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8일 금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이사 45,22-23
온 세상 모든 인간들아, 머리를 돌려 나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아라. 나만이 하느님, 다른 신은 없다. 내가 나의 이름을 걸어 맹세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틀림이 없다. 내 말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만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민족들이 제 나라 말로 나에게 신앙을 고백하리라.
응송
◎ 세상의 임금들이 * 모두 다 주께 조배 드리리라.
○ 만백성이 그이를 섬기리라.
<청원기도>
풀밭에 내리는 비와 같이 땅을 찾아오신 우리 구세주여,
―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물로 우리 영혼을 적셔 주소서.
◎ 주님의 탄생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루카 5,12-13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영적 독서> 내 영혼을 위한 3분, 게르하르트 바우어 지음: 최용호 옮김
내리막길, 역경을 이겨내는 힘
모든 사람의 성소
“마침내 나는 내 성소를 발견했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자신의 성소를 찾고 기뻐하며 했던 고벡입니다. 100여 년 전에 세
상을 떠난 성녀의 사진들 속에서 우리는 주로 미소를 띠고 있는 성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녀는 이 세상에서 살았던 24년의 대부분을 수도원 안에서 눈에 띄지 않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성소와 관련된 온갖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의 미소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행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성소는 사랑입니다!”
이 고백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요?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면 침울해지고, 심지어
몸도 약해집니다 반면에 사랑을 받으면 생기를 띠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시랑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도 한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사랑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말씀과 행동,그리고 그 결과들로 분명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 유일하게 기억해야 할 질문은 ‘오늘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끝에 유일하게 남는 질문도 ‘내가 얼마만큼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진: 이태리 그레치오 은둔소 성프란치스코)
Photo: Italy Greccio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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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금요 강좌>
신학 강좌
<1분 금요 강좌>
신학 강좌
제3절 종교개혁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기
소위 계몽주의가 이 시기의 중요한 부분을 장식한다. 계몽주의란 유럽 정신사에서 1720년과 1780년 사이의 시기를 지칭한다.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을 계몽주의 계획의 사회적-실천적인 변환시도로 이해한다.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1784년 칸트가 이렇게 정의하였다: “계몽이란 자신의 탓으로 인한 미성년의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말한다. 미성숙이란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미성년이 자신의 탓이라 함은, 그 원인이 이성의 사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고자 하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 있기 때문이다. Sapere aude!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져라가 계몽의 표어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이 요청을 “자기사고”에로의 호소라 불렀다. 인간의 성년화가 목표였다. 인간의 성숙은 교회, 국가 그리고 사회 안에서 광범위한 전통의 비판을 통해 도달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확인되는 것만이 존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사고”의 목표는 이해되지 않는 역사적 유산과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이성으로 만들어가는 미래에로의 전진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이 과제를 교육을 통해서 실행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고, 영국과 독일 계몽주의자들은 하느님 자신이 인간들을 교육하고, 그들을 자신들의 고유한 이성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다(레싱의 “인류의 교육” (1780)에서).
이러한 견해의 결과는 소위 “근대”이고, 이는 18세기 초부터 시작된다. 원래 “근대”라는 말은 현재, 실제적이고 새로운 모든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중세 때에는 “유명론”이 via modema(근대적 길)이었다. 18세기에 시작하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고, 반성적(이차적) 근대주의 혹은 심지어 후근대주의(Postmodeme)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운동은 19세기에 특히 19세기 마지막 즈음에 “근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을 사람들은 문화사회학 안에서 어떤 외부의 도움이 없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거나, 줄 권한이 있다고 보는 입장을 말한다. 근대주의는 따라서 원칙적으로 “모든 사물들의 변화성”을 옹호한다. 스위스의 역사가이며 문화철학자인 Jacob Burckhardt는 19세기에 이것을 “영원한 교정의 정신”이라 불렀다. “근대적”이라 불리는 사회는 자신의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거의 배타적으로 현재와 특별히 미래에 의해 자신을 이해하는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역사철학적 혹은 신학적 주도사상을 의식적으로 배제한다. 극단적인 “근대주의” 안에서 “진보”의 범주, 즉 미래적 구원의 형태의 세속적인 모델마저도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물론 규범으로 정해진 전통의 표상 역시 배제된다. 이러한 자기해석에 부합하는 가치들은 개방성, 유연성, 개혁, 그리고 이동성이다. 근대가 현재 종말을 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지속되고 었다. 사람들은 점점 새로운 시대로 형성되어 가는 “후근대”에 대해 말한다. 후근대의 특정이라고 한다면, 갈수록 이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대해 학문이나 사회 안에서 합의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8세기 이래 신학의 원래의 중심들을 제시할 수 없게 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있어서나 독일어권 신학이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현재로서는 그 상황이 불분명하다. 특정한 지역으로부터의 지배적인 신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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