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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폴리뇨의 마돈나 / 이종한(요한 ) 신부님 ~



제목 : 폴리뇨의 마돈나(The Madonna of Foglino)


작가 :라파엘로 산치오 (Raphaelo Sanzio : 1483- 1520)
규격: 320X 194cm : 유채
소재지: 바티칸 미술관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삶을 즐겁게 하는 것이 있는데, 성미술이 성서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훈적인 것이라, 즐거움의 관점에서 접근은 불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시기에, 이런 면에서 성미술은 인간에게 차원 높은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으며 그러기에 작품 감상에 있어 어떤 교훈적인 것을 얻기 위해 긴장하기보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데,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크리스챤 삶의 즐거움과 기쁨의 원천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작가는 예술사에서 성모님께 대한 수작(秀作)을 가장 많이 남긴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삶 역시 교황을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더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던 드문 예술가 중 하나였다.

이 행복 체험은 그의 작품에도 드러나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어떤 교훈보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아늑하면서도 경쾌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큰 비중을 둘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교황의 비서로 일했던 시지스문도 디 콘티(Sigismundo Di Conti)라는 고귀한 인품의 사람이 자기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엄청난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헌한 제단화이다.

교황의 비서직이라면 당시 수준에서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직분이기에 그 인생은 행복의 상징과 같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삶의 그림자와 같은 어려움이 있게 마련인데, 모든 행복이 보장된 것 같은 그의 삶에 어느 날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날벼락이 떨어졌다.

대낮에 행복의 산실과 같은 그의 고향집에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이 벼락의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이 커서 집안에 있던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으나, 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봉헌자만은 용케도 생명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단화를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당시유럽 사회에서 최고의 인기와 명성을 얻고 있던 작가에게 이 작품을 부탁했다. 작가 역시 교황의 대단한 총애를 입으며 성숙한 작품성을 발휘하던 시기였으며, 교황청의 실세였던 봉헌자의 청을 흔쾌히 수락해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

한 마디로 행복을 만끽하던 사람에게 닥친 또 다른 다행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작품이기에 거룩함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 보다 하느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사람의 깊은 행복 체험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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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께서 중앙에 구름을 타고 계신다. 품에 안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의 모습이기 보다 어머니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자라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이기에 더 없이 행복하게 보이며, 다른 여느 작품에서처럼 손으로 관람자를 축복한다든가, 미래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것 같은 어떤 교훈적인 제스추어 없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어리광을 피는 모습으로 있다.

성모님 역시 다른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 “ 은총이 가득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 이시기 이전 좋은 아들을 둔 행복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마음껏 어리광을 피우는 아들을 안은 행복한 여인의 모습이다. 여인의 가장 큰 행복은 자기 아들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이 성모님은 한 여인으로서 더 없이 행복한 순간에 서 계신다.

그러나 이 모자는 세상의 예사로운 모자가 아님은 그들을 감싸고 있는 오렌지 빛 후광과 함께 그들 둘레를 하늘 색깔의 일군의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천사들은 성서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천사가 아니라 희랍 신화에 나타나면서 당시 사람들의 뇌리에도 살아있는 사랑의 신 큐피트(Cupid)이다.

그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Aprodite)의 아들로서 항상 뾰족한 금 화살을 가지고 다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가슴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그 화살을 맞은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낭만적 사랑의 상징이다..

행복한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으로 계신 성모자에게 후광이 들림으로서 천상의 존재임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그 주위를 하늘 빛 큐피트로 감싸면서 천상의 행복과 지상의 행복을 조화시키고 있다. 영성적 삶의 행복이 세상의 행복과 동떨어진 어떤 차가운 것이 아니라 너무 아늑하고 따뜻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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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벼락이 떨어졌으나 생명의 어려움이 없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단화를 봉헌한 이 기증자의 마음을 표현하듯 아기 천사가 손에 현판을 들고 서 있는데, 여기에 글자는 읽을 수 없지만, 내용은 기증자가 하느님께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심에 대한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천사는 바로 이 기증자의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작품엔 유난히 아기 천사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성화해설 14번 : 마돈나)장식 효과가 아닌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기쁨과 행복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작품 전체에서 천사가 없다면 여느 성화들처럼 성모자를 위시해서 많은 성인들이 있기에 분위기가 너무 장중하면서 경직될 수가 있어 기증자의 마음을 전달하기에 좀 어색할 수 있으나 이 천사가 바로 이 작품이 줄 수 있는 이런 무거움을 덜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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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옹위 속에 앉아 계신 성모자 아래 오른쪽으로 세례자 요한과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 왼쪽에 빨간 옷을 입은 이 작품의 봉헌자가가 무릎을 꿇고 성모자를 경배하고 있다.

푸른옷을 입고 천사의 표지판을 가리키고 있는 이는 성 예로니모 성인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들과 관객들을 향해 주님을 바라보라는 손짓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말씀으로 주님을 예고하는 자신의 역할을 표시하고 있다.

“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분이 오시는데, 나보다 앞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요한 1, 30)


그 앞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한손을 땅으로 향한 채 한손에 십자가를 들고 계신다. 땅을 가리킴은 “태양의 노래”에서처럼 세상 만물이 바로 하느님의 작품 전시장임을 소개하면서 관객들을 하느님을 향한 찬미에로 초대하고 있다.

십자가는 바로 프란치스꼬가 그리스도께 대해 지녔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성인의 전기를 쓴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성인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불쌍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 2 첼라노 105)

오른쪽 위에 은수자의 모습으로 푸른 옷을 입고 있는 분은 성서를 번역하신 성 예로니모이시며 중세기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받던 성인이셨다.

불같은 열정을 지닌 성인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시기 위해 베틀레헴 동굴에 은거하시면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성서를 처음으로 번역하신 분이시기에 든든한 신앙인의 상징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모델로서 제시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작가의 작품성이 더 없이 화려하고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가운에서도 이 성인들을 통해 신앙의 성장이라는 교훈성을 전하고 있다. 성 예로니모는 세례자 요한의 손짓과 반대로 손을 아래로 향해 천사가 들고 있는 현판을 보라고 초대하면서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에로 관람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성 예로니모가 보라고 가르치는 천사가 들고 있는 현판에 쓰인 감사의 내용은 다음 시편을 상기시킨다.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니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 주시니
네 청춘 독수리 마냥 새로워지도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 .“ (시편 102)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라는 말은 오늘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들이기에 그리 생소하지 않으나 너무 피상적으로 사용하기에 공어(空語)처럼 들릴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왼쪽 아래에 붉은 옷 차림으로 무릎을 꿇은 사람이 바로 이 작품의 봉헌자이다. 봉헌자가 외람되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가 강조하는 겸손에 어긋나는 자기 과시성의 표현으로 보이기도 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봉헌자의 생활 체험을 통해 구체적인 감사의 내용을 제시하면서 하느님을 향한 감사에 대한 천재적 감각을 지녔던 여러 성인들을 동원해서 크리스챤적인 감사를 통해 얻어지는 행복의 삶을 소개했다는 면에서 오늘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을 바라보노라면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처럼 마음이 경쾌하면서 평화로워진다.




출처: 작은형제회, 이종한 요한 신부의 성화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