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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성무일도 ~

9월 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아침기도

 

9월 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9월 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끝기도

 

 

 

 

 

이탈리아 산조반니 로톤도에 안치돼 있는 오상의 비오 성인 유해

 

 

 

오상의 비오 신부 시복

 

 

[바티칸시티〓CNS]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발과 손에서 피를 흘린 것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회의 비오 다 피에트레시나 신부가 5월 2일 시복된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교회인사 중 한 사람이었던 비오 신부는 1887년 이탈리아 아드리해 연안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5세에 카푸친 수도회에 들어갔다.


1910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1918년초부터 예수처럼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은 1968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런 특별한 현상으로 인해 비오 신부는 교황청의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 됐고 교황청은 특히 30년대와 40년대에는 그의 사제직무의 대부분을 정지시키기도 했다. 비오 신부 역시 자신의 이상한 현상에 대해 몹시 거북해 하면서 나는 기도하는 수사이고 싶을 뿐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소식을 들은 많은 신자들이 그를 찾았고 그는 병원에서 일하며 하루 10∼12시간씩 고해성사를 주기도 했다. 이런 그를 가리켜 이탈리아의 한 신부는 행동이 아닌 열정을 지닌 성인이라고 말했다.


시복식을 주재하게 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비오 신부와의 개인적인 사연을 갖고 있다. 교황은 1947년 자신의 젊은 시절 비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기도 했으며 1962년 폴란드 크라코프 대교구장 시절에는 후두암 진단을 받은 친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비오 신부에게 편지를 써보내기도 했다. 이 편지를 쓴 11일 뒤 에 그 친구의 암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비오 신부의 시복식에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자 로마 시당국과 바티칸 측은 시복식 날 성 베드로 광장의 입장객을 15만명으로 제한하고 20만명 정도로 예상되는 나머지 순례객들을 위해서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입구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 시복식을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도록 조치하기로 했다.

 

[평화신문, 1999년 4월 25일]

 

 

성 비오 신부는 기도와 사랑의 모범 교황 16일 시성식 거행

 

바티칸에 30만 인파 몰려

 

 

<사진말> 비오 신부 시성식
비오 신부의 시성식이 거행된 6월 16일 그가 타계한 이탈리아 남부 산 조반니 로톤도 성당 앞에 신자들이 몰려있다. 비오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교황 다음으로 높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이날 시성식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758번째 성인이 됐다(위). 6월 1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비오 신부의 시성식 장면. 이날 시성식에는 약 30만명의 신자들이 몰려 들어 성황을 이뤘다(아래).

 

 

[외신종합] 세계적으로 이미 추앙받고 있는 카푸친회 소속 비오 신부의 시성식이 6월 16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거행됐다.


교황은 이날 시성식에서 비오 신부의 기도와 사랑의 삶을 찬양하면서 『오늘 탄생한 새로운 성인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초대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하고 가장 숭고한 선익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비오 신부는 1968년 81세를 일기로 이탈리아 남부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타계했다.


시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지금까지 바티칸에서 열린 어느 대회보다도 많은 수를 기록했는데 특히 섭씨 36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몰려들었다.


시성식이 시작된 오전10시 전에 이미 3만5천석의 좌석과 2만1천여석의 입석이 모두 찼고 교황청에서 티베르강에 이르는 간선도로 등 바티칸의 주요 도로와 광장에는 3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곳곳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교황이 집전하는 시성식을 지켜봤다.


뜨거운 날씨와 많은 인파로 만일의 사고를 우려한 경찰과 구조 요원들은 도시 곳곳을 지키며 순례자들에게 75만여병의 생수를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교황은 오전10시 25분경 흰색과 황금색의 제의를 입고 라틴어로 비오 신부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예식서를 낭독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462번째로 성인으로 탄생시킨 파드레 비오 성인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폭넓게 사랑받는 인물이다. 지금까지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에서 비오 신부의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만여개의 기도 모임들이 구성돼 있다.


이날 시성식에 함께 자리한 사람 중에는 비오 신부의 전구를 통해 병이 치유된 기적의 주인공들도 있었다. 1992년 불치병이 치유된 콘실리아 데 마르티노와 2년 전 회복 불가능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던 10세의 어린이 마테오 코렐라가 그들이다. 전자는 비오 신부의 시복을 가능하게 했고 두 번째 어린이는 이번 시성식을 가능케했다.


교황은 비오 신부의 삶과 신앙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기도와 사랑, 이것은 비오 신부의 가르침을 가장 구체적으로 요약하는 말』이라며 『비오 신부는 다시 한 번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말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말했다.


한편 비오 신부가 선종한 곳인 이탈리아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도 비오 신부의 시성을 기념하는 행사가 마련됐다. 비오 신부가 살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원조를 위한 집」을 설립했었던 이 곳에는 6만여명의 군중들이 몰렸다.


교황은 『이 겸손한 카푸친회 수도자가 살았던 십자가의 영성은 그 얼마나 시의적절한 것이었던가』라며 『오늘날 우리 시대는 희망을 향해 창을 열수 있기 위해서 그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미사를 마치고 삼종기도를 바치면서 비오 신부를 전례 안에서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며 매년 9월 23일 그의 선종일을 기념해 해마다 미사 안에서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계서 기념행사


파드레 비오 시성 기념 행사는 바티칸과 이탈리아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함께 펼쳐졌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라 피에다드 성당에서 비오 신부를 기리는 미사를 거행했고 필리핀에서는 시성식을 앞두고 목요일부터 삼일기도를 시작해 마닐라에서 거행된 미사로 그 절정을 이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비오 신부를 성인으로 선포하는 동안 인도의 투라 교구는 비오 신부에게 바치는 병원과 학교 건물을 축복했다.


챠드의 고아 교구에 있는 한 본당은 비오 신부를 주보로 모시고 9월에 설립될 예정인데 이 본당은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비오 신부를 주보로 모신 본당이 될 예정이다. 지난 몇 주 동안 고아의 300여개 마을에서는 비오 신부의 기도와 생애를 담은 기도문을 배포해왔다.


전세계에 2700여개를 헤아리는 비오 신부 기도 모임의 사무총장인 마르씨아노 모라 신부는 『우리는 양심이 깨어나고 기도를 향한 열정이 솟아남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23일]

 

 

성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 미사 봉사 기도로 유명

 

 

파드레 비오(Padre Pio 1887 ~1968)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 대교구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파드레는 이탈리아어로 신부를 뜻하는 존칭이다. 비오는 그의 주보성인인 교황 성 비오 5세의 이탈리아어 이름으로 그가 수도회에 들어갈 때 새 주보성인의 이름으로 지은 수도명이다.


아버지 그라치오 포르지오네와 어머니 마리아 주세파 데 눈치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2살 때 견진성사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다. 1903년 1월 6일 그는 모르코네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했고 그곳에서 1월 22일 비오 수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1916년까지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해 9월 산 조반니 로톤도로 간 그는 거기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와 미사로 유명하다. 사회적인 봉사활동에 있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집을 1956년 5월 5일 설립했다.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다.

 

50년 이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사목활동으로 그에게 받는 고해성사로 그와 나눈 상담으로 그리고 그의 위로로 의지할 바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신부는 언제나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1971년 2월 20일 비오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교황 바오로 6세는 카푸친회 장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얻은 명성을 보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니요. 그는 겸손하게 바치는 미사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해소에 머물고 주님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몇 년 동안 그의 성덕과 기적들은 거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카푸친회는 교회법에 따라서 비오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했다. 비오 신부는 이에 따라 1999년 5월 2일 시복됐고 지난 2월 28일 시성이 결정됐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23일]

 

 

산골동네가 세계적 순례지로 각광 이탈리아 산조반니 로톤도 마을

 

 

[산조반니 로톤도(이탈리아)=CNS] 100년 전만 해도 번잡한 세상과는 아주 동떨어진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산조반니 로톤도'가 오상의 비오 신부의 명성에 힘입어 세계적인 순례지로 성장 변모하고 있다.

 

바위 투성이의 언덕에 위치한 보잘 것 없는 이 마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오는 6월 성인품에 오르는 비오 신부가 지난 1916년 마을 변두리의 카푸친회 수도원으로 옮겨오면서부터. 이후 비오 신부의 성덕과 그가 받은 특별한 영적 은사들(특히 오상)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 마을은 그가 1968년 세상을 떠나기 이전에 이미 해마다 수십만 명의 신자들이 몰려드는 영성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오늘날 로톤도는 연중 800만명 가까운 신자들이 밀려드는 유럽 최대의 순례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로톤도보다 더 많은 순례객을 맞아들이는 곳은 멕시코에 있는 과달루페의 성모 성지가 유일하다.

 

수없이 밀려드는 순례객들을 위해 로톤도의 카푸친 수도원 측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성당을 건설하고 있다. 오는 2003년 완공되는 이 성당은 약 8000석의 좌석과 6000개의 파이프로 이뤄진 대형 파이르 오르간 그리고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위해 50개의 고해실을 갖출 예정이다.

 

비오 신부는 특히 하루 10~12시간씩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해 준 사제로 유명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자신의 기도 생활의 중심으로 삼았고 자신의 손과 발에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아 그 상처를 안고 살았다. 또 그리스도를 따라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수많은 자선 사업을 펼쳤다.

 

그뿐 아니라 비오 신부는 기도의 중재자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전구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비오 신부에게 기도를 요청한 인물 가운데는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들어 있다. 1962년 폴란드 크라코프의 대교구장으로 있었을 때 카롤 보이티야 대주교는 비오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후두암을 앓고 있는 한 폴란드 여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11일 후 보이티야 대주교는 다시 편지를 써서 그 여인이 기적적으로 낳았다고 전했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치유 기적들은 주기적으로 이탈리아 신문들에 실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비오 신부가 시작한 병원 양로원 등의 복지 기관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례객들의 기부로 계속 규모를 늘려 성장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순례지가 너무 상업화되어간다는 부정적 견해도 적지 않다. 실제로 늘어나는 순례객들을 맞기 위해 비오 신부의 묘지가 있는 성당 주변은 숙박시설과 음식점 기념품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실정이다.

 

일례로 로톤도에서는 지난 3년 사이에 숙박시설이 배로 늘어나 180여 곳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또 다른 34개 숙박시설이 건설 중이다.

 

이곳을 찾은 한 여성 신자는 여성신자는 "아름다운 녹지와 평화스러운 마을을 기대했는데 호텔과 기념품가게만 있다"며 실망감을 토로했다.

 

[평화신문, 2002년 5월 5일]

 

 

이탈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성인은?

 

'오상의 비오 신부' 1위...회사명에 성인 이름 넣은 기업 2만 1000여곳

 

 

▲ 성 비오 신부

 

 

[바티칸시티=CNS] 바티칸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에는 성인 이름이 넘쳐난다.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밀라노 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회사명에 성인 이름을 넣은 기업체는 2만1000여개나 된다. 이는 지난해보다 약 1000개가 늘어난 수치다. 특히 이 가운데 65개 회사는 '모든 성인(ognissanti)'을 쓰고 있다.

 

회사들뿐만 아니다. 동네 상점이나 길거리 공영 주차장, 장례식장에서도 성인 이름을 애용한다.

 

바티칸도 예외는 아니다. 스위스 근위대 성당인 '성 마르티노와 세바스티아노' 성당을 비롯해 성 비오 10세로(路), 성 베네딕토 가로수길, 성 요한 타워, 성 로제 주차장, 성 찰스 궁전 등 성인 이름이 붙여진 곳이 즐비하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성인은 누구일까. 이탈리아 가톨릭 잡지 '파밀리아 크리스티아나'가 최근 신자 6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1위는 성 비오 신부가 차지했다.

 

'오상의 비오 신부'로 잘 알려진 비오(1887~1968)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상처가 손과 발, 옆구리에 생겨 피를 흘린 것으로 유명하다. 한때 교황청이 성무집행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2002년 성인품에 올랐다.

 

이밖에도 이탈리아 수호성인인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해 성 안토니오, 마리아, 성녀 리타 등이 이탈리아에서 사랑받는 성인들이다.

 

[평화신문, 2006년 11월 24일]

 

 

오상의 비오 신부 생존 비서 에르메린도 디 카푸아 신부

 

고통의 스승 비오 신부 알리고파

 

 

- 성인이 끼던 장갑(오른쪽)과 성인의 피가 밴 헝겊 조각을 보여주고 있는 카푸아 신부.

 

 

"성 비오 신부님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산 가장 가까운 성인이십니다. 한국교회에 성인을 널리 알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오상(五傷)의 성 비오(1887~1968, 이탈리아) 신부 생존 비서 중 한 명인 에르메린도 디 카푸아(76, 카푸친 작은 형제회) 신부는 "더 많은 한국 신자들에게 성인의 생애와 영성을 전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을 드러냈다.

 

이탈리아 출신인 카푸아 신부는 성인이 선종할 때까지 3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영어권 신자들이 성인에게 보낸 편지를 번역하고 답장을 써주는 비서 역할을 했다. 19일 그의 방한은 서울대교구 이창진(답십리본당 주임) 신부가 이탈리아 성지순례 중에 카푸아 신부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특히 올해는 카푸친의 작은 형제회 한국 진출 25주년이 되는 해여서 의미가 남다르다.

 

카푸아 신부는 "비오 신부님은 상처 때문에 50년간 고통을 받았지만, 모두의 죄를 위해 기도하고 성사를 베푸신 분"이라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고해소에서 신자들을 맞았고, 특별히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베풀기도 했다"고 말했다.

 

"비오 신부님은 세상 모든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18년 9월 29일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에 손과 발, 가슴에 예수님과 같은 상처를 받으셨지요. 상처에는 늘 피고름이 나왔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그 상처는 신부님이 선종하고 나서야 사라졌습니다."

 

비오 신부가 살던 이탈리아 남부 산 지오반니 로톤도의 카푸친 수도원과 성당은 그 사건 이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주목을 받았고, 각지의 신자들이 모여드는 순례지가 됐다. 순례자들은 성흔에 입을 맞추고 성인에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달라는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병든 이들이 많이 찾았으며, '고통에 대한 위안의 집'이라는 병원이 지어졌다.

 

"신부님은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항상 주님께 은총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어요. 고통의 중요성을 가르친 고통의 스승이셨습니다."

 

3년간 성인과 함께 지냈으니 특별한 기억이 있었을 것 같다는 질문에 카푸아 신부는 "비오 신부님도 우리 일반 수사 형제들과 똑같은 분이셨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반적으로 성인이라면 특별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비오 성인도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하는 수많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 신부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카푸아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젊은 사제 시절 비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봤고, 성인이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것을 계기로 산 지오반니 로톤도에 폴란드 신자들이 많이 찾아온다"며 "순교자와 성인에 대한 공경이 남다른 한국신자들이 비오 성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당부했다.

 

카푸아 신부는 이번 방한에 성인 혈흔이 묻은 헝겊 조각과 장갑 등 유품을 가져와 성인 숨결을 함께 전하고 있다. 그는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와 서울 삼성산성지, 답십리성당, 대구대교구 형곡성당 등을 방문하고 30일 출국할 예정이다.

 

 

- 오상의 성 비오(오른쪽) 신부와 함께 대화하는 젊은 시절의 카푸아 신부.

 

 

독서기도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2&gomonth=2020-09-23&stype=re

삼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2&gomonth=2020-09-23&stype=mi1

육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2&gomonth=2020-09-23&stype=mi2

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2&gomonth=2020-09-23&stype=mi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