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죽은 예수님을 부축하고 있는 천사들 (1480)
작 가 : 죠반니 벨리니 (Giovanni Berlini : 1430-1516)
크 기 : 목판 템페라 (83 X 68cm)
소재지 : 독일 베르린(Berlin) 국립 미술관
하느님의 아들이 다음 성서 말씀처럼 “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성탄 신앙을 교회는 경축하면서도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후대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325년 교회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종교자유를 얻고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면서 교회 위상은 급변하게 되었다.
박해받던 처지에서 기득권자의 신분이 되면서 교회 성직자들은
자기들의 위상 역시 세속 권력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고픈 유혹에 빠졌다.
이런 현실에 걸맞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주 그리스도 (Pantocrator)이시기에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묘사에 대단한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세속 군주들 수준으로 강화하기 위해
도움이 된다는 차원에서 역시 이 관점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런 처지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을 겪으신 그리스도는
발붙일 자리가 없는 불편한 현실이 되어, 비잔틴 예술에서나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는
십자가를 제작하면서도 가시관을 쓰신 예수 보다 왕관을 쓴 예수로 그리게 되었다.
이것이 중세로 넘어 오면서 프란치스칸과 같은 탁발 수도자들에 의해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겪은 예수의 모습으로 재조명된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에 대한 신심이 생기게 되고 15세기부터 아름답게 표현하기로 유명한 베네치아 화풍에서는
이것이 더 구체화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하는 일군의 사람들과 천사 부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극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르네상스 화풍을 시작한 지오토 본도네이며
그는 파도바 스크로베니(Scroveni) 경당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함(Lamentation)” 이라는 작품에
수난 복음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늘에서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 첨가되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묘사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창조주 왕으로서 하느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세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비참한 죽음을 겪으신
인간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애통하고 지상에서는 제자들이 애통하는 모습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에 대한 사람을 표현하신
주님께 대해 더 없는 공감대를 느끼면서 주님을 본받고픈 열정에 빨려들게 만들었다.
애도하는 천사들의 모습은 성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내용이나,
그리스도를 본받자는 운동에 도움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화에 등장하게 되며
15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표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죠반니 벨리니에 의해 괄목할 만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형제가 화가이며 아내 쪽으로도 만택냐(Mantegna) 같은 쟁쟁한 화가를 둔 집안 출신으로
그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성적 표현과 파격적인 색깔의 조화로
“그리스도를 부축하며 애통하는 천사들”이란 주제의 여러 작품을 남겼다.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두 명의 천사가 부축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천사들이 부축했다는 내용은 성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나,
천지의 창조주와 같은 군림하는 하느님으로서의 모습 보다 죄 외에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은 처지로 오신
인간으로서 예수님에게 더 친근감을 느낀 사람들의 맑은 신앙 감각은 자연스럽게 이런 설정을 하게 되었다.
이런 장면의 설정은 주님 사랑의 극치인 십자가의 죽음을 더 없이 잘 설명할 수 있었기에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고, 이런 정서에 부응해서 작가는 이런 주제의 작품을 여러 점 남겼다.
두 천사의 부축을 받고 계신 예수님은 죽은 모습이시나 가지런하게 정돈된 얼굴과
건강한 신체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 주는 어둠과 절망과는 좀 거리가 먼 모습으로 계신다.
오히려 주님의 얼굴과 몸에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여명이 감지되고 있다.
새벽을 알리는 빛이 서서히 밝아오는 어둠의 상태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가장 비참한 상태의 모습에서 부활의 여명이 감지되고 있다.
두 천사의 모습은 여기에 대조되게 슬픔에 잠긴 모습이다.
마치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빈 무덤 앞에서 보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모습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그분의 부활을 의식하지 못했기에
인간적 슬픔과 불안의 상태로 무덤에 도착했을 때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요한 20: 11- 12)
한 천사는 가시관을 쓴 주님 얼굴 쪽에 머리를 두고 애통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수난 복음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고 왔을 때
빌라도가 폭도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요한19: 5) 는 말을 재현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작가는 이 천사의 표정을 통해 관람자들에 주님 사랑의 극치인 그분의 죽음을 애통하면서
그 정서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천사는 오직 수난하신 주님께만 시선을 두면서
크리스챤 신심의 중요 형태인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 라는 전통 신심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여기에 반하여 다른 천사는 관람객을 바라보면서 그 손으로 십자가에서 못 자국이 난 주님의 손을 잡으며
“이 사랑의 상처”를 보라고 관객들을 초대하고 있다.
못 자국이 선명한 주님의 손목을 잡고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는 천사의 표정은
그리 슬픈 것 보다는 관람객의 시선을 잡는데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은 모습이다.
천사들이 입은 검은 옷은 주님 수난의 슬픔의 상징이라면 천사의 머리위에 쏟아지고 있는 한줄기 빛과
그가 잡고 있는 건장한 남자 모습의 예수님은 곧 이어질 부활을 상징하는 듯 생명을 보이고 있다.
천사들이 입은 검은 옷과 대조적으로 주님 주변은 생명감이 도는 분홍빛으로 처리되면서
지상의 고통과 천상의 영광이라는 극명한 대조를 표현하고 있다.
신 구약의 여러 곳에 천사들의 역할이 나타나고 있다.
구약에서는 주로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중개자 역할이라면,
신약에서는 악마와 대항하여 투쟁하는 그리스도를 돕는 역할과 수호천사처럼
인간을 보호하고 지키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되던 중세기에는 천사들의 존재가 지나치게 크게 부각되면서
천사들을 9품계로 나누는 것과 같은 과도함 때문에 천사 공경이 신앙의 전제적 표현에
혼란을 주는 것으로 여겨 좀 축소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각 문화가 발달하면서 현대에서 천사의 의미는 새로운 중요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시각문화의 발달은 눈에 보이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나 진실에 대해
둔감하게 만들면서 인간 삶의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선
천사들의 존재를 동반한 신앙 접근이 도움이 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천사들에 대한 관심은 이런 현실에서 여러 분야에 괄목할 만한 발전 가운데서도
인간 삶의 어떤 부분은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인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 이종한(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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