실천하라.”

숲에서 나온 나낙은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눈에서는 거룩한 빛이 비치고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하루 종일 깊은 선정 속에서 말이 없다가 다음 날 그는 중대한 선언을 했다. “힌두교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슬람교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There is no Hindu, no Muslim.)” 이 선언과 함께 시크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일치가 구루 나낙의 기본 가르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낙은 직업을 포기하고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 준 후 그의 친구 마르다나와 함께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멀다하지 않고 두루 찾아다니며 그야말로 ‘천하주유(天下周遊)’의 삶을 살았다. 다니면서 시장이나 공터나 길모퉁이나, 어디서나 사람들만 보면 노래를 부르고 그의 메시지를 전했다. 다니면서도 힌두교 복장과 이슬람 복장을 결합한 자기대로의 옷을 입고 다니며 힌두교와 이슬람이 하나임을 몸으로 증언했다. 이렇게 씨를 뿌려 놓으면 언젠가는 신이 싹틔워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드디어 푼잡에 이르러 그의 수고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시크’(Sikh)라고 불렀는데, 푼잡 말로 ‘제자’란 뜻이었다.

어릴 때부터 종교적 안목 탁월

전설에 의하면 나낙은 메카에도 갔다고 한다. 밤에 잠을 자는데, 그의 발을 이슬람 교도들이 모두 엎디어 절하는 카바 흑석의 방향으로 놓고 잤다. 이슬람 지도자 한 사람이 나낙을 발로 차며 “오, 죄인이여, 당신은 왜 당신 발을 신을 향하게 하고 있소?”하고 질책했다. 나낙은 “신이 없는 방향이 있다면 내 발이 그 쪽을 향하도록 해 주시오.” 결국 신이 없는 곳은 없다는 메시지를 듣고 그 이슬람 지도자는 구루 나낙을 다시 보게 되었다.

구루 나낙이 69세가 되었을 때 그와 평생을 함께 해온 친구 마르다나가 병들어 죽었다. 나낙도 자기에게 끝 날이 가까웠음을 깨닫고, 그이 아들들과 제자들을 여러 가지로 시험한 결과 구루 나낙에 대한 믿음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던 레나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앙가드(Angad)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1539년 9월 22일 70세의 나낙이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힌두교 식으로 화장(火葬)을 해야 하는가 이슬람교 식으로 매장(埋葬)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토론을 했다. 나낙은 자기 오른쪽은 힌두교 출신 교인들이, 왼쪽은 이슬람교 출신 교인들이 꽃을 놓고, 다음 날 꽃이 시들지 않고 싱싱하게 남아 있는 쪽에 꽃을 둔 편의 방식대로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제자들이 양 옆으로 꽃을 놓자, 나낙은 요대기를 뒤집어 쓴 다음 숨을 거두었다. 다음날 요대기를 벗겨보니 양 쪽 꽃은 모두 싱싱한데, 나낙의 시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힌두교 출신들은 자기들 꽃을 가져다가 화장하고, 이슬람 출신들은 자기네 꽃을 가져다가 매장했다. 죽으면서도 힌두교와 이슬람의 평화와 화합을 염원한 나낙의 삶을 나타내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머리·수염 기르고 머리엔 터번

나낙의 가르침은 힌두교와 이슬람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궁극적인 신은 힌두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결국 이슬람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궁극적으로는 하나라고 가르치는 식이었다. 이런 궁극적 신을 그는 ‘참이름’(The True Name)이라고 했다. 궁극적 신을 이렇게 ‘참이름’이라 부르는 것은 알라, 시바, 비슈누, 라마 등의 이름은 궁극적 신을 제약하는 이름으로서 참신의 참된 이름일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궁극적인 신은 초월이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신이며,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파괴자라고 했다.

다른 한 가지 특이한 가르침은 신이 창조한 것들 중에서 인간은 최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어도 좋다고 말하므로, 인도 전통에서 그렇게 강조되는 아힘사(不殺生)의 원칙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물론 이런 가르침에서 그에게 끼친 이슬람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다.

구루 나낙에 의하면 이 물질 세계는 마야로서, 경험적으로는 실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비실재적이다. 참된 실재는 오로지 창조자인 신뿐이기 때문이다. 세상도 인생도 모두 덧없으므로 이 세상에 계속 태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업(惡業)을 피해야 하는데, 가장 큰 악업은 ‘이기주의(haumai)’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기주의를 지양하고, 항상 신을 생각하고, 쉬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결국은 신에게 흡수(absorption)되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나낙에 의하면 구원은 개별적인 내가 심판에 합격하여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가 ‘참이름’에 흡입되어 신과 합일 되는 데서 오는 니르바나의 체험을 갖는 것이다.

구루 나낙은 신이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무나 돌로 된 형상을 향해 절하는 것, 메카를 향해 절하는 것, 순례, 금욕 등 힌두교나 이슬람의 형식적 예배를 멀리하고, 언제나 신을 깊이 생각하고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라고 한다. 이런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는 우리의 생각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참 이름을 진정한 마음으로 외우는 것이 성지 68곳을 찾아 몸을 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왜 신을 찾아 숲으로 가는가? 나는 그를 집에서 찾았다.”고 했다. 나낙은 사회를 등지고 오로지 도만 닦겠다는 사람들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종교는 모든 계급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킬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나낙은 힌두교 환생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 사상에 따라 나낙이 죽은 후 다음 구루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나낙 이후 열명의 구루가 있었다. 제4대 구루 람 다스(Rām Dās, 1534~81)는 암리차르(Amritsar)에 황금사를 지어 본사로 삼았다. 제10대 구루인 고빈드 싱(1675~1708)을 마지막 지도자로 하고 그 이후부터는 그들의 경전 그란스(Granth)를 구루로 삼았다. 고빈드 싱은 정당방위를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이를 ‘싱’(Singhs)이라고 했는데, ‘사자’(獅子)라는 뜻이다.

(인도 사람들 중 마지막 성으로 ‘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시크교 출신이라 볼 수 있다. 싱가폴은 ‘사자의 도시’라는 뜻.) 이들은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터번을 쓰고, 짧은 바지를 입고, 쇠로 된 팔찌를 끼고, 단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 전통은 지금까지, 심지어 캐나다에서까지, 계속되고 있다.(캐나다 경찰이 된 시크교도는 모자 대신 터번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힌두교와 이슬람은 같은 종교”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힌두교와 이슬람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여 출발한 운동이 이 두 종교의 일치는 이루지 못하고 시크교라는 또 하나의 종교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크교도들은 인도 내에서 힌두교인도 이슬람교인도 아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언제나 소수에 속했다. 이런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려고 현재 푼잡을 인도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어 인도 정부와 무력 충돌을 빚기도 한다. 이럴 경우 나낙의 가르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힌두교나 이슬람 등 어느 하나의 종교를 화석화된 절대불가변의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가르침이 아닐까?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