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은 삶의 진정한 목적지인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시기이며,
예수님의 온유와 연민을 나누는 때입니다.
이 시기를 어떻게 잘 보낼 수 있는지 요한 세례자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3,3).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며 회개하지 않고서
희망이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세상의 흐름이나 사회 체제와는 상관없이 오시는 주
님의 길을 준비하려고 아무것도 의지할 데 없는 광야로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힘에 의존하여 오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도 의지할 데 없는 광야로 나아가 내 마음과 세상 한복판에
그리스도께서 자리잡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모습입니다.
광야는 언제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정원입니다.
이 광야는 내가 넘어야 할 산이고 올라야 할 언덕이지만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자아이기도 하며, 불공평과 불의, 고통과 시련,
차별과 갈등이 있는 사회 현실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어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하며, 굽은 데는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라고 외칩니다
(3,4-5).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든 게 뒤집히고 새로워짐으로써
모든 이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6).
겉모습, 익숙한 환경과 습관, 현세적 성공과 물질, 편의에 젖은 우리에게
광야는 외면하고 싶은 낯설고 불편한 현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익숙한 삶의 자리를 떠나 광야로 가야 합니다.
대림시기에는 의식과 행동방식, 언어습관을 대수술해야 하는 때입니다.
대충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뒤집어 바꿔야 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자비에 목숨을 걸고’ 믿어주며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서로를 가르는 불신의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 불평불만, 근심 걱정, 미움과 같은
산과 언덕들을 품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을 지닐 때 이런 언덕들이 낮아질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이를 섬겨야 하고,
부유한 이들은 탐욕을 버리고 가난한 형제자매들의 한숨 소리를
마음으로부터 들으며 나눔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계층 간의 위화감은 더욱 깊어지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상대적 빈곤감과 고통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말뿐인 형제애는 씁쓸함만 안겨줍니다.
또한 깨끗하고 순수한 눈길, 긍정의 눈길, 그 어떤 경우에도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 등을 통하여 우리 안의 ‘거칠고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기 위해
지식과 이해로 사랑을 풍부하게 해야겠습니다
(필리 1,9-10).
이제 주님께 되돌아가기 위해 침묵 가운데 내 안의 골짜기, 높은 언덕, 굽은 곳,
거친 길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여 새롭게 뒤집어 바꿔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되돌아갈 때 인간이 얼마나 존귀하고 자유롭고 평등한지 알아차리게 되고,
순수하고 사랑 지극한 마음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여 이웃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섬김으로서
모두가 살맛나는 새 세상을 이루어가야 할 때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