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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 22 주일 - 선악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다. / 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22주일: 나해: 선악은 인간의 마음에 있다.

오늘은 다시 마르코 복음으로 돌아와서 깊은 의미를 지닌 대목을 접하고 있다. 하나는 바리사이적인 전통에 대한 논쟁이고(1-8절), 둘째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14-23절). 오늘 말씀의 주제라고 한다면 선과 악이란 사물이나 관습에 있지 않고 복음 선포의 중심이 되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제1독서: 신명 4,1-2.6-8: 주님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계명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1절)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원도 법을 통해 실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법은 구속하는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반영하는 사랑의 선물로 이해되는 ‘법’을 말한다.

그 법은 ‘생명의 원천’이며, 윤리적 압박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유의 원천이다.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법을 통하여 당신 백성과 가까이 계시며, 당신 백성과 대화를 계속하신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7절) 우리는 하느님의 법 안에서 자유롭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복음: 마르 7,1-8.14-15.21-23: 모든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마르 7,1-23은 하느님 앞에서의 확실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전통”이라고 하는 실질적 해석을 통해 전통의 탈선 가능성, 그래서 우리의 시각을 가리는 전통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명확한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편의대로 그 말씀을 우발적으로 변질시킨 것을 비교하고 있다.

논쟁의 시작은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였다는, “빵을 먹는” 것에서 있다. 씻는다는 것은 위생상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해석에서는 이렇게 된다. 즉 음식은 항상 거룩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 앞에 있으며, 때문에 정결한 것이다. 그리고 식기를 닦는다. 왜냐하면 어떤 외적인 불결도 거룩한 행위에는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1-4절).

그래서 예수께 질문을 한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5절). 이 조상들이란 하느님의 거룩한 율법을 정확히 해석한 조상들이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의 해석으로 된 규칙들이었다. 그러나 이 전통 중에는 모세의 율법에는 없는 많은 규정들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선과 악의 척도로 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인간의 전통과 하느님의 뜻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문제는 예수님 시대나 현재나 심각한 문제이다. 사실 전통이라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 거기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시대적 산물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전통이 생긴 원인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하는 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면서 이사 29,13을 인용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6-7절)

그리고 예수께서 전통을 비난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전통들이 ‘사람의 계명’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전통들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계명보다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8절)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보다는 그런다는 구실로 인간의 헛된 생각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생활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사이적 형식주의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만영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우리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려는 마음도 가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메말라 있는 전통에 물들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그리고 나 자신 안에도 이러한 고통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나에게서 그 구태의 악습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를 생각하고 나 자신을 바꾸어 가야 한다.

선과 악은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모든 선택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즉 인격의 심층부에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신다. 전통도 이런 내면적인 차원에서 설명하신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4-15절) 마음 안에, 모든 죄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마음으로 더러워진다.

예수님께서 드시는 예들은(21-23절) 무서운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한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1-23절) 인간을 더럽히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생활을 발견하고, 인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인간의 ‘참된 모습’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진실한 태도에 있다. 그러므로 음식이나 외적인 관습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제2독서: 야고보 1,17-18.21b-22.27: 말씀을 실천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의 법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고 실천함으로써, 즉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생활화하고 실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하느님께로 부터는 오로지 ‘선한’ 것들만 온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오는데 이제 그 말씀을 생활화 하고 실현시킴으로써 능동적으로 구현시켜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벌이 되고 말 것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22절)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는 척도는 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실천적인 태도이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27절) 이 실천적인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성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신앙을 증거하지 않으면, 즉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경우에는 신앙 자체가 형식적인 신앙, 바리사이적인 허위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의 규정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규정을 어기면 죄가 된다는 것으로 규정 지키기에만 급급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즉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이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전통만을 중요시 할 때 이웃을 거스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게 된다. 불결한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전통이나 규정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을 더럽히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반성하면서 항상 주님의 뜻으로 충만한 우리 되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