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영성생활 / 안셀름 그륀 지음, 조성옥 에노스 수녀 편역
1. 종교 전통과 꿈
옛사람들에게 꿈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였다. 희랍 문화와 성서의 영향을 깊이 받은 초대교회는 꿈의 긍정적인 역할을 잘 이해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에 관해 쓴 글에서, 꿈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모른다고 하였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보아도 꿈은 특별한 몫을 한다. 뽈리까르뽀Polycarp는 순교하기 삼 일 전 꿈에 그의 베개가 불속에 던져진 것을 보고 자신이 화형될 것을 미리 알았다. 펠리치따스Felicitas와 페르페투아Perpetua의 순교도 꿈과 관련이 있다. 이 두 여인은 꿈을 통해 자신들이 견디어야 할 고통이 어떤 것인지 또 하느님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급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용감히 순교할 힘을 받았다. 희랍의 교부들 역시 꿈을 존중하는 그 시대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는 자신이 받은 영감의 대부분이 꿈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꿈에 관해 매우 광범위한 저술을 남긴 시네시오스Synesios of Cyrene는, 꿈을 해석하여 위험이나 질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꿈을 기록하라고 권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꿈을 꾸고 보물을 발견하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글재주라곤 없던 이가 꿈에 뮤즈와 이야기하고 재능 있는 시인이 되어 잠에서 깨어날 수도 있고,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자는 동안 알게 되기도 하고, 병을 고치는 중요한 처방을 꿈에서 얻기도 한다.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다. 인간은 잠을 자면서 사물의 참 본질을 깨닫는 아주 완벽한 통찰에 이르기도 한다. 깨어있을 때 우리를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지만 자는 동안 우리를 비추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꿈에서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꿈은 치유의 힘만 가진 것이 아니다. 꿈은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자리이다. 우리는 꿈을 꾸면서 하느님의 진리와 하나가 되고 사물의 진정한 본질과도 하나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꿈속에서 우리를 가르치신다. 그분은 꿈에서 모든 것의 진실을 보게 해주시고 당신 자신의 신비를 드러내신다. 시네시오스에 의하면 그리스 순례자들에게는 ‘사원에서의 잠temple sleep’ 이라 일컫는 관습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병을 낫게 하는 거룩한 꿈을 꾸기 위해 순례하면서 성스러운 사원에서 잠을 자곤 했는데, 신이 보낸 꿈을 꾸려고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잠에서 깨어나면 꿈을 해석하는 사제들에게 자신들이 지난 밤 꾼 꿈을 가져갔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것은 종교적인 일이었고 이 과정은 오늘날 심리치료의 원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고대의 심리학자라 부르는 교부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는 꿈과 영적 여정의 관계를 깊이 통찰하였다. 그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높은 목표는 아파테이아apatheia로, 이는 내적 조화, 격정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순결, 하느님의 사랑에 몰두하는 것이라 말한다. 융C.G.Jung에 의하면 아파테이아는 성공적인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표시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아파테이아에 도달하는 방법과 내적 평화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표징들을 그의 저술에서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들은 격정과 감정이 주관하며 이것이 꿈에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분노는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도 모습을 나타낸다. 분노하는 사람은 자면서도 기분 나쁜 꿈을 꾸거나 몸이 상하기 쉽다. 분노나 화가 꿈에서까지 얼마나 우리를 조종하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나쁜 꿈은 악마가 분노를 통해 하는 짓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잠자리에 화를 가져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태양이 지기까지 화를 내지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가 한밤중에 우리 영혼을 공포에 떨게 할 것이고 다음날 우리는 더 겁쟁이가 되어 깨어날 것이다. 꿈의 무시무시한 이미지들은 주로 분노에서 올라온다. 실로 성을 잘 내는 것만큼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Praktikos 21)
꿈의 이미지들은 분노의 영향을 받고 우리 삶은 다시 이 꿈의 영향을 받는다. 악몽을 꾸고 나면 몹시 지치고 무력해져서 새 날을 힘들게 시작하게 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좋은 꿈과 나쁜 꿈이 우리의 영혼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꿈을 통해 마음의 순결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알 수 있다. 많은 꿈들이 악마로부터 오고 꿈을 통해 악마는 우리를 약하고 병들게 만든다. 어떤 꿈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기까지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그런 꿈을 꾸면 즉시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무서운 꿈은 그리스도께 되돌아가게 하는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약하고 불안한 영혼을 낫게 하고 평화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의 자리를 찾으려면 내면의 격정들과 마주해야 하고 그것들과 싸워야 한다. 자기관찰과 영적 투쟁은 꿈속에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성인들의 생애에 꿈은 자주 등장한다.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예로니모Jerome는 꿈을 꾸고 세속의 학자에서 그리스도교 학자가 되었다. 파코미우스Pachomius는 그의 새로운 소명을 꿈에서 알아들었다. 은수자였던 그는 어느 날 꿈을 꾸고 회수도승 생활의 창시자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이웃사랑과 은수자의 이상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꿈에서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제자들의 꿈에 나타나 그들 수도원에 관한 계획을 말한 일도 있다. 그 역시 영적 스승으로 꿈에서도 제자들을 가르치며 길을 인도하였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역시 꿈에서 그의 소명을 깨닫는다. 그는 하느님의 성전 다미아노 성당을 어떻게 재건해야 하는지 꿈에서 보았다.
신비가들은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이 꿈과 환시를 통해 얼마나 더 뜨겁게 타올랐는지 증거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더 쉽게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다. 꿈은 그들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더 열렬히 기도하게 하였고, 더 깊이 사랑하며 충실히 살도록 이끌었다. 인간은 자는 동안 긴장에서 벗어나 더 편안한 상태에 있고 꿈을 꾸면서는 바깥세상의 방해를 덜 받기에 하느님과 영의 세계에 더 많이 열려있게 된다.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꿈은 줄곧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영적 스승들은 하느님의 뜻이 꿈에서 드러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었고 하느님의 구체적인 뜻을 찾는 중요한 수단으로 꿈을 존중하였다. 분명 꿈은 하느님을 강력하게 체험하는 자리이다. 기도와 묵상 중에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니다. 하느님이 하신다. 하느님은 꿈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신다. 꿈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제한된 영적 수고에 매달리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기꺼이 마음을 열고 그분께 길을 내어줄 수 있다. 하느님께서 꿈에 당신 치유의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지시면 우리는 그분을 아주 가까이 느끼면서 생기 있게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분은 꿈에서 우리 마음에 대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사랑받는다는 내적 확신을 주신다.
영성사 안에서 볼 수 있는 꿈의 또 다른 의미는 꿈이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더 정직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꿈에서 우리 자신의 진실을 보게 하신다. 물론 이 진실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초기 수도승 전통에서 꿈의 이런 역할은 매우 강조되었다. 악마들이 꿈 안으로 무시무시한 이미지들을 불러들인다면, 이는 우리 영성생활이 바로 그런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 안에 악습과 결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이런 꿈을 꾸고 알아차려야 된다. 우린 이미 오래전에 이 악습들을 물리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 의식 안에 분노와 미움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우리가 아직도 과거의 상처로 인한 증오와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꿈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보게 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한다. 꿈은 마음의 순결과, 하느님과의 일치, 내적 자유를 가늠케 하는 정직한 지표이다.
2. 꿈의 영적 심리적 해석
교회의 경험과 성서 전통의 맥락에서 꿈을 이해하는데도 심리학은 도움을 준다. 물론 지나치게 심리적인 차원에서만 꿈을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 보다는 심리학의 이론들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상징과 이미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자들이 꿈에 관해 연구한 책들이 분명 도움이 된다.
꿈을 영적으로 이해하려면 우선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꿈의 언어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반복하여 질문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지난 밤 꾼 꿈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그분 앞에서 꿈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요셉이 파라오에게 말했듯이, 꿈을 해석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께 속한 일이다. 깊은 기도 안에서 자신이 꾼 꿈을 숙고해보면 하느님께서 나 자신과 내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지금 내가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
융 심리학은 주관적 차원과 객관적 차원으로 꿈 해석을 구별한다. 꿈을 이해하는 기본 원리는 우선 객관적 차원에서 그것을 해석해 보는 것이다. 먼저 그 꿈이 내 주위의 사람들이나 상황, 일이나 직업 등에 관해서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객관적 차원에서 꿈은 내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 말하기도 하고, 중요한 외적 문제들에 대해서 알려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실제로 내 집 사다리에 문제가 있다거나 대문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꿈이 가르쳐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꿈은 그날 내가 경험한 일 가운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깨우쳐주기도 한다. 꿈이 가진 보상기능은 우리가 의식 차원에서 사물을 대하는 관점을 보충해 준다. 의식은 우리가 보고자 원하는 것에 주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무의식이 보여주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무의식은 우리 의식이 이해하지 못한 것까지 담고 있다. 하느님은 나를 진리로 이끌기 위해 꿈에서 무의식을 통해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알게 하신다.
꿈을 이해하는 다음 방법은 주관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꿈에 나타난 모든 사람과 사물들은 나 자신의 부분들이고 나의 상태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꿈은 내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꿈에 나타난 엉뚱한 이미지들이 어떤 합리적인 설명보다 더 적절하게 나의 상태를 묘사할 때가 많다. 물론 꿈을 지나치게 임의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제나 지나온 삶의 맥락과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꿈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꿈 상징 사전을 참고하여 공식에 대입하듯 단순하게 해석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그것보다는 그 이미지와 함께 내 속에서 떠오르는 연상들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은 분명 도움이 되지만, 그 상징들을 구체적인 자신의 상황과 연결시키는 주관적 숙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융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절대로 들어맞는 완벽한 꿈 해석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 개인이 처한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고 꿈은 그것과의 상관관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저런 꿈과 그 해석
자동차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운전하고는 싶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운전대 잡는 것을 피했다면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음을 뜻할 수 있다. 지금 나는 내 안의 어떤 무의식적인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건 아닌지? 차가 언덕을 올라가는 중에 액셀러레이터가 작동하지 않아 앞으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면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지금 난 앞에 놓인 과제를 감당할 용기가 없는가?” 어쩌면 나는 연료를 충분히 채우지 않은 채 문제의 높은 언덕을 향해 떠났는지도 모른다.
아래로 떨어지는 꿈도 흔하다. 그 꿈은 다음날 내가 계단이나 지붕에서 굴러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면, 지금 버팀대를 놓치고 발을 헛디뎌가며 너무 높이 올라가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에게 묻자. 꿈에서 떨어지는 것은 영혼의 내적 추락을 경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절제가 필요하다는, 내 삶의 어딘가에 지나침이 없는지 보라는, 조심스레 삶의 자리를 살피라는 충고이다. 한마디로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행보에 주의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떨어지는 꿈이 추락하거나 다치는 것을 미리 막지는 못해도 우리가 하느님 안에 피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할 수 있다.
꿈에 무엇인가에 시달린다면, 이는 자신 안의 어떤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꿈에 날 괴롭히는 것은 내 본성의 그림자, 어두운 면일 수 있다. 그것은 내키지 않은 쪽에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성가시고 부담스런 인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내가 내 자신과 도무지 어울리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적대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내 안에 억압된 것이 있음을 상징하는 어떤 동물의 형상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괴롭힘을 당하는 고통스러운 꿈을 꾸었다면 그 꿈을 피하지 말고 깊이 숙고하라. 어쩌면 꿈에서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나 동물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안아줄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꿈에 올라온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억압하고 외면해온 내면의 그림자를 통합하는 일이다. 그림자는 머리로 이해한다 해서 우리 안에 통합되지 않는다. 그것을 나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고 화해해야만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꿈을 깊이 생각하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억압되었던 그림자가 좀 더 의식되고 서서히 나의 것이 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전쟁터에 있거나 어디에 갇히는 꿈도 역시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꿈은 내가 자신과 투쟁하고 있음을, 내면의 적과 싸우고 있음을, 어쩌면 내 자신 안에 포로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은 흔히 내적 혼란을 의미한다. 내 안의 파괴적인 힘 때문에 스스로의 포로가 되어 묶여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꿈을 깊이 생각하면 하느님은 내가 무심히 지나친 것들에 대해 알려주신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 기도할 때 안에서 올라오는 직관들을 내 자신의 언어로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꿈에서는 직관이나 감정들을 덮어버릴 수도 억압할 수도 없다.
꿈은 우리가 외면하고 억압하는 삶의 부정적인 양상들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꿈은 때때로 내가 생각보다는 더 많이 성장하고 있음을, 내 자신과 더 깊이 화해하고 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너거나 그곳으로 운전하는 꿈은 이미 상당히 진보했음을, 어쩌면 가야 할 그곳에 벌써 도달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꿈에서 집은 흔히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꿈에 전에는 본적이 없는 새로운 방을 자신의 집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꿈은 내면의 여정에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몰랐던 내 인생의 새로운 영역으로 초대되고 있는지 모른다.
꿈에 도둑이 침입하여 내 집을 부수었다면, 그는 우리 내면 깊은데서 올라오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올라온 이 존재는 우리 의식세계로 들어와 그 질서와 소유물들을 위협하려 든다. 이 도둑은 가면을 쓴 나의 본능과 욕망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부수거나 침입하는 꿈은 그것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제대로 문을 열지 않았기에 들어와야 할 선한 힘들이 내 집 문을 부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도둑을 안으로 모셔 친절하게 대할 일이다. 하지만 내 영혼의 집이 속수무책으로 열려있어서 내 집을 망가뜨릴 수 있는 위험한 자가 침입했을 수도 있다. 문이 모조리 열려 있어서 해로운 생각과 움직임들이 수시로 내 속에 들락거리고 있다면, 나는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나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야 하고 하느님께 더 많은 공간을 드려야 한다. 내 집을 당신으로 채우신 하느님께서 나를 위협하는 낯선 힘으로부터 내 영혼의 문을 안전하게 닫아 주실 것이다.
뭔가 해야 하는데 늦어버렸다든지, 가야 할 곳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꿈도 자주 꾼다. 그렇다면 과거사에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라. 그런 꿈은 내가 현재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쓸데없는 과거의 짐짝들을 너무 많이 현재로 옮겨와 무겁게 지고 가느라고 말이다.
여행 가방을 잃어버리는 꿈은 내적 여정에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알려준다. 지금 내 삶에 빠진 것은 무엇인가? 침묵이나 기도, 혹은 하느님의 은총일 수 있다. 또는 내가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내 안의 어떤 능력이나 인품일수도 있다. 꿈에 돈을 잃어버렸다면 인생길을 가는데 절대로 필요한 자신의 중요한 가치나 태도를 잃어버리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는 것이 현명하다. 차를 놓치거나 잘못 타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꿈들은 대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내 삶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놓치지는 않았는가? 나도 모르게 길을 잘못 들어 위험한 곳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정직하게 성찰해보면 그 꿈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꿈은 우리 자신의 진실한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열쇠이다.
인생여정은 곧잘 여행으로 비유된다. 꿈에서 우린 자주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본다. 와 본적이 없는 낯선 길을 가기도 하고, 처음엔 익숙하다가 갑자기 모르는 길에 접어들기도 한다. 목적지를 찾아 절망적인 마음으로 낯선 도시나 집 앞을 헤매기도 하고 한 지점에 붙박힌 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쩔쩔매는 꿈을 꿀 때도 있다. 이런 꿈들은 모두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이미지들을 놓고 자신을 돌아보며 이제 어떤 결정이 내게 필요한지 하느님께 여쭈어볼 수 있겠다. 막다른 길을 만나는 꿈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막힌 듯 보이는 좁은 길의 저 끝에서 새로운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교차로에 선 자신을 보기도 하는데, 가야할 방향을 잃은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 알 수 없는 글씨가 쓰인 표지판이 꿈속에서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때로 동물이나 작은 아이, 천사가 우리를 인도하기도 한다. 그런 꿈을 꾸었다면,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학생 때처럼 시험을 치는 꿈도 드물지 않다. 그런 꿈은 통과해야 할 어떤 테스트 앞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나는 지금 인생의 학교에서 시간 내에 문제를 푸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꿈은 내가 풀어야 할 진정한 과제가 무엇인지 또 이 테스트에 통과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많은 동물이 꿈에 나타난다. 동물들은 우리 본능과 욕구를 말한다. 어떤 동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쉽게 단정해선 안 된다. 꿈을 꾸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 그 동물과 함께 올라오는 또 다른 연상이나 기억들이 꿈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우선 꿈에 나타난 동물의 본성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현재 영성생활이 어떤 상태인지 아는데 도움이 된다. 동물들은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기에 단순한 분석에 그치지 말고 이 동물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다보면 통합되기를 기다리는 내면의 억압된 힘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꿈을 대하면 내적인 변화로 이끄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여정을 경험하게 되고 또 그런 중에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들을 알아차리게도 된다. 옛 사람들은 꿈에 하느님께서 동물들을 보내시고, 그 동물들은 친절한 동반자로 우리가 위험한 상황을 알아채고 피해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한다고 믿었다.
보통으로 말(馬)은 길들여진 우리의 인간적인 충동을 대변하고 개는 육체적 욕망들을 상징한다. 맹수의 왕인 사자는 우리가 새롭고 확고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정신 에너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공격성이 내 속에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호랑이는 우리 충동의 독립성을 상징한다. 꿈에 쥐가 보이면 감추어진 슬픔이나 심각한 걱정거리가 우리를 갉아먹고 있지나 않은지 물어볼 수 있겠다. 영적 존재를 상징하는 새들은 우리를 움직이는 위로부터 오는 생각들을 나타낸다. 프로이드는 뱀을 성적인 의미로만 이해했는데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꿈에서 뱀은 분명 중요한 상징이다. 심리학적으로 뱀은 근원적인 힘을 가진 강력한 정신 에너지를 상징하며, 영혼이 치유되는 과정이나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꿈에서 뱀을 만난 사람은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엄청난 힘과 마주하는 것이다. 이 힘은 큰 위험이나 치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또 뱀은 내면의 억압된 성(性), 직감력, 능란함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보통 죽음과 관련된 꿈을 두려워한다. 꿈에 본 죽음이 자신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속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오히려 죽음에 관한 꿈들은 우리 영혼 안의 무엇인가가 소멸하면서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있음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가 나오는 꿈은 대개 축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내 안에 새로운 생명력이 낡고 굳어버린 자아를 뚫고 나오려 하는지 모른다. 또 꿈속에 나타난 어린이는 이제 우리가 자신 안의 참된 중심, 참 자기와 접촉하고 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임신하는 꿈은 새로운 무엇인가가 시작되고 있다거나, 가장 깊은데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든지,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라는 좋은 암시일 수 있다. 비슷한 축복의 메시지는 결혼식 꿈이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혼인은 서로 반대되는 것의 신성한 결합으로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을 상징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의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로 모으신다. 우리는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으로 우리 안의 그 무엇도 그분의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제외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생명의 충만한 안에서 서로를 나눌 것이고 모든 것이 생명을 노래한다. 결혼식이나 아이들이 나오는 꿈은 내적 기쁨이 담겨있다. 우리는 이런 꿈을 꾸고 나서 하느님과의 일치, 자기실현의 여정에서 진보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희망에 찬 새 사람으로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
3. 영성생활과 꿈의 역할
어떤 이들은 꿈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꿈이 해로운 무엇인가를 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일이다. 꿈은 그 자체로 결코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처한 현재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위험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위험이 있다면 피하게 한다. 그러니 위험을 암시하는 꿈도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런 꿈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삶의 방향을 바꾸어 재난이 닥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꿈을 꿈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삶으로 가져와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 내면에 강한 저항이 일어나기도 한다. 융의 제자 E. Aeppli는 꿈이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꿈이 담고 있는 통찰을 외면하는지 모른다. 그 깨달음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어떤 특정한 관계에 해를 끼칠 수도 있고, 집착했던 삶이나, 일, 태도들을 버리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꿈의 메시지를 거부하곤 한다. 우리는 자신이 지금 좋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는 쪽을 택한다.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본성과 충동에 의지하여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제는 겁내고 있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꿈의 강력한 충고를 인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세상이 주는 과제로부터 영원히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이 때야 말로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아주 깊은 데서 나오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내 삶이 정녕 이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꿈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꿈에 나타난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묻고, 무엇보다도 나의 인생을 위해 이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다. 꿈에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선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양새가 얼마나 어색하고 불안한지를 나타낸다. 우리의 확신에 찬 외양 뒤에는 내적 가난과 헐벗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맨발로 성당 같은 곳에 들어가는 꿈을 꾼다면, 그것은 이제 매일의 삶의 단순하고 평범한 진실들을 무시하지 말고 좀 더 진지하게 내가 지닌 자연적인 힘들과 접촉하라는 의미이다.
꿈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똑똑히 말해주지는 않는다. 대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과 관련이 있는 어떤 암시를 감지하기도 한다. 지금 지나치게 과로하고 있다거나, 어떤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하느님과 멀어지고 있다거나... 이런 느낌에 진심으로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무엇인가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다시 솟아나는 것이다. 이제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과 함께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분은 나를 내면의 샘으로, 그간 내가 진흙탕으로 만들어놓은 그 샘물, 받기를 거절했던 은총의 샘으로 다시 데려가실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는 꿈의 언어를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꿈은 영혼이나 무의식의 언어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시는지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침묵이나 기도 중에 들려온 소리를 멋대로 왜곡한다. 우리 욕망을 꿈에 투사하기도 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은 무시해버린다. 꿈을 통해 보게 된 진실은 종종 불유쾌한 것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의식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성공적으로 차단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꿈에서 우리 자신의 진실을 보여주시고 우린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꿈에서 우리의 자아는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언어를 간과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치유하시는 그분의 손길로부터 우리 삶의 중요한 영역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의 영성생활은 진정성과 자유, 사랑과 선함, 생명력의 결핍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인간 영혼의 그림자를 무시하는 영성생활은 위험한 긴장 상태로 치닫게 마련이다. 우리 삶의 한 쪽에는 하느님께 순종하며 사랑을 하려는 선한 의지와 노력이 있지만, 다른 쪽에는 세속적인 필요와 인간적 욕구, 육체적 충동과 그것들의 억압인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너무 쉽게 우리는 이 두 영역을 단절시키고 그 사이에서 분열되고 만다. 종교나 교회가 자주 보이는 신경증 증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혹독하게 대하고 지나친 것을 요구하고 마침내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슬프게도 교회는 과거 역사 안에서 자신 안에 감당하기 어려운 긴장을 만들어왔고 많은 사람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인류 역사와 교회의 풍부한 전통을 새롭게 이해하여 성숙한 영성을 키워가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그리스 신화, 초기 수도승 전통, 이냐시오 영성,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그리고 곧잘 의심과 오해의 표적이 되곤 했던 교회 역사 속의 뛰어난 여성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귀한 보화들이다. 성숙한 영성은 몸을 도외시하지도 꿈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포함한 전체성 안에서 인간을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온전하고 건강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
영적 여정에 밤 시간이 제외되지 않는다면 영성생활은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영혼이 가장 고요히 집에 머무는 밤 동안 더욱 가까이 우리 곁에 계신다. “저를 타일러 주시는 주님을 찬미하오니 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일깨우나이다. (시편 16,7)” 밤이 되면 우리 영혼은 떠돌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오고, 그 때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에 대고 말씀하신다. 시편은 또 말한다. “잠자리에서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잠잠하여라(시편 4,5)”
* 안셀름 그륀 신부의 'Dreams on the Spiritual Journey' 를 편역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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