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이유
“아들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는다.”(요한 3,31~36)/박기호 신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생활의 실행은 좀 부족할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분명합니다. 산위의마을에 살아가는 가족으로서 부족한 점은 많지만 공동체에 대한 믿음은 분명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분명한데 왜 삶은 불완전 할까요? 믿음에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믿음에는 문제가 없는데 본성의 욕구와 이기심으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살아온 생에 의한 습성이 고약해서일까요?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으로 개신교단을 출발시켰던 마르틴 루터 이야기:
루터는 성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 수사 신부였습니다. 완벽주의자였던 루터는 누구보다 신심이 깊고 생활의 실천이 충실하여 수사들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을 미워하고 식탐, 게으름, 욕정 등으로 늘 같은 죄를 반복해서 고백하는 자기 모습이 너무 싫었습니다. 계명과 수도서원에 충실하지 못한 자신은 완전에 이를 수 없고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뇌에 빠진 그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종탑방에 올라가 단식기도를 하게 되는데 어느 날 묵상하기 위해 로마서 3장(율법과 믿음의 장)을 펴고 보던 중에 문제가 확 풀리는 대오(大悟)를 체험하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2절 “율법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서 믿음이면 다 같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과 진실한 믿음을 확보하면 의화(義化: 구원받음)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교회사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이 사건을 ‘탑실 체험’이라 기록합니다.
율법적 실행이 아니라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믿는 믿음이 가장 완전한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다는 루터의 각성은 500년 동안 개신교의 신앙전통으로 이어져 오며 그런 이유로 개신교 신자들의 신심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보다 더 투철하고 확실하게 능가합니다.
반면에 우리 가콜릭은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 사도 가르침의 전통에 더 가까워 신심과 함께 이웃을 위한 애긍과(구호, 의료, 교육)와 사회정의 활동에 더 헌신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천 없는, 행동없는 믿음'이란 말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중복되지만 믿음의 진실성이 문제로 대두됩니다. 믿음 자체가 진실한 것인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믿음인가? 온전한 신탁의 믿음인가?
마르틴 루터의 깨달음은 믿음과 율법을 하나로 본 것입니다. 율법은 실천인데, 믿음이 확실하다면 율법(윤리적 실천)은 붙어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이 확실한가의 문제이지 '실천 없는 믿음'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믿음’이라면 실천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가져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사가의 줄기찬 설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 보내신 분’임을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복음사가)가 생각한 믿음과 사도바오로(로마서)가 생각한 믿음이 바로 ‘완전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합일(合一)’이라 하겠지요.
어머니에게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저절로 나옵니다. ‘어머니 따로, 사랑 따로’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어머니인가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실천이 없다고 말한다면 ‘자식 사랑이 없는 어머니’란 뜻인데 그런 어머니가 있을까요?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믿음보다 의무감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표현이 신앙생활이고 교회생활의 이유가 믿음이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 청하고 ‘주님, 저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청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기쁨이 없는 이유도 또한 그러합니다. 기도와 노동이 의무감으로 여겨지면 믿음도 노동도 모두 고역이 되어버리고 공동생활은 고통뿐이겠지요. 공동체의 이상과 영성은 가족수첩에 있는 것일 뿐 아직 나의 믿음으로 고백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신앙공동체의 생활의 확실한 목적과 이유는 ‘진실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삶입니다. 신앙에 귀의하는 것이나 공동체에 입촌하는 것이나 강철 같은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봄풀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고추 모종 하나를 안아 들고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희망 한 송이 안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잘 돌보고 가꾸어 열매 맺어야 합니다. 혼자는 쉽지 않으므로 도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공동생활입니다. (2016. 4. 7) *
고마운 비가 오신다! 내려라 주룩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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