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미사 강론
복산성당 주임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if !supportEmptyParas]--> <!--[endif]-->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하느님을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 사랑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이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어려운 신학용어를 쓰자면,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聖事)인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은 당연히 사람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반대 방향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람을 사랑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인간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실제로 인간적인 희망과 사랑만으로도 지상 낙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인간 역사 내에 존재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바로 휴머니즘(humanism, 인간주의)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특히 ‘프리메이슨’은 신적인 것을 제외시킨 휴머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간적인 희망과 사랑, 인간만을 위한 사랑, <!--[if !supportEmptyParas]--> <!--[endif]--> 좀 더 인심을 쓰고 범위를 넓혀서 세상에 대한 사랑, 그것만으로도 어쩌면 이 세상을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리고 사람들 간의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그런 세상을 희망하는 데까지만 희망의 한계를 그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희망만으로도 이 세상을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충분한 동기 부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럼에도 왜 굳이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것도 하필이면 서양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흔히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믿음이라고 한다. 이 믿음은 하느님과 인간 간의 관계 바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직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양자 간의 관계 안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단어이다. 인간 앞에 놓여있는 ‘믿음과 불신’이라는 두 갈래의 길 가운데, 믿음은 그 시작에 있어서 ‘선택’에 의한 것,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렇지 않은 것은 믿음이 아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한 것이거나, 자신의 가정 혹은 주변인들에 의해 마지못해 믿음의 삶을 사는 체 하는 것 또한 믿음이 아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자신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되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지만, 이 믿음은 또한 은총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믿음의 시작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누구나 믿음이 자신만의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자신의 의지만으로 믿음의 삶에로 들어왔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어느 누군가의 부르심에 의한 것, 불리움을 받은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삶 속에서 때로는 믿음과 결별하고자 하는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에 그래도 손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것은 자신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것은 어느 누군가가 자신을 도운 것이라고, 누군가가 손을 잡고 이끈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바로 그 어느 누군가가 하느님이다. 세상이 아무리 무신론화되어 가고, 더 이상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마지막으로 되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다름 아닌 하느님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마지막 보루가 하느님인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러한 믿음은 삶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삶 속에는 기쁨과 희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번뇌도 함께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화려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지극한 단조로움도 있고, 따분함도 있다.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모든 것은 삶 속에서 실제로 체험하거나 체험되는 것들이다. 이 체험들과 믿음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모든 것들과 완전히 결별한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만일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현실도피에 불과한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믿음은 삶의 그 모든 것, 그 모든 순간, 삶의 모든 공간과 함께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믿음 속에도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화려함과 단조로움, 따분함과 무의미가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삶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겪게 될 때에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믿음 속에서는 대개 그러하지 않다. 그러한 상태를‘죄의 상태’까지 여기기 십상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는 대부분 믿음을 삶과 분리된 것으로, 삶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이 배제되어있는 거룩한 것, 삶과 유리(琉璃)되어 있는 거룩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은 우리와 동떨어진 채 계시는 분, 우리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감추어진 채,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하느님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믿음의 삶과 믿지 않음의 삶의 결정적인 차이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느님과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기쁠 때에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고, 슬프고 힘들 때에도 하느님과 함께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며,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 <!--[if !supportEmptyParas]--> <!--[endif]--> 곧 하느님과 늘 함께 하는 삶이다. 이러한 믿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다름 아닌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적어도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눈감고 관상하며, 조용 조용히, 세상 일과는 무관하게 마치 섬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웃에게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상식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보이는 이웃이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고, 억울해할 때에, 그의 말을 들어주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억울함까지도 풀어 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 정도는 되어야 참 신앙인이라는 소릴 듣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러한 세상에서 실천이 없는 영성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에 거품만 잔뜩 끼게 만든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실천 없는 영성은 공허하고, 영성 없는 실천은 맹목이다. 어느 가정이든지, 어느 공동체이든지 언제나 묵묵히 땀 흘리며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 가정과 공동체는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하고 있는 « 작은 일들 », « 땀 흘리는 일들 », « 노력과 봉사들 »이 하느님 앞에서 결코 작은 일들이 아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실 이런 일들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워내고 기적을 낳는다. 때로는 귀찮고, 때로는 지긋지긋한 일상의 모든 작은 일들이 결국 생명과 사랑을 낳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너를 위한 아주 작은 일들을 묵묵히, 불평 불만, 볼멘소리 너무 지나치게 하지 않고, 기쁘게 해 나갈 때, 우리 안에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힘이 충만하게 내린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로 연결되는 은총의 끈이고, 내가 성화(聖化), 곧 거룩하게 되어 가는 장이며, 기도 중의 기도이고, 내가 세상에 사람으로 나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고, 마침내 하느님의 아들 딸로 부활하게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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