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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오 신부님 말씀

~ 사순 제 4주일 - 되찾은 아들의 비유 / 조욱현 신부님 ~

사순 제4주일: 다해:

찾은 아들의 비유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는 사순절의 엄숙한 분위기에도 기쁨이 있다. 죄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할 뿐 아니라, 형제들과도 멀어지게 하는 비극적인 것이며, 1독서에서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에 대한 기억을 하고 있고, 이제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형제들과의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는 것이며 그 때문에 오늘이 기쁨의 주일이다.

1독서: 여호 5,9a.10-12: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과월절을 지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40년의 여정이 마감되었다. 약속의 땅에 다다른 유대인들은 감개무량했다. 이제 약속의 땅, 자유의 땅에 도달하여, 자유와 승리의 기쁨을 하느님께 돌리며 감사드렸다. 그들은 이곳 약속의 땅에서 과월절을 누룩 안든 빵을 먹고 새로운 소출을 맛보면서 지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당했던 모든 어려움들을 이기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감사드릴 수 있었듯이 주일의 모임과 미사는 이러한 기쁨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한 주간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의 삶을 계획하고 은총을 구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미사는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일상에서 당했던 수모, 마음 상함, 상처, 슬픔, 아픔, 원한, 미움, 분노 등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여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하며, 형제들과도 화해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루가 15,1-3.11-32: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진 사람들보다는 잃은 사람들’, 세리 마태오, 간음한 여자, 사마리아 여인, 자캐오 등과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시고 자리를 함께 하신다. 이러한 모습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치욕적인 것이었다. 오늘 복음의 탕자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만,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2). 이렇게 긍정적 관점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전-후반을 연결하는 아버지이다. 전반부에서는 작은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고향을 떠나 방종한 생활로’(13) 탕진하고, 그들의 생각으로는 더 이상 잘못될 수 없는 처지인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될 정도로 나빠지고 이제는 돼지가 먹는 먹이를 먹어야할 만큼 처지가 변하자(16), ‘제 정신이 들어’(17),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품꾼으로라도 써주기를 아버지께 청했다.

그러나 멀리서 아들을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20).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고 성대한 잔치를 열라고 했다. 왜냐하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으므로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라고 한다(24).

후반부는 성실한아들의 반응을 그리고 있다.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자기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잔치가 벌어진 이유를 듣고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28). 그 아들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가 나간다. 그 때 그 아들은 아버지의 지나친 너그러움을 책망하고 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바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29-30). 자기의 동생의 입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의 성실함이 무시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 정의의 저울에 달아보면 큰아들이 옳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의의 척도에 두지 않고 사랑과 용서의 차원에 두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동생뿐 아니라, 형과 같은 이기적이고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동생보다 형이 더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점은 수년간, 매일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행복을 누리면서 사랑의 잔치가 계속되어 왔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곧 잔치인 줄 모르고, 아버지와 하나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의무감과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겨냥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쁜 소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받아들여 함께 그 잔치에 참여할지 어떨지를 결정해야하는 형의 입장과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이기주의가 자신들을 하느님으로부터 갈라놓는다는 것을 알고, 복음 때문에 부딪치게 될 걸림돌을 뛰어넘어 복음이 가지고 있는 큰 기쁨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즉 반대자들의 마음을 꾸짖음과 동시에 정복하시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면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의 알량한 정의나 공치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당신 사랑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되돌아온 아들도, 성실하다고 하는 아들도 다 잔치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에로 되돌아가야 할 이 사순시기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2독서: 2고린 5,17-21: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화해시키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모든 사람을 당신과 화해시켜 구원하셨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19-20).

인간편에서 먼저 하느님과 화해할 수는 없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께 대한 잘못에 대해 해결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그 화해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방탕한 아들에게 그러했듯이 크나큰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포용하심으로써 인간을 당신과 화해시키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제가 되시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어 봉헌되시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죄 있는 분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는다(21). 즉 거룩하게 된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인간들의 모든 거절, 도피, 이기주의 등의 행위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고 냉랭한 오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 사순절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에 앞서 우리 형제들과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자.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이 잔치란 바로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의 참여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이 사순시기를 지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