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편안한 것을 자꾸 찾게 됩니다. 별로 보기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 조금 더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고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뛰기보다는 걷고 싶고, 걷기보다는 앉아 있고 싶으며, 앉아 있기보다는 누워 있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격의 키와 다를 바 없다는데 동의하면서도 늙은이 티를 감추지 못하고 지하철을 타면서도 비어 있는 자리에 눈독을 들이는 것을 자신에게 쉽게 허용하고 맙니다.
적당히 고생이 따라야 그것이 여행이건만 여행에도 추파를 던지듯 편안한 것을 주문하고, 음식점이건 목욕탕에도 이 편안함과 안락함을 메인 메뉴로 강조하기도 합니다.
편안함에 중독된 이 질병에 대해 사람마다 설명이 다르겠지만 편안함은 결국 단절이나 죽음까지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불편한 일을 견디어 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생활 습관이며 희망적인 극기의 생활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아무리 교묘한 위장을 부리더라도 지극히 편안한 안식 속에서 새로운 창의력으로 고뇌에 찬 예술을 고안해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닐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쩍 요새는 의자 하나를 갖고 싶어집니다. 앉으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쉬게 되는 편안한 의자 하나를 갖고 싶은 것은 사실 참 오래 전부터입니다. 차라리 요술을 배우라고 탓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오래 제 삶의 터전에서 기웃거리며 다리가 아프도록 서 있었다는 느낌이 강해서 그리운 것은 그 어떤 부귀영화도 아니고 안식이었는지 모릅니다.
인생의 심부름이 내겐 참 많았는데 나는 비서나 종을 둔 적이 없어 그 모든 생을 가로지르는 도보의 고통을 혼자 감행해야 했으므로 늘 남보다 힘겨웠다는 수고의 불만을 삭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앉으면 지난 세월의 발자국들이 눈처럼 녹아들고 간간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고요의 희열이 피어 오르는 의자가 하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의자에 앉아 눈을 감으면 새순과 같은 맑은 사고를 틔워 올리고 내 열손가락으로 잘 안 되는 모국어의 향기를 자아올려 시의 물레가 서서히 돌아가는 그런 의자가 하나 있다면…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주고 바꾸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 의자가 어찌 내게 그냥 주어지겠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받고 절망 하나로 그 값을 지불한 것이 분명 있습니다. 늘 그때 나는 눈물이라는 것이 나를 쓰다듬는 유일한 동거자였다는 것을 확인하곤 하였습니다.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기쁨의 값을 지불하고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의 분량이 바로 희망의 무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 편안한 것을 소망으로 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새해에는 해야 겠지요. 왜냐하면 편안함도 두 발이 빠지는 것으로 보면 수렁이 아니겠는지요. 생각납니다. 2000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에는 ‘의자’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라는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편안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려 한다.’
‘의자’라는 시의 일부를 소개했습니다만, 나는 이 시를 보면서 타성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현장을 목도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편안함만을 쫓아가는 저 자신과 오늘의 현대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했지요.
신체의 일부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의자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은 우화적이기까지 했습니다.
특별히 좋은 시라기보다 편안함도 어떤 수렁이라는 것을 이 시에서 느꼈습니다. 수렁을 편안한 휴식처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의자를 이 시인은 흉측한 짐승이라고 파격적인 비유어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묘한 위장을 해도 본질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 우리들의 근본의 이치가 아닙니까. 이미 우리들은 누군가의 시선에서 흉측한 짐승에게 먹이로 뜯기는 순간들을 들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시를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편안한 의자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앉으면 행복의 중심에 든 것 같은 편안한 안식이 온몸에 배어드는 그런 의자가 갖고 싶어 “나 의자 하나를 갖고 싶어요”를 “의자 하나 되고 싶다”고 역설적으로 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삶이란 의자가 되어 주는 삶이 되어야만 하지만, 단 한 번도 넘어지는데 끄떡없는 의자를 가져보지 못한 나로서는 늘 의자를 갖는 목마름이 내 마음에 비켜서지가 않습니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전하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갖다 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에겐 의자가 아니였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걸고 호박에 똬리도 받혀야겠다. 그것도 식군데 의자를 내 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 시인의 ‘의자’라는 시 전문입니다. 어머니의 말을 빌려 사람과 자연의 친화적인 관계와 근본을 그린 이 의자를 보면 의자에 앉는다는 것이 바로 생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서로 나름으로 의자가 되어 주고, 의자를 소지하는 삶이야말로 같이 살아가는 행보가 아닐까 합니다.
늘 덜컹거리고 못이 빠져 넘어지는 위험을 소지한 의자가 아니라 두 다리가 든든한 의자, 앉으면 그대로 안식의 의미가 온몸에 퍼져오는 그런 의자를 나는 지금도 그리워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의자는 마음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어디에? 바로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명지전문대 교수.
시집 『아버지의 빛』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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