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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0주일 미사 강론 - 북산성당 주임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 ~

 

 

축일 : 10월 26일

포텐차의 복자 보나벤투라

 

 

나폴리의 포덴짜 출신으로 노체라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칸이 되었다.

 

그는 순종의 덕행으로 유명하고, 또 장상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수련장직은 맡았다.

 

성모님께 대한 보나벤뚜라의 신심은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 신심이었다.

그는 라벨로에서 운명했는데, "순종의 모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찬미예수님!

 

오늘의 미사강론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미사 강론

 

복산성당 주임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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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하느님을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

사랑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이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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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신학용어를 쓰자면,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聖事)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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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은 당연히 사람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반대 방향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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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인간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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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인간적인 희망과 사랑만으로도 지상 낙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인간 역사 내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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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휴머니즘(humanism, 인간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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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프리메이슨’은 신적인 것을 제외시킨 휴머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간적인 희망과 사랑, 인간만을 위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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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인심을 쓰고 범위를 넓혀서 세상에 대한 사랑,

그것만으로도 어쩌면 이 세상을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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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람들 간의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그런 세상을

희망하는 데까지만 희망의 한계를 그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희망만으로도 이 세상을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충분한 동기 부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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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왜 굳이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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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하필이면 서양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흔히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믿음이라고 한다.

이 믿음은 하느님과 인간 간의 관계 바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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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양자 간의 관계 안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단어이다.

인간 앞에 놓여있는 ‘믿음과 불신’이라는 두 갈래의 길 가운데,

믿음은 그 시작에 있어서 ‘선택’에 의한 것,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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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은 것은 믿음이 아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한 것이거나, 자신의 가정 혹은 주변인들에 의해 마지못해

믿음의 삶을 사는 체 하는 것 또한 믿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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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자신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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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믿음은 또한 은총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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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작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누구나 믿음이 자신만의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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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지만으로 믿음의 삶에로 들어왔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어느 누군가의 부르심에 의한 것,

불리움을 받은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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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때로는 믿음과 결별하고자 하는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에

그래도 손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것은 자신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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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느 누군가가 자신을 도운 것이라고,

누군가가 손을 잡고 이끈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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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어느 누군가가 하느님이다.

세상이 아무리 무신론화되어 가고, 더 이상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마지막으로 되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다름 아닌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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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마지막 보루가 하느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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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믿음은 삶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삶 속에는 기쁨과 희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번뇌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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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지극한 단조로움도 있고, 따분함도 있다.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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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삶 속에서 실제로 체험하거나 체험되는 것들이다.

이 체험들과 믿음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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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들과 완전히 결별한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만일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현실도피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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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삶의 그 모든 것,

그 모든 순간, 삶의 모든 공간과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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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속에도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화려함과 단조로움, 따분함과 무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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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삶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겪게 될 때에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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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믿음 속에서는 대개 그러하지 않다.

그러한 상태를‘죄의 상태’까지 여기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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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부분 믿음을 삶과 분리된 것으로, 삶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이 배제되어있는 거룩한 것,

삶과 유리(琉璃)되어 있는 거룩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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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은 우리와 동떨어진 채 계시는 분,

우리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감추어진 채,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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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삶과 믿지 않음의 삶의 결정적인 차이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느님과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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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쁠 때에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고,

슬프고 힘들 때에도 하느님과 함께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며,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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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하느님과 늘 함께 하는 삶이다.

이러한 믿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다름 아닌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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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적어도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눈감고 관상하며,

조용 조용히, 세상 일과는 무관하게 마치 섬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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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게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상식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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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이웃이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고,

억울해할 때에, 그의 말을 들어주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억울함까지도 풀어 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 정도는 되어야

참 신앙인이라는 소릴 듣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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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세상에서 실천이 없는 영성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에 거품만 잔뜩 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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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없는 영성은 공허하고, 영성 없는 실천은 맹목이다.

어느 가정이든지, 어느 공동체이든지

언제나 묵묵히 땀 흘리며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 가정과 공동체는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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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공동체에서 하고 있는 « 작은 일들 »,

« 땀 흘리는 일들 », « 노력과 봉사들 »이 하느님 앞에서

결코 작은 일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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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일들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워내고 기적을 낳는다.

때로는 귀찮고, 때로는 지긋지긋한 일상의 모든 작은 일들이

결국 생명과 사랑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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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한 아주 작은 일들을 묵묵히, 불평 불만,

볼멘소리 너무 지나치게 하지 않고,

기쁘게 해 나갈 때, 우리 안에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힘이 충만하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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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로 연결되는 은총의 끈이고,

내가 성화(聖化), 곧 거룩하게 되어 가는 장이며,

기도 중의 기도이고, 내가 세상에 사람으로 나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고, 마침내 하느님의 아들 딸로 부활하게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