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화는 이웃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손덕만 신부-
오늘 복음의 제일 첫 구절에 보면 군중은 '이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앓는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지리라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화(미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금화 한 개를 종 열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주고 왕위를 받으려고 먼길을 떠났다가 왕이 되어 오셨을 때 한 사람은 금화 한 개로 열 개를, 또 한 사람은 한 개로 다섯 개를, 또 한 사람은 한 개 그대로 수건에 싸두었습니다. 열 개, 다섯 개 벌이 한 사람은 "충직한 종아, 참 잘했다." 라고 하시며 열 고을을, 다섯 고을을 다스릴 상금을 주셨고, 한 개 그대로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는 "이 몹쓸 종아, 너가 말한 그대로 벌을 내리겠다" 고 하십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 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기 끌어 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의 세 그룹의 사람들의 비유를 통해 종말론적 셈 바침을 가르치며 최후 심판 때 나타날 상선벌악, 삶과 공로에 대한 직무를 묻는 것입니다. 앞의 두 사람은 한 개의 금화를 받고 벌이하여 노력하며 선행을 한, 즉 직무에 성실한 사람이요, 한 개 그대로 갖고 있다가 한 개를 바친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야단을 맞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이기는 하나 하느님이 주신 은총, 능력으로 공로를 세워야함을 느끼게 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종에게는 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신앙에는 무풍지대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활동하고 잘 사용했는지 항상 반성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의 방식을 보게 되면 네 가지 형태를 봅니다.
첫 번째, 남이 나에게 빚진 것처럼 당연히 남으로부터 빚을 받아야 되는 것처럼 사는 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당연히 나를 도와주어야 하고 나는 그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그는 그요, 나는 나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순 이기적이고 베풂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라는 개인주의적인 삶입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받은 만큼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준 만큼만 내가 그에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적인 삶입니다.
네 번째 사람은 남에게 빚을 진 사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과 자연을 받았고, 이웃으로부터 수많은 도움을 받고 사는 만큼 빚을 갚는 자세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이웃을, 가족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입니다.
"미소한 형제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 하신 최후심판의 판결문을 보듯이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느냐? 안주었는냐? 에 따라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를 준비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못하는 심판을 생각합니다.
주님, 당신이 주신 달란트를 잘 쓰도록 도와주시고 받은 능력, 보화가 이웃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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