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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거룩한 혈연 / 이종한 (요한) 신부님 ~



제목 : 거룩한 혈연 (Holy Kinship: 1485)
작가 : 헤르트엔 토트 신트 얀스 Geertgen tot sint Jans(1460- 1490)
크기 :목판에 유화 : 137X 105cm
소재지 : 네델란드 암스텔담 Rijksmuseum 박물관

“마누라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울타리도 곱게 보인다.”는 우리 격언처럼 중세기 크리스챤들은 자기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 많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려고 노력했는데,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에게는 좀 생소하게 여겨지는 예수님의 가계를 모계인 성모님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오직 성서만으로: Sola scriptura "라는 개신교적인 신앙 태도는 성서에 나타난 사건 외에는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하는 반면, 가톨릭교회는 하느님 말씀으로서의 성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성서는 교회에 의해 편집된 것이기에 성서 보다 더 역사가 있는 교회 전승을 통해 드러나는 사건의 추적을 통해 신앙을 풍요롭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것이 바로 성인 공경이다. 자기 정황에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게 사셨던 성인들이야 말로 크리스챤들의 귀감이기에, 중세기에 성인 공경이 대단한 열기를 띄웠다.

그런데, 이 기틀을 마련한 것이 13세기 이태리 제노바(Genova) 주교였던 야고부스 아 보라지네: Jacobus a Voragine: 1228- 1298)가 쓴 황금전설(Legenda aurea)이란 책이었다.

이책은 깊은 신심생활을 갈망하는 신자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으면서 요즘 표현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작품은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성모님의 어머니 성부 안나(Anna)를 둥심으로 작품화 한 것이다.

작가는 암스테르담 풍경화로 유명한 오우바테르의 제자로서 당시 성행하던 신심 단체인 < 성 요한 신트 얀스> 기사단원으로서, 경건한 삶을 살았으며, 자기가 속한 기사단의 성당을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그의 신앙 고백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종교화로서는 좀 예외적으로 즐겁게 노는 어린이들과 풍부하고 대담하게 처리된 색체 처리로 그 시대 다른 종교화와 구분되며, 그러면서도 특유의 슬프고 애잔스러운 내적 감성이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다.

15세기 프랑스를 위시해서 네덜란드 남부지역이 농경사회에서 상공업으로 전환하면서 농업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던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이런 풍요는 자연스럽게, 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짐과 동시 가족과 가정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성모님의 어머니 안나에 대한 공경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성부 안나의 공경을 전통적으로 표현하던 요아킴과 마리아 요셉 아기 예수의 관점이 아닌 더 확대해서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사건을 안나 가계 중심으로 종합해서 재설정했기에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생경스러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선 양쪽으로 두명의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으며 왼쪽의 여인은 무릎에 성서를 펼친 채 손에는 안경을 들고 있다.

그 중간에 세 명의 아이들이 손에는 손잡이가 있는 술잔과 조그만 술통을 들고 타일 위에 쪼그리고 앉아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

그 뒤 제단에는 창세기 22장에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봉헌하기 위해 칼로 치려는 장면이 다채로운 색으로 그려져 있다. 아브라함의 이사악의 봉헌은 원래 죄로 얼룩진 인간의 구원을 위해 무죄한 상태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 구속 공로의 예표였으나 여기에선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놀랍게도 주님의 가계를 남성위주가 아닌 여성 위주로 표현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 1장과 루카 복음 3장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는 몇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남성 위주의 족보임에 반해 여기에서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많은 여인들을 성녀 안나 중심으로 연결하면서 그리스도의 가계를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여러 군상들은 바로 성모님의 어머니 안나를 주인공으로 엮어지는 예수님의 가계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나타내고 있는데, 성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지만 참으로 흥미롭다.

전승에 의하면 성부(聖婦) 안나는 세 번 결혼을 했는데, 처음에는 요아킴(Joachim) 과 했고, 요아킴을 사별 후 클레오파스(Cleophas)와 그 다음 살로마스 ( Salomas)와 결혼했다.

첫 번 결혼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낳았고, 두 번째 결혼에서 마리아 클레오파스를 낳았는데, 여기에서 다시 작은 야고보 , 예수님의 무덤 자리를 마련해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마태오 27, 57), 예수님의 제자인 시몬과 유다가 태어났으며, 마지막 결혼에서 마리아 살로메를 낳았는데, 여기에서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큰 야고보와 사도 요한이 태어나게 된다.

오늘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 상상은 다음 성서구절에 대한 중세인들의 순박하면서도 단순한 사유와 상상력에서 나왔다. 즉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등장인물은 다 주님의 제자이기에 성모님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의 강조가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여자들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마르코 15, 40)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레오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계시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 25- 27)

중세인들은 십자가 곁을 지킨 이 인물들에 대한 깊은 신앙적 사색을 통해 이들을 인간관계에서 가장 깊고 운명적인 관계인 혈연관계로 승화시켰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어떤 개신교에서 말하는 중세기가 성서에 무지했다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는 무식한 주장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선 장면들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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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우선 5명의 등장인물이 있는데, 그 중심은 성부 안나이다. 안나는 무릎위에 단정히 성서를 펼친 채 손에는 성서를 읽기 위해 사용하던 안경을 들고 있다.

그 옆을 성모님께서 예수 아기를 안고 앉아 계신다.

성 안나의 발치에는 사과 바구니가 있는데, 이것은 성모님과 성 안나가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은총을 상징하는 것이다.

. 오늘날 가족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안나의 뒤에 요아킴이, 성모님의 뒤에 요셉이 서 계시는데, 요셉의 손에 백합화가 쥐어져 있다.

백합은 정결의 상징이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사로운 부부가 아니라 성령 안에 만난 부부이기에, 성모님은 아들을 낳으신 후에도 영원한 동정녀이심을 상기시킨다.(루카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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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빛 옷을 입고 제대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우아하게 앉은 여인은 클레오파스이며 그 옆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은 엘리사벳이고 아기는 세례자 요한이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에 의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나이에 세례자 요한을 낳았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중후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머리 모양이나 금실로 수놓은 치마를 입은 옷차림이 더 없이 화려하고 기품이 넘친다.

엘리사벳의 품에 안긴 세례자 요한은 6개월 먼저 태어난 형이지만 혈연으로서는 동생인 주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알기에 미리부터 앙증스러운 손짓으로 주님을 부르고 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 보다 더 큰 분은 없다.”(루카 7, 28)고 찬양하신 반면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역할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는 바로 예수님임을 증거하는 것이기에 한치의 착오 없이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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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성모님과 엘리사벳에 안겨 있는 중앙 타일 바닥에 세 명의 어린이가 있는데. 이들은 오른쪽에서부터 사도 요한, 시몬, 큰 야고보 사도이다. 사도 요한의 손에는 미사 때 사용하는 성작과 같은 잔이 들려져 있고 큰 야고보는 그 잔을 채울 포도주가 담긴 통나무 술통을 들고 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 10장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제자직의 근본적인 요구인 “섬김”의 삶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지녀야 할 핵심적인 내용을 제시하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 제자들은 제자들의 진정한 의미인 섬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비천한 신분에서 탈피할 수 있는 출세 길로 여겼는데, 예수님은 자기의 삶은 철저한 섬김의 삶이라 하셨다.

그리고 이 섬김의 최고 경지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리시며 세례와 잔을 당신의 수난의 비유로 설명하셨다.
이 어린이들은 장차 예수님의 제자가 될 사람들의 상징이며 이들도 영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가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신키고 있다.

성부 안나에 대한 신심은15- 16세기를 거치면서 성모 무염시태 교리로 이어지게 된다. 1439년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열린 공의회를 시작해서, 1476년 프란치스칸 교황인 식스토 4세는 교회가 이 축일과 성녀 안나의 축일을 지내도록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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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왼쪽부터, 안나, 엘리사벳, 마리아, 클레오파스이다. 작가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고귀한 신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오만 정성을 다 쏟았기에 많은 부분이 너무 아름답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상징들을 도입해서 이것을 영성화시키고 있는데, 다음 시편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이에 임금이 네 미모에 사로잡히시리라.
그는 네 임자이시니 그 앞에 꿇어 절하라.
갖은 단장을 한 임금님 딸이 들어오도다.
그의 의상은 금실로 수놓은 것이로다.
색색의 무늬옷 입고 인도되고 그 뒤로 정녀들이
그 동무들이 당신께 인도되나이다.”(시편 44)

작가는 성화의 기본 표현인 담백함에서 탈피해서 섬세하고 화려한 왕실의 귀족적 취향을 도입함으로서 영적 삶의 기품 있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적 정서로는 생경스러운 느낌이 드는 방법으로 성가족을 표현한 이 작품은 오늘 우리 사회에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편협한 종교 현실이 빚고 있는 갈등 해소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땅의 어떤 개신교 교단은 성서를 구절 하나하나까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에 모든 것이 정확하고 오류가 없다는 축자 영감설(Verbal inspiration)을 믿고 있으며 이것은 성서의 다음 구절을 확대 적용한 것이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디모테오 둘째 편지 3, 16)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약 성서에 대한 언급이고 성서 전체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는것이 성서 학계의 정설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큰 관심사와는 거리가 있는 성부 안나를 중심으로 한 신앙의 내용 설명은 모든 인류는 다 하느님의 작품이며, 선에 대한 극단의 추구는 하느님을 만나게 만들고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는 오늘 우리 종교 현실에 꼭 필요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작가는 기사단에서 익힌 차원높은 신앙 체험을 통해 신앙의 밝은 면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노라면 전통적 의미의 성화이기 보담 모처럼 온 가족이 만난 가정의 유쾌하고 기쁨에 넘치는 밝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출처: 작은형제회, 이종한 요한 신부의 성화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