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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자신의 눈으로 구원을 보다 / 박상대 신부님 ~

자신의 눈으로 구원을 보다.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명명, 그리고 아버지 즈가리야의 노래를 끝으로 선구자의 삶을 절대 침묵과 고독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의 선구자적 역할이 부각될 것이다. 이에 비하여 루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후 세 가지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예수의 성장과정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안배와 손길에 묶어두고 있다. 그 세 가지 사건은 첫째로 단 한 구절로 요약된 예수의 생후 팔일 째 거행된 할례예식와 명명(2,21), 둘째로 아기의 성전봉헌 예식(2,22-38),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12살 소년시절의 에피소드(2,41-52)이다. 오늘 복음은 아기의 성전봉헌 예식과 함께 어머니 마리아의 해산으로 인한 부정을 벗는 정결예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세가 정한 율법에 의하면 산모는 아들을 낳은 경우 40일, 딸을 낳은 경우 80일 동안 불경하다. 해서 그 불경을 벗는 정결례(레위 12,1-8)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야 하고, 부모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예식(출애 13,1-16; 민수 18,15-16)을 출생 30일 안에 회당이나 성전을 찾아가 제관 앞에서 치러야 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루가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예식을 한데 묶어 같은 날에 치러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22-24절) 이는 루가가 이중효과를 노리는 의도인데, 예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동시에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를 ‘자기 궁궐(성전)에 나타나는 상전’(말라 3,1)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루가는 분명 늘그막에 아들을 얻은 엘카나와 한나가 젖을 뗀 아들 사무엘을 실제로 성전에 갖다 바친 이야기(1사무 1,24-28)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루가가 보도하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의 봉헌예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간주된다. 즉, 루가의 관건은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예식이라는 율법준수의 틀을 통하여 아기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현현(顯顯, Epiphania)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같은 의도를 동방박사들의 예방사건(마태 2,1-12) 안에서 다루고 있다. 루가는 이러한 예수 현현(顯顯)의 목적을 두 예언자를 통하여 성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을 봉헌하여 밤낮으로 성전에서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공적(公的)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 시므온은 첫눈에 아기 예수를 메시아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구세주로 알아본다. 물론 시므온의 예지(叡智)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25절, 27절)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아든 시므온의 예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말씀(29-32절)과 마리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34-35절)으로 짜여 있다. 물론 예언의 전체 내용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하느님 자신의 계시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자신의 예지를 통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통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메시아로 드러난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다. 볼 것을 본 시므온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는 이방인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우뚝 서신 것이다. 그러나 빛과 영광 속에는 반대와 갈등과 고통이 함께 들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구세주의 도래로 위기가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에게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들의 운명이 달렸다. 예수탄생을 축하하러 왔던 목자들의 말을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던(2,19) 마리아는 오늘 시므온의 예언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고통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기에게 약속된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을 하나씩 배워하고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