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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샬롬!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 이기양 신부님 ~

 샬롬! 당신에게 평화 있기를

 

-이기양 신부-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경우를 몇 군데 볼 수가 있습니다. 친하게 지냈던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는 대목이 있고(요한11,35), 잡히시기 전날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시는 장면도(마태26,38)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예루살렘 도시를 보시며 한탄의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19,42)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은 무척 잘 꾸며지고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겉모습뿐이었고 이미 하느님을 떠나서 한 걸음 한 걸음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지요.

예수님의 통찰력대로 예루살렘은 기원 후 70년 경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서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멸망의 과정 중에 백만 명 이상의 유다인들이 학살을 당하였으며,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태24,2)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건물이란 건물은 모조리 무너지고 말았지요. 겨우 성전 벽의 일부분만이 남아 한 때의 영화를 전해 주고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19,42)

물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 ‘샬롬(Shalom)’을 뜻합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의 평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 ‘팍스(Pax)’였습니다. 무력으로 내리 누르고 힘으로 강제하여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예루살렘은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메시아 역시 로마와 같은 무력으로 자기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고 메시아인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바라고 고집했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로마보다 더 큰 힘으로 자기 민족만의 평화를 염원했기에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하느님의 평화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곧 폐허가 될 성전 건물이 안타까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곧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유다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유다인들이 결국에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이지요. 실제로 열두 지파로 나뉘어져 있던 이스라엘은 다윗왕을 맞아 통일 왕국을 이루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번영을 누리고 태평성대를 이어갔지만 솔로몬왕 이후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왕국이 분열되어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살이를 하고 있던 바빌론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지요. 그리하여 전해져 온 생명과도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으고 정리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몇백 년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안타까운 길을 가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신 그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70년 경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1948년 지금의 자리를 찾기까지 약 2500년이라는 긴 기간을 안타까운 광야에서 망국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보다 세상이 주는 평화를 그리워했던 결과는 이렇게 큰 시련과 멸망의 아픔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비단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여기저기에서도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했을 때와 세상이 주는 평화를 원했을 때의 결과는 천지차이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알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께 <성경 쓰기>, <신심서적 100권 읽기>, <기도 학교>, <이웃돕기> 등 많은 방법들을 제시했고, 그 방법을 잘 따라와 맛을 들인 분들이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였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거듭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 쓰기를 하면서 주어진 삶이 고맙고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는 체험을 했던 기억들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심서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을 때의 넘치는 감사, 기도 안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기에 거기에 머무르기를 갈망했지요. 또, 이웃돕기를 통해서 아홉 개 구역 전 신자들이 그동안 체험했던 보이지 않은 하느님 사랑을 이웃돕기를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욕망을 채우려고 애쓰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다른 것들에 매달리게 되지요. 돈이나 자식, 건강이나 외모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태웁니다. 돌고 돌아 돈이라는 말처럼 돈은 내 주머니에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말지요. 거기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자식이나 건강, 외모도 마찬가지이지요.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젊음을 지켜 보려고 기대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식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때가 되면 어린 새가 어미의 둥지를 떠나듯이 애지중지 키우던 자식도 떠나고 빈자리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 따라 변해가는 세상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시대가 이리도 불안하고 힘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줄 수 없는 것에서 평화를 고대하고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가 무력으로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갈망했던 것과 같지요. 그러나 그런 거짓 평화는 결국 무력으로 망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 안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갈증도, 상처도, 고립도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신자이면서도 거짓 평화에 연연해 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안타까운 눈물이 그 사람에게도 그대로 해당될 것입니다.

참 평화는 주님 안에 있으며 오시는 주님을 고대할 때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한탄하셨던 것은 참 평화를 가지고 오셨지만 유다인들의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처형하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유다인들은 2500년이 넘게 시련과 광야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지요.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세상이 평화를 줄 수 있다고 느낄 때 그것은 유혹이며 유혹의 결과는 시련과 멸망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 말씀 안에 머무르며 참 평화를 누리시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