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40,1-11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신다.)
복 음 : 마태 18,12-14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도 잃어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아주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㰡’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㰡“(루카15,7)라고 노래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목자가 고민하는 대목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지금 우리 본당의 신자는 대략 3,800여 명이 되는데 실제로 그 중 냉담하는 신자들이 50% 가까이에 이릅니다.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수치입니다.
또 다른 고민은 교회는 수많은 신자들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다 못해 다섯 명만 되는 단체의 장만 되어도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다른 의견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묵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냥 단순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하나라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한자성어 중에 㰡소탐대실(小貪大失)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놓친다는 의미인데 경우에 따라서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의 배경을 조금 알면 오늘 복음이 이해가 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혼자 양떼를 키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양을 치다가 사고를 당해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한 명이 그 양을 찾으러 가고 다른 목동들이 나머지 양들을 돌보게 되어 있지요. 목동이 없어지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흩어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리의 생각과는 그 배경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중요하지 않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이 중요하다는 뜻이 절대 아니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 못지 않게 길 잃은 한 마리의 양도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손가락질하고 외면을 하여도 부모는 자기 자식을 버릴 수가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외면하고 상대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그를 소중히 여기고 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에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부정하다고 아무도 함께 하려 하지 않고 돌팔매질 당하여 외딴 곳에 버려진 문둥병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치료해 주셨고, 또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셨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아들의 회개를 받아 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외면했던 베드로 사도를 세 번의 용서로 받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들을 생각할 때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감히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줄뿐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죽을 죄인이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칫 㰡’저 사람은 사형을 시켜야 한다.㰡“라든가 㰡’저런 사람은 지구에서 추방을 시켜야 한다.㰡“ 㰡’저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다.㰡“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이지요. 죄인이든, 성한 사람이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두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조금만 다투어도 쉽게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슴에 응어리처럼 담고 삽니다. 이러한 적대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비복음적인 모습인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위안이고 희망이면서 동시에 큰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그 어떠한 죄든지 용서를 받은 우리가 또한 어떠한 이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아량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살다보면 정말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이 우리에게는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듯이 나 역시 하느님의 그 자비에 힘입어 이웃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죄인도 회개하면 다 용서해 주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에게는 이웃을 용서해 줄 의무가 있음을 기억하며, 불편한 이웃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살아가면서 다소 불편한 관계가 맺어졌을 때 용서를 청하며 새로운 관계 회복을 요청해 오는 이웃을 교만한 마음으로 거부한다면 그것은 분명 비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그러한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삶 안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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