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을 맺는 활동적인 신앙생활
-조욱현 신부-
오늘의 전례도 또 다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활동적’인 면이다. 즉 깨어있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이 결실을 맺도록 하는 활동적 특성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제1독서: 잠언 31,10-13.19-20.30-31: “그 손이 일한 보답을 안겨주고...”
이러한 사실이 제1독서에서 강조되고 있다. 내용은 자기 가족들을 보살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자신을 바치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내용이다. 이 ‘현숙한’ 여인은 의인화된 ‘지혜’(8,22 참조)를 묘사한 것으로 본다. 이 대목은 마치 잠언의 ‘지혜로운’ 메시지를 종합하는 것 같다. “지혜로운 여인은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녀가 자랑해야할 것은 오직 야훼께 대한 경외심뿐이로다”(LXX에 첨가됨). 하여간 현숙한 여인의 가장 빼어난 점은 하느님과 남편과 자식들 그리고 이웃에게 성실히 헌신하는 그의 ‘활동’에 있다는 것이다. “그 손이 일한 보답을 안겨주고 그 공을 성문에서 포상해주어라”(31절).
제2독서: 1데살 5,1-6: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데살로니카 신자들이 곧 다가올 주님의 재림에 대한 걱정을 없애주고자 하면서 “그 때와 시기는” 아무도 모르며 주님께서 “밤중의 도둑같이”(1-2절)오실 것이니 깨어있으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빛’ 속에 살면서 ‘빛’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때에는 도둑처럼 덮쳐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깨어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태만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켜 가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선물들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오시는 날, 우리는 그분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그분이 오시는 날은 ‘심판’과 ‘수확’의 날이다. 그 날은 우리가 이룬 ‘결실’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복음: 마태 25,14-30: 달란트에 대한 이야기
마태오는 이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종말론적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비유는 항상 종말론적 ‘깨어있음’을 배경으로 윤리 도덕적, 행동적 의미가 담긴 내용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는 행위는 ‘신뢰’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이에 맞추어 종들도 그 재산이 자기 것인 양 잘 관리하여 그 신뢰에 보답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맡긴 돈을 땅에 ‘묻었던’ 게으른 종은 주인의 신뢰의 선물에 대해 신뢰로 보답할 줄 몰랐기 때문에 지탄을 받는다. 1달란트는 금 42kg의 매우 많은 액수의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의미한다. 여기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준 것은 그 종들의 ‘능력’에 대한 평가이다(15절). 여기서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인색한 분이 아니라, 베풀어주신 선물에 비례하여 ‘요구하시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여간 앞의 두 종들은 그 돈을 이용하여 두 배로 늘렸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었다”(18절).
“얼마 뒤에” 주인이 돌아와 자기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19절). 주인은 돈을 두 배로 늘린 종들을 칭찬하고 상을 주었는데 “더 큰 일을 맡기겠다”(21.23절)고 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기쁨”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분이 가지시는 통치권에 참여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기쁨이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3절). 다른 곳에서는 천상잔치라는 상징적 개념으로도 표현되고 있다(8,11).
반면에 게으른 종을 보자. 이 종의 태도에서 비유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두 사람의 좋은 결과를 보고 자기의 염려가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두려워서’(25절) 그가 맡은 한 달란트마저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땅에 묻었다”(25절)고 한다. 이것을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이러한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려움’이란 ‘신뢰’의 관계에 있어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 종은 주인이 ‘신뢰’의 관계를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순히 고용관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이 바리사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주인의 뜻에 맞게 우리가 살지 못하고 우리의 달란트를 사용하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게으른 종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땅에 묻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책임한 모험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용기는 개방이며,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어머니의 행위와 같은 사랑의 봉헌의 행위이지 자기 자신의 안위 때문에 위험을 두려워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자연적 초자연적 선물 모두가 마땅한 결실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권고가 담겨있다. 이 때에 하느님은 더욱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성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개인이 성숙하지 못하면 교회도 성숙하지 못한다. “땅에 묻어놓은” 우리의 달란트는 곧 모든 이를 위한 기회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주인의 판결은 준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자신의 달란트를 결실 맺도록 하라는 것은 이러한 ‘종말론적’ 긴박 때문에 용기를 내야하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신앙이란 것은 단순히 신경을 암송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잘못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이 세상 안에서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게 밀어주는 그런 신앙이어야 한다. 무엇인가 잃을까 ‘두려워서’ 무기력하게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 것이다“(28-29절). 이것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을 상급보다도 더 큰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없다고 생각하여 ‘땅에 묻는’ 사람은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조차 모르게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충실하고 열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실 더 큰 선물을 기다리면서, 그분이 이 지상생활에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항상 그분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활동적’인 삶으로 결실을 맺어 내어놓을 수 있는 생활을 이루어 가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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