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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 27주일 - 사랑은 가정에 필수적 요소 / 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27주일: 나해: 사랑은 가정의 필수적 요소

우리는 주변에서 혼인생활에 실패하는 부부들을 많이 본다. 혼인의 실패는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다. 이번 주간의 전례는 가정과 사랑에 대한 교리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거와 기반을 제시해주고 있다. 사랑은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원초적이고 보편화된 인간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오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의 근원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며 인간 안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사랑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이혼”에 대한 법을 단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제1독서: 창세 2,18-24: “살에서 나온 살”= 하느님 안에 일치-사랑.

“갈빗대”는 셈족의 언어 감각으로 “생명”이란 뜻이다.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23절)이라는 표현은 두 존재가 한 실체라는 뜻이다. 여기서 뼈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며, 살은 “존재하는 인간”을 뜻하고, 아담은 존재의 깊은 의미를 가리킨다.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 부르리라”라는 말은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과 같은 의미이다.

남자는 이제 어린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자와 “한 몸,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24절), 바로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셨고, 항상 하나가 되었으며, 갈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하느님의 모상: 사랑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모세가 한 것,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5절)라는 말은 이것은 하와를 거슬려 한 핑계에 잘 나타나 있다(창세 3,12a): “내게 주신 여자가”- 이것이 여기에 이제 사용된 것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뜻, 즉 구원계획은 충실성, 사랑, 영원한 일치이다. 창조 시에 인간을 만드실 때, 남녀 모두를 당신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창세 1,27). 그러므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여자와 어울려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이신 하느님의 모습, 삼위가 하나인 모습을 닮는 것이다(6-8절).

즉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바로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최대의 계명으로 본래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다. 하나의 몸이고, 하나의 존재이기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갈라질 수도 없고, 갈라져서는 더욱 안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이를 거슬러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을 해주신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11-12절).

즉 남자 편에서 하던 여자 편에서 하던 하느님의 계획에 거슬리는 것이며, 그 새로운 혼인은 간음이 된다. 왜냐하면 먼저 한 혼인의 의무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배반’ 혹은 ‘간음’이라고 규정하신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혼’을 끌어들인 원흉이랄 수 있는 ‘굳은 마음’을 가진 마음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린이를 축복해 주신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은 마태오 복음(19,13-15)에도 그렇고 마르코 복음(10,13-15)에도 혼인과 이혼에 대한 논쟁 뒤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는 거룩한 혼인의 결실, 즉 두 남녀의 하나 된 사랑의 결실이면서 이혼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린 생명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신다. 이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보고 듣는 대로하는 단순한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어린이는 하느님 앞에 계속적인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믿음의 관계, 또한 그 때문에 포기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단 하나의 “어린이”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에 가까운 형제들을(어린이들) 껴안으시고 축복해 주신다.

제2독서: 히브 2,9-11: 예수는 새 아담이시다.

새 아담은 구원계획의 완성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이시며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당신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최대의 은총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강생을 통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모든 인간적 제약과 고통, 그리고 죽음과 악 앞에서조차 무력한 태도를 취하신다.

이것으로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불행과 절망을 이해하실 수 있다. 이렇게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 모든 이가 당신과 똑같은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당신의 형제들”을 부르기 위해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견지하고 이루어 가야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며 기쁘게 살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는 모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그리스도 안에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고, 자신을 희생하시어 모든 이를 하느님께 바치시고, 하느님께 나아가 일치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렇게 우리도 우리 사이의 일치,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항상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먼저 너와 나 사이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 우리가 속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자들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혼인의 계약으로 태어난 우리 가정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하느님 안에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으며, 더욱 우리 자녀들이 우리들을 통하여 언제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결심하며, 주님의 은총과 지혜를 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