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포-성지순례의 관문
성 베드로 사도 기념미사(야포) 야포 (Y?f?, ?????) 는 히브리어로 아름답다는 어원을 가진 도시로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항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던 이스라엘에서 약 4000 년의 역사를 가진 가장 오래된 고대 항구도시이다셈족의 전승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 에 그 기원을 둔다 창세 6,10 그리고 노아는 아들 셋곧 셈과 함과 야펫을 낳았다
이스라엘의 해안선은 중앙 산지와 거의 평행을 이루며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이런 형태의 해안은 자연적인 항구가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고대로부터 입지 조건을 갖춘 좋은 항구가 없었다 그럼에도 야포나 지중해 카이사리아 위쪽에 있는 도르 같은 항구는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야포는 이스라엘이 건국 된 후 1950년에 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 아비브’(Tel Aviv)와 합병되어 텔 아비브야포라고 부르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 지중해 연안으로 약 60km 거리에 있는 이스라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중요한 상업 도시이다
해발 40미터의 나지막한 바닷가 언덕 위에 새워진 야포는 좋은 전망대의 역할을 하였고 해안 주변에 바위와 암초로 둘러싸인 작은 규모의 항구였지만 야포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문명의 발상지를 연결하는 해안길이 지나가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이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해안길(Via Maris; Way of the Sea) 은 고대 근동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로 이집트의 고센 지방에서 시작하여 시나이 반도의 해안 지역을 따가 가자로 이어지며 블레셋 평야를 지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이어진다 야포는 양대 문명권을 연결하는 국제도로의 교역로일 뿐만 아니라 샤론평야 유다산지와 평야지대의 완충지역인 쉐펠라
그리고 유다산지와 에프라임산지로 크고 작은 도로들이 잘 연결되어 있는 국내도로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국제도로는 무역로의 역할뿐만 아니라 군사 전략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도로로 바뀌면서 파괴의 위험이 공존하기도 했다 야포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지중해로 이어지는 해상 관문이었다면 벤구리온 공항이 들어서 있는 오늘날의 텔 아비브는 전 세계로 열려있는 하늘의 관문이다
이렇게 육로와 해로 그리고 오늘날 하늘길이 연결되는 이 해안 도시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베드로는 야포에서 환시 체험을 하고나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로 이방인들에게도 교회의 문을 활짝 열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세상의 구원을 향해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텔 아비브 중심 해변에서 아름다운 지중해 해변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보면 돌출되어 있는 작은 구릉이 하나 나오는데 이곳이 고대 야포이다 언덕 중턱에는 언덕을 향하여 난 아름다운 성당이 하나 있는데 사도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며 한 환시 체험과 죽은 타비타(르카스)를 살린 것을 기념하는 기념 성당이다사진 중앙은 야포의 성베드로 성당 종탑이다
올드 야포 언덕에 있는 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 성 베드로 성당 주변에서 1955-1957 까지 텔아비브 - 야포시의 고고학자인 M.y.Kaplan에 의해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발굴작업을 통해서 5개 시대의 야포 역사를 확인했는데 비잔틴 시대 로마-헬레니즘 시대- 페르시안 시대철기와 청동기의 흔적들을 발굴했다 보다
흥미로운 발굴은 이른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현지에서 만들어진 세라믹 항아리와 외국에서 수입된 아름답게 장식된 수많은 항아리들이 발견되어 이른 시기부터 외국과의 문물교역으로 발전했던 도시였음이 확인되었다 기원전 17세기에 상중 이집트를 정복하고 지배한 셈족과 아시아인의 혼합 민족인 힉소스족(Hyksos,기원전 17 세기에 고대 이집트를 침략하여 하이집트와 중 이집트를108년간 통치하면서 제15와 제16 왕조를 세웠다) 에 의하여 야포는 중요한 요새가 건설( 기원전 1800-1600 년경) 되었다
그 후 야포는 이집트의 지배권에 놓여 있었다 야포는 이집트의 투트모스 3세가 가나안 지역을 점령하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이집트 카르낙 신전에 있는 왕가의 목록과 대영제국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제19왕조 시기의 파피루스에 의하면 파라오 투트모스 3(Thutmose Ⅲ 기원전 1479-1425 ) 의 군대에 의해서 기원전 1468 년경에 야포는 점령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투트모스 3세는 해안길을 따라 유프라테스 원정길에 나섰고 므기또와 게젤 등 119개의 가나안 마을을 파괴 하였다 왼쪽은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투트모스 3세 흉상이다. 33년간의 치세 중 최고로 영토를 확장하고 번영을 이룬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므기또 등 가나안 지역뿐만 아니라 시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유프라테스까지 제국을 넓혔다 오른쪽은 카르낙 신전에 있는 왕가의 목록
투트모스 3세의 첫 번째 가나안 원정
전승에 의하면 투트모스 3세의 장군은 야포를 점령하기 위하여 한 가지 속임수를 사용하였다. 즉 한 무리의 병사들을 200여개의 곡식 바구니에 숨겨서 요새에 들여보낸 후 요새를 점령했다.
성경에서 야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여호수아에 의해 영토가 분배되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단 지파가 받은 땅은 예루살렘 서쪽 지역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영토였다.
여호 19,40.46-47 일곱 번째로, 씨족별로 나뉜 단 지파 자손들을 위한 제비가 나왔다. 메 야르콘, 라콘, 그리고 야포 맞은쪽 지역이 들어 있다. 그러나 단의 자손들은 자기들의 영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레셈으로 올라가 싸워서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곳을 칼로 쳐서 차지하고 그곳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레셈을 자기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하였다.
야포는 단 지파에게 분배되었지만 단 지파는 이미 철기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쫓겨(여호 19,47; 판관 제18장 참조)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헤르몬 산 아래에 있는 레셈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유명한 삼손과 드릴라(판관 13―16장 참조)의 이야기는 단지파와 불레셋족 (Peleset=Philistines)인 필리스티아인들 간의 영토싸움을 보여주는 것이며, 다윗과 골리앗(1사무 17장 참조)의 싸움도 필리스티아와의 싸움 이야기이다.
가나안 남부 해변에 정착한 불레셋인들은 에게해 연안에서 이주 해 온 해양민족으로 이미 족장시대부터 가나안 지역에 그들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남부 해안지역인 가자에서부터 북쪽 카르멜 산까지 해안지역 전체를 확보하였고 중앙 산지에 정착하기 시작한 이스라엘과 싸우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청동기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미 이들은 철기 문화를 가진 민족으로 월등한 무기와 도구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불레셋은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군을 대파(1사무 4장, 기원전 1050경)하고 유대 산악지방 일부를 점령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우위권을 가지게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정복전쟁을 통해서 불레셋 지역까지 넓은 영토를 확장하였지만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하였다(2사무 5장, 기원전 975경).
야포항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대성전과 그의 왕궁을 짓기 위해 필요한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실어오면서 항구로서 유명해졌다.
2역대 2,15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께서 필요하신 만큼 레바논에서 나무를 베어 뗏목으로 엮어서 바다로 야포까지 가져가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임금님께서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올려 가십시오.”
야포는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해 점령되었다. 예루살렘 대성전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되었고(기원전 587/6) 솔로몬이 대성전을 지은 지 5세기가 지난 후 바빌로니아에서 귀환한 즈루빠벨은 제2차 성전을 재건하면서 필요한 향백나무를 다시 야포 항구를 통하여 운반 하였다.
에즈 3,7 그래서 그들은 석수들과 목수들에게는 돈을 주어 일을 시키고, 시돈인들과 티로인들에게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그들에게 허가한 대로, 레바논에서 향백나무를 베어 바닷길로 야포까지 가져오게 하였다.
기원전 586-332년까지는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 지배의 시기로 페르시아 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 재위)는 야포를 그의 동맹국인 시돈의 왕에게 양도하였다.
요나 예언서는 페르시아가 통치하던 기원전 6-4세기경에 쓰여 졌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요나 예언서에 의하면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주님을 피해 달아나려고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야포에서 탔다. 그러나 바다에서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자 뱃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알아보려고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뽑혔고, 성난 바다를 달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내던지자 바다가 잔잔해졌다.
그리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물고기의 배 속에서 지내고 난 후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뱉어 냈다.(요나 1-3장 참조).
요나 1,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기원전 332-152년까지는 알렉산더 대왕이 근동일대를 정복한 후 헬레니즘의 영향 하에 있게 된다. 야포는 처음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하에 있다가 이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기원전 223-187)의 수중에 넘어갔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대성전을 더럽히자 유다 마카베오의 항쟁이 시작(기원전 167/6년)되었다.
야포인들이 유다인들을 초청하여 미리 준비해 놓은 배에 여자들과 아이들과 함께 타게 한 후 그들을 바다로 태우고 나가 이백여 명을 빠뜨려 죽이자 유다(166/5-160)가 복수하기 위해 부두에 불을 지르고 배들을 불태웠지만 성문은 닫혀있어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2마카 12,3-7 야포인들은 다음과 같이 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사는 유다인들을 초청하여 미리 준비해 놓은 배에 여자들과 아이들과 함께 타게 하였다. 그러면서 유다인들에게 아무런 악의도 품지 않은 듯 가장하였다. 그 일은 그 성읍의 공적인 결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유다인들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였으므로 야포인들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야포인들은 그들을 바다로 태우고 나가 그들 가운데 이백여 명을 빠뜨려 죽였다. 유다는 동족에게 이토록 잔인한 짓이 저질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자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의로운 심판관이신 하느님께 호소하고 나서, 동포들을 살해한 자들을 공격하였다. 밤중에 그는 부두에 불을 지르고 배들을 불태워 버리고 그곳으로 피신한 자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러나 그곳의 성문이 닫혔으므로, 나중에 다시 와서 야포 시민들을 섬멸해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철수하였다.
군사 지도자이자 대사제인 요나단은 142년에 야포를 이방인들의 손에서 되찾아 놓게 된다.
1마카 10,75-76 요나탄이 야포 앞에 진을 쳤지만, 아폴로니우스의 주둔군이 야포에 있었으므로 그 성읍 주민들은 그에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요나탄의 군대가 그곳을 공격하자, 성읍 주민들이 두려워서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요나탄이 야포를 점령하였다.
요나탄의 뒤를 이은 하스모네오 왕조의 시몬(기원전 143-134 재위)은 야포항을 주요 항구로 활용하였다.
1마카 14,5 그는 야포 항구를 점령하고 바다의 여러 섬으로 가는 길을 터놓아 그 영광이 더욱더 빛났다.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기원전 106-48)는 팔레스티나를 정복한 뒤 시리아의 속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7년 카이사리아(Julius Caesar)는 도시를 유대인들이 지배하도록 되돌려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야포를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지만 그녀가 기원전 30년에 죽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헤로데 왕국에 편입시켰다. 그 후 야포는 헤로데가 카이사리아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면서 그의 중요성이 상실되고 말았다.
야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념비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베드로 사도가 야포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는 어느 날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베드로는 정오쯤 기도 하러 옥상에 올라갔을 때 무아경에 빠졌다.(사도 10장)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새로운 교회에 받아들여야 함을 환시 중에 보여주셨다. 사도 바오로는 이곳에서 코르넬리우스라고 하는 카이사리아에 있는 이탈리아 부대의 백인대장이 보낸 심부름꾼을 맞아들인 후 그들을 따라 카이사리아에 가서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설교를 한 후 코르넬리우스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코르넬리우스는 이방인으로써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첫 번째 신앙인이 되었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남쪽으로 언덕을 조금 내려가면 등대가 보이는데 그 옆에 있는 작은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있는 집이 하나 있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가 머물면서 환시 체험을 한 바닷가에 있던 무두장이 시몬의 집이었다고 한다.
사도 10,9-23 이튿날 길을 가던 그들이 그 도시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베드로는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다. 때는 정오쯤이었다. 그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베드로는 무아경에 빠졌다.
이어서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자기가 본 환시가 무슨 뜻일까 하며 베드로가 속으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알아내고서 문간에 다가섰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이 여기에 묵고 있는지 물었다. 베드로가 환시에 대하여 계속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지금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다. 그러니 일어나 내려가서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내가 그들을 보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내려가, “내가 바로 여러분이 찾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의롭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온 유다 민족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코르넬리우스 백인대장이,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거룩한 천사에게서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맞아들여 그곳에 묵게 하였다. 이튿날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떠났는데, 야포에 있는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도 그와 함께 갔다.
오늘날 헤르젤 거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정원 안에는 타비타의 무덤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타비타는 아람어로 영양의 일종인 ‘가젤’을 뜻하는데 그리스 말로는 도르카스라고 한다. 타비타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 무렵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야포에서 가까운 리따(오늘날 로드-Lod)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보내어 청하였고,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 한 후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자 여자가 눈을 떴다. 타비타의 무덤에는 그리스어, 아람어 그리고 히브리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그녀의 축일은 라틴 부활 제4주일에 기념한다.
사도 9,36-43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 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베드로는 한동안 야포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
야포는 제1차유다 독립항쟁(66-70년)때 로마의 베시파누아스 장군이 공격해오자 습격을 미리 알아차린 주민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쳤지만 광풍이 불어 배들이 모두 좌초하는 바람에 로마군은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쉽게 로마를 점령할 수 있었다(유대 전쟁사 3:414-431참조).
야포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지만 작은 마을 규모로 남게 된다. 390년에 에우세비우스의 지명사전(Onomasticon,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지리적,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목록으로 성지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을 예로니모가 라틴어로 번역할 때 야포는 큰 도시에서 작은 읍의 규모로 용어를 대체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야포와 관련된 그리스 신화를 언급하고 있다.
성 베드로 성당 뒤쪽에 나 있는 고풍스러운 집들이 있는 골목들을 지나면 고대 야포 항구로 이지는 바다 쪽으로 연결된다. 오늘날 방파제의 입구 쪽에는 암반이 돌출되어 있어 파도가 몰려와 부딪쳐 물거품이 되어 부서지는 곳이 있다. 이 바위 위에 오늘날에는 이스라엘 국기가 하나 걸려 있는데 이 바위를 ‘안드로메다 바위’(Andromeda Rock)라고 한다.
에디오피아의 공주인 안드로메다는 어머니인 카시오페이아 (Kassiopeia)가 자신이 바다의 님프인 네레우스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교만을 떤 죄 값으로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나라가 황폐하게 되었다. 왕은 나라를 구하고자 신탁에 의해 공주를 바다의 괴물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바위에 쇠사슬로 묶었다고 한다. 이 때 페르세우스(Perseus)가 나타나 괴물을 죽이고 안드로메다를 구한 후 둘은 결혼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들은 나중에 죽어서 하늘의 별자리가 되었다. 안드로메다은하는 우리 은하로부터 가장 가까운 대표적인 은하이다.
카이사리아 항구가 기능을 상실 하게 되자 야포항은 다시 지중해로 연결되는 주요 항구로서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1099년 6월, 예루살렘을 수복한 고드프리(Godfrey of Bouillon, 1060경-1100)는 전투 없이 야포를 되찾았고 즉시 성벽으로 요새화시켰다.
제1차 십자군 지도자로 1099년 7월 이슬람교도에게서 예루살렘을 되찾은 뒤,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예루살렘 라틴 왕국 최초의 통치자가 되었다. 왕의 칭호는 거부하고 대신 '성묘 수호자'라는 명칭을 썼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속한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면서 야포항을 예루살렘으로 연결된 항구로 활용하였다. 이 후 야포항은 근세기까지 성지 순례자들이 들어오는 관문 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야포는 1187년 다시 이슬람의 살라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야포는 살라딘과 루이 9세의 뺏고 빼앗기는 격전장이 되었다. 십자군인 프랑스의 왕 루이 9세(St.Louis IX, 축일-8.25일. 루도비꼬와 루이, 루이스는 같은 이름이다. 1214-1270)가 1191년도에 다시 수복하고 요새화 하였다. 그렇지만 1197년에 다시 빼앗기고 1204년에 십자군이 수복하였다.
1251년 루이 9세는 성곽을 다시 재건하고 24개의 탑을 지었다. 그리고 프란치스칸들을 위한 성당을 지었다. 야포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원 회랑 중앙에는 거룩한 왕으로 공경되고 있는 루이 9세를 기념하는 대리석 석상이 놓여있다.
그는 1248년에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다.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어 이상적인 수도자를 꿈꾸었기에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려 권력가에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으며 그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3회원이 되었고 성왕으로 불림으로써 재속3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는 1297년 교황 보니파시우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러나 루이 9세의 통치도 얼마 가지 못하였다. 야포는 맘루크의 술탄 바이바르스 1세(1260-77 재위)에게 1268년 3월 점령되었다. 중세기에 이슬람 국가에서는 군사들을 노예들로 충당했는데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군사력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1250-1517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는 맘루크 왕조를 세웠다. 야포를 점령한 이들은 카이로에 새로운 회교사원을 짓기 위해 요새에서 목재들과 대리석들을 떼어갔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은 유럽인들이 야포항을 전략적인 요새로 사용할 수 없도록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수탈하여 갔다. 오늘날 비잔틴 이후 시기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후 약 4세기 동안은 특별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650년에는 성당 옆에 순례자 숙소를 지어 야포항으로 들어오는 많은 순례자들을 맞아 들였다. 순례자들이 배를 타고와 성지에 첫 발을 내딛는 장소로 이곳에서 첫 강복을 받고 순례자 숙소에서 하룻밤을 잔 후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야포의 성 베드로 성당은 사자 왕 루이 9세가 지은 성당터 위에 1888년과 1894년에 스페인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야포의 성 베드로 성당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지어 성 베드로 사도에게 봉헌하였다.
이곳 야포 수도원도
성지의 다른 수도원들처럼
프란치스칸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775년에 두 명의 형제들이 살해 되었고 약탈당했다.
성당 제의실
수도원 복도. 순례자들의 짐상자
수도원 식당
수도원 경당
성당 중앙 제대 위쪽은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지붕이 있고 그 정 중앙에는 교회의 탄생을 가져온 성령을 묘사하고 있다.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둘레로 빗살모양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다. 이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일치함으로써 예수님과의 사랑의 유대를 증거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성당 중앙에는 제대 뒤쪽에는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작가가 그린 성베드로의 환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천장 양쪽에는 독일 뮌헨의 작가(F.X.Zettler)가 만든 성인들의 색유리는 성당 안의 분위기를 신비스럽게 만들고 있다.
제대 앞 성당 오른쪽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강론대가 있다.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론대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루 4,1-9; 마태 13,1-9; 루카 8,4-8 참조)를 상기시키듯이 풍성한 열매를 맺은 과일나무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1799년 나폴레옹 군대는 야포를 점령하고 약 4000여명의 포로로 잡힌 무슬림 죄수들을 학살되게 된다. 1831년 나폴레옹 군대는 패배하여 이집트로 물러갔고, 1837년 대지진으로 파괴되고 황폐화 되었다.
1864년 야포항에 등대가 건설되었고 야포는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해서 유럽으로 전신이 연결되었다.
Gustav Bauernfeind: 야포 시장, 1877년
1891년 5월에는 중동에서 제일 먼저 야포와 예루살렘을 잇는 철로가 개설되었다. 배를 타고 야포항에 내린 순례자들은 이제 예루살렘 시온산 근처까지 연결된 기차를 타고 순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까지 2시간을 계획했지만 실지로는 말을 타고 여행하는 것과 같은 3.5-4시간이 소요 되었다고 한다. 이 철로는 1948년 8월에 운행이 중단된다.
1892년의 야포 기차 정거장
1901년에 터키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II)에 의해 야포의 명물이 된 시계탑이 만들어졌다.
1909년 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60여 가족이 야포 북쪽에 있는 모레 언덕에 이주해 오면서 야포는 유대인들의 첫 정착지가 되었다.
1917년 11월 16일 야포는 영국의 알렌비 장군에 의해 수복되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이 이곳에서 선언되었다.
1950년 4월 24일 야포는 텔 아비브와 합병되었다. 1960년 11월에 올드 야포는 텔아비브-야포시와 정부의 도움으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고고학 박물관은 고고학 발굴작업에서 발굴된 물품들을 모아 1961년에 설립되었다.
공원 아래쪽에 있는 야포 박물관과 극장 건물
어부의 모습
1965년 아쉬돗 항이 개항되면서 야포항은 작은 소형 어선들만 드나드는 항구로 남게 되고 하이파 항이 발전하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은 잃고 말았다.
1994년 6월 14일부터 공식적인 교황 대사관이 성 베드로 성당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고대 야포의 자리에 서 있는 장소는 고고학 발굴 장소를 제외하고는 특별하게 관심을 끌만한 고대의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선사시대 광장은 고고학 발굴 장소 위에 광장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광장 아래쪽, 고고학 발굴 장소는 야포의 역사 박물관처럼 잘 마련되어 있다. 야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입체영화가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대리석 광장 지하에 전시관이 있다.
벽은 입체영화 화면이다.
그 아래쪽그러나 아름답게 꾸며진 공원에서는 음악회와 전시회 등 각종 행사들이 열리고 있으며 아담한 전시관들과 카페들이 들어 서 있어 예술과 문화 그리고 휴식의 공간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특별히 성 베드로 성당 앞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서는 텔 아비브 도심과 지중해 해변의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텔아비브-야포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봄의 언덕’과 같이 평화스럽고 아담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에서 지은 성벽 벽돌들
1863년도의 야포 요새와 사진
야포 항구로 내려가는 길
야포 언덕 위 Abrasha 공원에는 대리석 조각작품이 있다. 왼쪽 기둥은 '야곱의 꿈', 오른쪽 기둥은 '이사악의 희생제사' 그리고 위쪽은 '예리고성의 함락'을 상징화 한 것이다.
언덕에서 조금 내려가면 '희망다리'가 나온다. 오랜 전승에 의하면 나무 다리 한쪽에 만들어 놓은 십이궁도를 붙잡고 바다를 바라보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미사시간 안내
평일 : 06:30 ? 이태리어 미사
토요일 : 18:30 ? 스페인어 미사, 20:00 ? 영어미사
주일 : 09:00 ? 영어미사, 18:00 ? 폴란드어 미사
성당 문은 매일 08:00-11:45, 15:00-17:00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마라.
(사도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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