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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2016 년 4월 8일 금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2016년 4월 8일 금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사도 5,30-32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지도자와 구세주로 세워 당신의 오른편에 높이 올리셔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 증인이십니다.

응송
◎ 주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도다. * 알렐루야, 알렐루야.
○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도다.
◎ 알렐루야.
○ 영광이.
◎ 주님은.

<청원기도>
오늘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어,
― 이 수고를 통하여 우리도 당신 나라에 들게 하소서.
◎ 성부여,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를 살려 주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요한 6,11-15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영적 독서> 성경말씀을 통해 부정적 감정극복하기/두려움, 조이스마이어지음, ’문종원 옮김
성서구절과 기도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성서 구절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준다. 나 이훼가 너의 하느님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들어주며 이르지 않았느냐?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준다.”
(이사 41,10.13)

이제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림이다.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랴. 네가 불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벼리지도 아니하리라.(이사 43,1-2)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702)

사진: 이태리 뽀지오부스토네(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Poggiobustone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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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금요 강좌>
신학 강좌
제4장 학문으로서의 신학
제2절 신학이란 무엇인가?
2.대답의 시도 : 학문으로서의 신학
2) 신학의고유한연구영역
신학의 고유한 연구영역에 대해 질문을 하면 “Theologia”라고 하는 단어의 어원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명심할 것은 신학에서 연구대상과 연구자가 실존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에서 다루게 되는 초월에 대한 질문은 초월에 대한 체험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했다 이렇기 때문에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처음부터 신앙의 주체와 그 주체가 속해 있는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신학의 핵심적인 대상이 하느님이라고 하는 주제를 제시하려면 이 대상은 단순히 경험적 학문적 대상의 직접적인 대상이거나 혹은 인간적 사고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연역되지 않는 계시체험인 것이다. 한마디로 “뜻밖의 체험”이라 하겠다. 일상의 삶 안에서도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흔히 ‘주어진 것’, ‘선사된 것’의 성격을 지닌다. 생각을 통해서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계시체혐의 고유성이 신학적 성찰이나 사색과정에서 보존 되어야 한다. 이 체혐의 중심 그리고 신학적 사색의 중심에는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자리하고 있다. 하느님에 관한 질문은 다른 학문들이 추구하는 대상들에 관한 질문들과 다르다. 이 질문은 연역 불가능한 계시체험 없이는 제기될 수 없는 초월론적 질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신학의 중심적인 연구대상은 절대적 초월의 체험으로부터 발생하는 근거있는 하느님 말씀으로서의 “theo-logia”이다 여기에 첨가해야 하는 것은 특히 구원론과 교회론에서 전개되는 특정한 생활실천과 계시체험으로부터 결과하는 “Logos”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신앙실천이 신학적 지식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의 문제로 축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실천은 절대척 초월의 체험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다면 과연 신학이 여타의 학문들의 환경에 부합하는지가 의문시 된다. 학문들이란 적어도 “방법적 무신론”(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전개되는 방법론적 자세)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다른 학문들이 추구하는 일반적인 대상들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학문적 연구대상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비판적 반성을 거치게되는 연역 불가능한 초월체험에 대한 증명이 이루어거나 아니면 적어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질 때에만 가능하다. 토마스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다. 이로써 신학은 “체험학문”이라고 불린다고 말할 수 있다, 반복하고 검증할 수 있는 체험은 아니더라도 뜻밖의 체험이 인간의 이해지평을 넓혀주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한다. 이렇기 때문에 이중의 모습을 지닌 신앙을 신학의 연구영역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신앙체험/신앙실천(fides qua)과 신앙반성/신앙내용fides quae).
명심해야 할 것은 “theo-logia”가 원래 “하느님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 선포”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런 뜻에서 신학의 연구영역을 선포된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신앙은 초월체험에 근거하고 그리고 신앙실천을 내포한다.
신학의 고유한 영역은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하느님 체험은 절대적 초월의 체험으로서 연역될 수 없고 그저 “수용”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초월체험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을 던질 수 없을 때에 바로 이러한 체험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체험과 학문적 반성은 서로 배제하지 않고 상호간에 연계되어 있다. 신학은 신적인 것을 인식하기 위한 이성을 동반한 노력으로서 이성적 사고의 조건들을 따른다.(67)



Dominic Ko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