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나는 간다.”(8,21)고 하시며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될 수난의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곧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발적인 선택으로서의 죽음이요,
전적인 자기 봉헌입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세상의 것을 추구하던 바리사이들이
이 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들어 올린 뒤에야”(8,28)
곧 십자가에 처형하고서야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심으로써 드러나는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전인격적인 자기 봉헌이요
철저한 자기희생이며, 결정적 사랑의 몸짓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아래에서 왔고 세상에 속했기에(8,23)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육체에 매여 변화를 거부하고
자기 것만을 추구하는 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래’ 곧 육(肉)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탐욕과 애착, 이기심, 명예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영적 소경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영을 지닌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살이에서 하는 역할이나 재산, 권력, 학벌 등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늘 하느님의 영을 품고 행동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처럼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8,29).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바라보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기쁘게 걸을 수 있어야겠지요.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사랑의 절정을 봅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패배자의 모습으로 영예도 지니지 못하고
그 어떤 존경이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죽음에 처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무력해지는 극도의 연약함을 통해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짓밟는 그들의 죄악상을 스스로 폭로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방법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찾아나가야 할 구원의 역설입니다.
부활을 눈앞에 둔 우리 모두 이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투덜거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자기 몫을 챙기고 사회적 지위를 지키려 하며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세속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는 독선과 선입견을 버리고,
나아가 나만의 구원, 내 가족과 친지들만의 행복을 바라는
배타적인 마음을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진정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시민으로서
섬세한 사랑의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며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한 사랑과 정의의 연대를 되살리는
회개의 발걸음을 시작할 때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부활을 만나리라 - 강경숙 작사 작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