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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조 욥 / 아빌라의 성 요한 사제 영적 지도자 / 성 안토니노 주교 학자 / 글로리아 축일 +++

 

 

Job and his False Comforters - FOUQUET, Jean

1452-60.Illumination.Musee Conde, Chantilly.

 

욥기 1,21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 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욥기42,1-6

1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2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3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5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해설]

욥은 욥이요,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바로 이것을 깨달았을 때 욥은 마침내 항복하였으며 기쁨을 찾았다.

욥은 욥이요,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이 간단한 명언은 42,1-6절뿐 아니라 욥기 전체의 핵심 메세지이다.

위의 구절은 길고도 고통스러운 욥의 신앙 여정의 정점이요 욥의 번뇌가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욥은 매우 신심이 깊은 사람으로서 세도가 있고 성공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 있었고 큰 재산을 소유하였으며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사탄은 욥의 신앙에 의혹을 던짐으로써 하느님께 도전하였다.

사탄은 만약에 욥이 그의 가족과 부와 권세를 잃으면 그의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가정하고 하느님께 내기를 걸었다.

 

하느님께서는 욥의 신앙을 시험하는 데 동의하셨다.

서서히 욥은 그의 가족과 재산 그리고 건강까지 잃게 되었다.

겹치는 불운에 당혹한 욥은 처음에는 그로 하여금 이러한 아픔과 고통을 당하도록 허용하시는 하느님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번민에 빠졌다.

 

"왜 내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가?"

라는 질문들에서부터 하느님의 마음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보다 깊은 질문들로 바뀌어져 갔다.

 

하느님의 정의(공평함)는 어디에 있는가?

어째서 사악한 자는 번성하는 반면에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가?

이러한 인간적인 혼란과 갈등이 욥을 의식의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렸다.

그의 내부에서 체험한 불가사의와 모순들은 그의 이해를 초월하는 우주적 문제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욥이 혼란 중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한마디로 "너는 도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신다.

 

하느님의 답변은 자기 방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순에 대한, 즉 욥의 절박하고도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해결도 아니었다.

해답이 없는 것 같은 질문들을 욥에게 되물으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욥이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이끄셨다.

 

하느님의 질문들은 창조속에 제시된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위대함을 지적하였다.

하느님의 위대함에 놀라고 압도된 욥은 마침내 항복하였다.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이전의 그의 지식은 하느님을 직접 만남으로써 극복되었다.

놀라움 속에서 욥은 하느님께 대해 그가 갖고 있던 어줍잖은 가정(假定)들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욥은 더이상 자기 자신의 힘과 인격에 의존하지 않게 되자 그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새로운 확신 속에서 욥은 그의 인간적인 한계를 받아들였다.

 

하느님의 지혜 앞에서 그의 지혜는 무지(無知)임을,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그의 권능은 미약함임을,

하느님의 정의 앞에서 그의 정의는 불공평임을,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사랑은 정말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음으로

욥은 인정하였다.

 

욥은 세상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받아들였다.

욥은 욥이요,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영성수련과 함께 하는 성서못자리 제2권에서)

 

 

 

축일:5월10일

성조 욥

St. Job

San Giobbe

Giobbe = perseguitato, sopporta le avversita, dall’ebraico

 

욥은 ’울부짖는 자’, ’핍박 받는 자’, ’회개한 자’.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이다.

욥은 하느님과 모두에게 인정받은 의인입니다. 그런데 욥은 뜻밖의 재난을 거듭 당하면서 불행한 신세가 됩니다.

이소식을 듣고 엘리바즈,빌닷,소바르 등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서 욥을 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친구들은 막상 욥을 위로하면서 또 한편 욥을 은근히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인 및 우리 모두가 지닌 공통된 사고방식입니다.

 

자신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본 욥은 자신을 비난하는 엘리바즈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욥은 자신이 한번도 하느님의 계명을 거역한 일이 없으며 완전히 결백하다고 주장합니다.  

욥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킨 의인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욥의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때 인간 고통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오늘의 말씀에서)

 

☆프란치스코성인께서 어느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3) 그대가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하고,
    또 형제들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든
    그대를 때리면서까지 방해하는 사람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4)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이 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5) 이것이 주 하느님과 나에게 할 수 있는 참다운 순종이 됨을 아십시오.
    나도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순종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The Patient Job-SEGHERS, Gerard

Oil on canvas, 192 x 242,5 cm.  National Gallery, Prague

 

 

욥기

라틴어 Liber Job   영어 Book of Job

 

욥기의 목적은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곤경 중에 고심하고 있는 인간의 시도인 것이다.

 

일반적 주제

욥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는, 정의로운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소개된다.

욥의 세 친구들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고통 당한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불행에 처하게 된 욥은 있는 힘을 다해 친구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그러나 네 번째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그가 당하는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어 주겠다고 장담 한다.

마침내 야훼가 나타난다.

야훼는 필름의 파노라마와 같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전개하면서 욥이 하고 있는 불평의 경솔함을 질책한다.

이 책은 새로운 축복으로, 고통받는 의인이 첫 번째 행복에로 복원되는 것을 내용으로 종결 된다,

 

저작의 일체성

현재 욥기가 내포하고 있는 복잡성으로부터 교의적인 차원에서의 일련의 동질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즉 불의한 자의 번영에 부딪히고 있는 의인의 고통, 이것이야말로 교의의 중심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동질성은 심리적이고 문학적 차원의 숙고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산문으로 된 서론과 결론은 민담을 형성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1:1-2:13; 42:7-17).이 두 곳에서 욥의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스라는 곳에, 아마도 사해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사는 한 사람의 표본적인 인내가 소개되고 있다(1:1).

 

기원전 587년의 대재앙이 있은 후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의 곤경은 존재에서 모든 가치를 추구하게끔 유도했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그들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가련한 욥에 대해 잘 알려진 이야기(에제 14:14.2)를 사용해서 유배 2세에 속하는 한 시인이

자기의 선임자 에제키엘(기원전 592∼580)의 시와 비슷한 시를 사목적이며 예언적인 목적을 가지고 썼다.

 

그는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영웅과 그의 친구들을 책 속에 등장시켜 존재의 가치를 시적으로 토론하고

인간적 정의(31:35-37)와 신적 정의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토론하게 하였다.

주님 자신이 영웅에게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고 신적 인도를 벌 할 기회를 주지만 욥은 도전하기를 거부하고 단순하게 자기의 자만에 대해 뉘우친다(42:1-6).

 

연대

이 책은 유배 이후에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유배 이후 시대라고 보는 것은 후기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지혜문학이 유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서이다.

기원 전 5세기말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 있는 연대이다. 그러나 산문으로 된 이야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에제키엘은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전설적 현자의 유형으로서 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에제 14:14 - 21).

욥의 역사는 글로써 씌여지기 전에 구전의 형태로서 오랜 기간 동안 돌고 돌았을 것이다.

 

저자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최소한 욥기는 그가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고 깊이 있게 종교적, 윤리적인 정신을 가진 자로서

심리적인 예민함에 대해 숙고할 능력이 있고 불행에 대해 매우 동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아마도 욥 자신은 고통을 몰랐던 자 같다.

많은 내용들은 그가 매우 박식한 자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욥서에 나타나는 상당수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이집트 주위 환경에 대해 종속성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28:1-11, 40:15-41, 9:26, 8:11, 40:11-12).

이 책의 영등은 에도미트 족장이며 그래서 에돔에서 사건이 전개되지만 저자가 유다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Kissane은 "시대는 성조시대이며 장소는 에돔땅이다. 그러나 표현된 사상들은 유배 후기의 팔레스틴의 한 유다인의 사상들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욥의 문제

대화 속에서 욥은 그를 괴롭히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무죄하다고 느끼고 있다.

선은 보상되고 악은 이 지상 삶에서 처벌받는다는 전통적인 교의의 결핍이 확실한 사실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새로운 진리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릴수 있다.

이것이 욥의 세 친구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꺼리낌 없이 전통적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그 가르침이 욥의 경우와 부합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정통성’의 대표적 인물임을 자처한다.

 

그들의 태도는 간단하다. 고통은 죄의 처벌이다.

만일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그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사실들이 순응해야만 한다.

불행한 자 인 욥에게 그들이 가져오는 모든 위로란 욥이 죄인이라는 것을 설득시키는 데 있다.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자기네들의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무죄하고 최소한 그같은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할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욥이 전통적인 관점을 받아들이자 온 세계가 자기 앞에 문제시 되었다.

모든 것이 문제시 된 지금 욥은 자기의 개인적인 경우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절망적인 그의 노력은 별 진전이 없다. 자기의 고통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게끔 유혹당한다.

 

욥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길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신앙의 어두움 속에서 해매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욥의 위대함이란 고통의 심연에 빠져들은 그가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게 하는 도전에 고통들을 갖다놓을 줄 안다는 것이다.

 

토론이 절정에 달할 때, 때 맞추어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욥에게 말하기 시작하신다.

세상 묘사하는 것을 듣고 놀란 욥은 신앙고백과 굴종을 언약한다.(42:5-6)

하느님을 보았다고 욥은 말한다. 그러나 신비는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욥은 죽음 다음에 이어질 보상에 대한 개념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길이란 욥에게는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남아 있다면, 욥은 하느님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제부터 하느님 계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실제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점이다.

인내의 인간 욥은 비산하였다. 그의 위치에서 우리는 참된 욥의 모습, 즉 신앙의 인간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을 보았다.

욥은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그길을 우리가 모르지만 인내와 평화에로 이끌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욥은 구약성서의 시서(詩書)에 속하는 욥기의 저자로 흔히 불린다. 욥기의 목적은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것이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한 하느님께 대하여 자리 매김하려는 시도에 대한 것이다. 욥기는 크게 산문과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문 부분의 바탕을 이루는 본래의 욥 이야기는 이미 기원전 2천년대 말기부터 근동 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일종의 민간 설화로 두루 퍼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기원전 1천 년 이후에 이스라엘에도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에제 14,14 참조). 바빌론 유배 이후, 곧 6세기 말엽 이후, 그리고 3세기 전반 이전에(집회 49,9 참조) 팔레스티나에 살던 어떤 유대인 저자가, 성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욥 이야기를 자기의 의도에 맞게 각색하고 윤색하여 거기에 독창적인 운문 부분을 지어 붙였다. 그러나 이 문문 부분은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다. 저자가 대화 부분의 욥을 통해서 토로하는 말은,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욥기는 욥이라는 특수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보편성이 이 책의 큰 특징을 이룬다. 욥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선택, 시나이 산 계약, 메시아 사상 등 선택된 민족의 특유한 사항이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아울러 유배 이후에 저술 되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성서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예루살렘 함락 - 성전파괴 - 유배”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공통 현상을 바탕으로 자기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욥기는 출발점에서부터 보편성을 뚜렷이 드러낸다. 주인공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그의 거주지도 이스라엘 땅이 아니다. ‘욥’이라는 이름 자체도 당시 여러 나라에서 쓰이던 이름이라고 생각된다(1,1). 욥의 세 친구 역시 모두 외국 이름을 가진 이방인이다(2,11). 욥은 또한 대화를 시작하는 독백에서부터 이미 자기의 고통을 일반화한다. 고통에 처한 자신을 ‘고생하는 이들, 영혼이 쓰라린 이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을 대변하여 하느님에게 질문을 던진다(3,20-21). 물론 대화 중에 욥은 주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펼쳐 간다. 욥기의 저자는 자기의 직접적인 체험을 토대로 처음부터 보편성을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생각을 일반적으로 전개시킨다.

   성 욥에 대한 전례적인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부터 인정되었지만, 단순하고 곧으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욥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욥기',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607-6611쪽. 
(가톨릭홈에서)

 

 

축일:5월10일

아빌라의 성 요한 사제 영적 지도자

St. JOHN of Avila

San Giovanni d’Avila

Born:6 January 1499 at Almodovar del Campo (Ciudad Real), Toledo, Spain

Died:10 May 1569 at Montilla, Spain

Beatified:6 April 1894 by Pope Leo XIII

Canonized:31 May 1970 by Pope Paul VI

Patronage:Andalusia, Spain, Spanish secular clergy

 

 

 

요한은 ’야훼는 은혜로우시다’란 뜻이다.

스페인 알모도바르 델 깜포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4세 때에 법률 공부를 위하여 살라망까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부 대신에 오히려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은수생활을 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3년 후에 그는 알칼라로 가서 도미니코 소또의 문하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베드로 게레로를 만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후 그는 뛰어난 설교가로 이름을 떨쳤고, 안달루시아 지방의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는 겁없이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 등을 꼬집는 설교를 하다가 미움을 받았는데,

결국은 이런 일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투의 극단적인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석방되었고, 명성은 높아만 갔다.

 

그는 스페인 전역을 순회하는 설교를 계속하는 한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그리고 성 베드로 알깐따라의 영적 지도자로서도 활약하였다.

 

그는 몬띨랴에서 운명하고, 1970년에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아빌라의 성 요한은 16세기 스페인 성인들의 대부라고 하며,

데레사 성녀는 나중에

"그를 자기 보호자로 삼고 자기 스승으로 자문을 구하고 자기 길잡이와 본보기로 따랐다"고 진술하였다고 한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축일:10월15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축일:12월14일.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축일:10월10일.

*성 베드로 알칸타라 사제 축일:10월19일.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

제3장 사제 생활

제1절 완덕의 성소

 

완덕을 추구하여야 할 의무

12. 성품성사로 사제들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동화되어, 그리스도의 몸 전체,

곧 교회를 확장하고 건설하도록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봉사자가 되고 또 주교품의 협력자가 된다.

사제들은 이미 세례 축성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성소와 은총의 인호와 선물을 받았으며,

이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연약한 인간이지만 완덕을 추구할 수 있고 또 추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제들은 특별한 이유로 저 완덕에 도달하도록 매진하여야 한다.

그것은 사제들이 성품을 받을 때에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께 축성되고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도구가 되어,

천상의 힘으로 온 인류 사회를 재건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활동을

시간을 통하여 계속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제는

그 나름대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과 하느님 백성 전체에 봉사하면서

자기가 대리하는 그리스도의 완덕을 더 잘 추구할 수 있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는”(히브 7,26)

대사제가 되신 그리스도의 성성으로 인간 육체의 연약함을 고치도록 특별한 은혜도 풍부히 받는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화하시고 축성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바치셔서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건져 내시고 깨끗이 씻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게 되었다”(디도 2,14).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수난을 거쳐 당신 영광에 들어가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도유로 축성되고 그리스도에게서 파견된 사제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육체의 행실을 죽이고 인간 봉사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또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께 받은 성덕 안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진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제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에 잘 따르기만 하면,

성령의 심부름과 의화의 교역을 수행하는 사제들은 그 영성 생활을 튼튼하게 다질 수 있다.

사실, 사제들은 날마다 집전하는 거룩한 전례를 통하여,

마찬가지로 또 주교와 동료 사제들과 친교를 이루며 수행하는 자신의 모든 교역을 통하여

완덕 생활로 나아간다.

한편, 사제의 성덕 자체는 그 교역을 효과적으로 완수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은총은 부당한 교역자들을 통해서도 구원 활동을 이행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성령의 자극과 인도에 잘 따르며 그리스도와 깊은 일치를 이루고 거룩한 생활을 하여

사도와 함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갈라 2,20) 하고 외칠 수 있는

교역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시기를 더 바라신다.

 

그러기에 이 거룩한 공의회는 교회의 내적 쇄신과 온 세상의 복음 전파

그리고 현대 세계와의 대화라는 사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사제에게 강력히 권고한다.

교회에서 권장하는 적합한 방법을 활용하여, 사제들은 언제나 더 높은 저 성덕을 향하여 매진하고,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 봉사하는, 날로 더욱 적절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가톨릭홈에서)

 

 

 

(우표로 보는 성인-최익철신부)


 

축일:5월10일

성 안토니노 주교 학자

St.Antonino

S. Antoninus Pierozz

St.ANTONIUS of Florence

St. Antoninus, Archiep

Sant’ Antonino Pierozzi (di Firenze) Vescovo

Born:1 March 1389 at Florence, Italy

Died:2 May 1459 at Florence, Italy

Canonized:31 May 1523 by Pope Adrian VI

Antonino (come Antonio) = nato prima, o che fa fronte ai suoi avversari, dal greco

= been born before, or that ago forehead to its adversaries, from the Greek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 주교 학자

S. Antoninus Pierozzi (1389-1439)

 

안토니노는 1389년 3월 1일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피에로지였는데, 허약한 체질 때문에 친숙한 별명으로서 “안토니노“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토니노는 ”작은 안토니오“라는 뜻이다.

그러나 안토니노의 생애는 위대한 영혼의 삶이었으며, 광대하고 조직적인 악에 대항한 덕의 승리였다.

 

안토니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계시적인 이야기 하나가 알려져 있다.

그는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의 약함을 걱정했던 계모는,

식사 때에 그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기를 주었다.

그런데 수도생활을 결심한 이 어린 소년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그 자기의 고기를 식탁 아래의 고양이들에게 몰래 주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려는 꿈을 키웠다.  

 

그가 16살이 되던 어느 날,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라는 수도원의 대성당에서,

요한 도미니치의 설교를 듣고 커다란 감동을 받게되었다.

그는 그 위대한 설교자를 찾아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요한 도미니치는 피렌체 근처에 있는 피에솔레에서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는

젊고 열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개혁 수도원을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도회는 엄격한 규율 준수를 위한 수도원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안토니노는 이렇게 엄격한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게 보였다.

요한 도미니치는 열망에 찬 이 젊은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였다.

 

그는 안토니노에게  “데크레툼; Decretum (그라씨아노 수사가 하나로 재 편찬한 교회의 법령집과 규범들)"

이라는 방대하고 어려운 책을 외워 오라고 말했다.

이 책의 분량과 겉모양이 이 젊은이의 기를 꺾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안토니노는 강철같은 의지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집에 가서 그 책을 외우기 시작했고 해가 질 무렵에 이 불가능한 일을 마쳤다.

그리고 요한 도미니치에게 돌아와, 그가 요구했던 대로 이를 암송했다.

그가 수도복을 받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 약한 젊은이는

1405년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를 했으며 54년 동안 훌륭한 수도자로서 살았다.

 

 

 

안토니노는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치고 141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수도생활을 살며, 열심히 공부를 하여서 명성 높은 교회법의 학자이자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수도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서 신중함과 결단력 높은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폴리뇨, 피에솔레, 나폴리, 카르토나, 로마, 피렌체, 등의 도미니칸 수도원들의 원장으로 봉사하게 되었고

특히 1436년부터 1444년까지 피렌체의 성 마르코 첫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의 지도와 격려로 성 마르코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예술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오랜 동료인 프라 안젤리코와 세밀 화가였던

프라 베네데토에 의해 프레스코화와 성가 책들이 그 수도회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 마르코 수도원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첫 공식적인 공공도서관을 열었다.

그리고 안토니노는 1437-1447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설교자회 수도원들의 대리구장이 되었다.  

 

그는 1439년에 피렌체의 공의회에 신학자로서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가 주관한 성 마르코 수도원의 공사를 마칠 때인 1441년 주님 공현 대축일에

친구인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직접 수도원의 성당을 축성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죽음에 임박하자 절친한 친구인 안토니노를 부를 만큼 안토니노를 존경하고 있었다.

겸손한 안토니노는 교회 고위 성직자를 원하지 않았지만, 교황은 그의 거룩함과 유식함,

그리고 신중함을 잘 알았기에 1446년 3월 13일에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 임명이 기도와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갖기를 원하는 겸손한 학자에게는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였지만 피렌체 시민들에게는 축복이었으며, 그들은 행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대주교로서의 안토니노는 피렌체 공화국 지도자들, 특히 메디치의 코시모와 에우제니노 4세,

니콜라오 5세와 비오 2세 교황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평화의 대사로서 일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과 피렌체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그는 13년 동안 피렌체의 대교구를 개혁시키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끊임없는 기도속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지혜의 은사를 받은 안토니노는 다른 사람들을 조언과 상담으로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었으니

“조언의 안토니노”라고도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윤리 신학집(Summa Theologia Moralis)”을 비롯하여 훌륭한 많은 책들을 썼는데,

이들 모두는 실용적인 내용으로 윤리신학에 대한 것과,

고해신부를 위한 지침, 세계사의 연대기(Chronicon),등 그 밖의 여러 실용적인 주제들을 다룬 것들이다.

 

 

 

 

안토니노는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친절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때 부유한 도시 피렌체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원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줌으로서, 살림을 담당했던 이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그 도시의 가난한 이들과 직접 만났고, 특히 부유하다가 파산하여 구걸하게 된 이들도 만났다.

오늘날의 빈첸시오회처럼 남모르게 자선 사업을 하는 것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성 마르띠노의 선인들”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특히 흑사병이 피렌체에 퍼졌을 때,

그는 모금활동과 병자 돌보는 일로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59년 5월 2일에 안토니노는 성 마르코 수도원의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온 도시의 탄식 속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교황 비오 2세가 그의 장례식을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8일 후에 장례식을 주례했다.

지금까지 그는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의 시체가 썩지 않고 남아있다.

“다스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의 마지막  이 말은 그의 온 생애를 잘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1523년 5월 31일에 교황 아드리아노 6세에 의해서 시성 되었고 축일은 5월 10일이다.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는 훌륭한 도미니칸의 수도자이며 사제, 그리고 모범적인 주교였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었으며,

성 도미니코를 본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충실하게 복음적 권고를 지켰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였으며, 특히 성체성사와 성모 마리아에게 대한 깊은 신심이 있었다.

 

그리고 겸손하고 엄격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좋은 설교가와 교리학자이었으며, 당시의 종교적인 타락을 막고,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지혜의 은사를 가지고 성령의 빛으로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여 하느님께로 이끌었다.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안토니노 삐에로찌는 1405년에 설교회에 입회하여,

40여 년 동안 이탈리아의 도미니꼬회 수도원을 전전하며 훌륭한 수도자로 살았다.

그는 대부분의 수도 생활을 수도원장으로 지냈으나 두 차례나 관구장을 역임하였다.

1436년 플로렌스에서 그는 고시모 데이 메디치의 재정 지원으로 산 마르코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유명한 화가 프라 안젤리꼬가 벽면을 장식 하였고, 르네쌍스 인본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1446년, 안토니노는 플로렌스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불굴의 정의감과 넘쳐흐르는 사랑으로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도록 자주 초빙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언제나 교구민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그 자신이 단순한 생활과 모범적인 처세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교구를 순회하여 강론하였으며,

그로부터 물적, 영적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와 경제 발전에 대한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

국가는 공동선에 기여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아드리아노 6세 교황이 시성하였는데, 교회 개혁에 대한 그의 이상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는 자고로 수많은 유명한 미술가, 정치가, 문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도시로서 알려져 있지만,

그뿐 아니라, 그시에서 자라난 성인도 결코 적지 않다. 성 안토니오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플로렌스 시의 피에로찌 가문에서 태어난 것은 1389년의 일이었다.

세례 때에는 저 유명한 파도바의 성인을 따라 안토니오라고 이름지었다.

그런데 그는 본래 키가 작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토니오 즉"작은 안토니오"라고 불렀다.

그는 체구는 작았을망정 지혜나 의지등의 정신력에 있어서는 강해

학문이나 덕행의 면에 있어서 일찍부터 현저한 진보를 보였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6월13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

*복자 프라 안젤리코 수도자 화가 축일:2월18일.

 

 

15세 때에 도미니코회의 유명한 설교가 도미니티 신부의 강론을 들은 그는 비상한 충격을 받아

수도자가 될 결심을 하고 수도회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도미니티 신부는 "그라시아노 교회법을 다 외우고 난 다음에 ..."하고 타이르며 그를 일단 집에 돌려 보냈다.

그라시아노 교회법이라 하면 극히 중요한 서적이기도 하고, 내용도 지극히 어려웠으므로

소년으로서는 도저히 외우지 못하리라고 도미니티 신부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1년이 지난 다음 안토니오는 피에솔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신부를 찾아가

"말씀하신 대로 공부를 하고 왔으니 시험해 보십시오"하고 간청했다.

도미니티 신부는 여러 가지를 질문해 본 결과 교회법을 전부 암송할 뿐 아니라 다른 질문에도

막힘이 없이 대답을 하므로 그의 용기와 머리 좋은 점에 감탄하고 그의 입회를 쾌히 허락했다.

 

수도자가 된 안토니오는 성덕에 있어서 수도원의 모범으로 공격을 받고 얼마 안 되어

로마에 있는 미네르바 대수도원의 원장으로 추천되고,

그의 폭넓은 학식 또한 교황에게 인정을 받아 로마 공소원의 참사회원에 임명되었으나,

곧 고향인 플로렌스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자 신학고문으로서 이에 참석했다.

이 같은 인물이었으므로 플로렌스 대주교가 서거하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로 부터 그 중직에 취임하라는

명령을 받게된 것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마침 안토니노는 시칠리아 섬의 수도원을 시찰하러 가 있었으나 자기가 대주교로 추천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중책을 모면하려고 살디니아섬으로 피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도 교화의 명령이 이미 도착했으므로 그도 할 수없이 순명으로 취임을 승낙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그가 얼마나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였던가를 가히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안노티노는 대주교가 되었어도 결코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들의 후계자는 덕행 외에 아무런 재산도 가져서는 안된다."하며

그 직분에 따르는 모든 수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교회 유지비와 빈민의 구제비로 돌리고

자기는 여전히 수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난한 고행의 생활을 감수했다.

그리고 성실한 사람에게는 봄날과 같은 자애의 빛을 보였지만,

악에 물들어 고칠 줄 모르는 이에게는 추상과 같은 엄격한 태도로써 대했다.

당시 플로렌스에는 도박이 유행하여 그로 인해 재산을 낭비하고 집을 망쳐 거지로 몰락되는 이가 많았었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 그 악습의 근절을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안토니노는 똬한 대주교로서 분주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주 강론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교훈을 받으러 오는 이에게는 기꺼이 이를 지도하고 기도와 묵상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므로 플로렌스 공화국의 대통령 고스마스 메지티가

"플로렌스의 번영은 무엇보다고 우선

안토니노 대주교의 열심한 기도 덕분이다"라고 말한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의 지극한 자비심이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1448년 플로렌스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와,

1453년 대지진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일 것이다.

그때 그는 대주교로서 받는 수입으로써는 도저히 안 되었으므로 많은 부호와 명사들을 찾아 다니며

기부금을 모집하여 그것으로 병자와 이재민을 구제했다.

그러므로 시민들은 누구나 안토니노를 대통령보다 더 존경하며 사모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수많은 저서가 있어 그의 재능과 활동이 얼마나 다방면이었던가를 증명해 준다.

 

이처럼 대주교로서 힘든 직무를 맡아보기를 12년, 안토니노는 나이도 많아지고 몸도 쇠약해져서,

1459년 5월 2일 잠자듯이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축일은 교회의 제정에 의해 5월 10일 지내게 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도미니코 사제

축일:8월8일.

 

도미니코 수도회(도미니코회, 道明會) 또는

설교자들의 수도회 (설교자회,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 ):

수도회의 모토는 "진리를 관상하라 그리고 전한다"(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입니다.

*도미니코 수도회 홈에서

 

 

 

 

암기

 

성 안토니오는 작고 연약한 소년이었지만 수도 생활을 몹시도 갈망하였다.

그는 15살 되던 해에 산타마리아노벨라에 있는 수도원에 찾아가서 입회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수도원장은 힘든 수도 생활을 하기에는 안토니오가 너무 허약해 보여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낙담해서 돌아서는 소년의 모습이 딱해서

<은총에 관한 교령>을 외우면 입회를 고려하겠다고 말했는데,

놀랍게도 안토니오는 1년 만에 그것을 다 외우고 입회를 허락받았다.

 

암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당시에 외우려는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나 성구를 잘 외우는 사람이 있고 영화나 연극의 대사를 즐겨 외우는 사람도 있다.

또 유명인의 연설이나 좌우명을 줄줄이 외우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외우려면 항상 곁에 두고 자주 보아야 한다.

성구를 외우려면 우선 성서를 가까이 두고 자주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한다.

그리고 그 구절의 내용이 완전히 마음에 새겨지면 한 줄씩 외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잘 외워지지 않더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다 보면,

당신도 모르는 새 그 구절이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혼에 힘을 주는 성서 구절을 외우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Madonna in Glory with the Child and Saints-PERUGINO, Pietro

1495-96.Oil on panel, 152 x 124 cm. Pinacoteca Nazionale, Bologna

 

축일:5월10일

글로리아.GLORIA

 

성바오로수도회홈(www.paolo.net) 에서

 

[글로리아] 는 영문 표기로는 [GLORIA] 라고 쓰는데 이것은 [주님께 영광] 또는 [영광의 찬가] 라는 뜻이지요.

세례명은 보통 성인의 이름으로 정합니다만

글로리아의 세례명처럼 우리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뜻을 지닌 단어로도 정하기도 한답니다.

 

예를 들면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을 지칭하는 ’스텔라(Stella)’라든가,

깨끗하고 고결한 성모님을 나타내는 릴리안(Lilian) 혹은 릴리아나(Liliana),

아름다운 장미에 비유되는 로즈마리(Rosemary = 로사 - Rosa라는 장미와 성모 마리아 - Maria의 합성어),

기쁨을 나타내는 "가우디", 또한 최근에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축일’이 있었는데, "인노첸사 = 무죄함, 순결함"의 의미를 살려서 ’인노첸사’라는 세례명을 가지기도 하지요.

 

위와 같이 글로리아 세례명은 특별한 뜻을 지닌 세례명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이라고 사료되며,

축일은 [5월10일] 로 지내시기 바라며

그 특별한 [영광] 의 의미를 잘 살려서 매사에 다음의 성서 말씀처럼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러내는 착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hrist Glorified in the Court of Heaven- ANGELICO, Fra

1428-30 Tempera on wood, 32 x 63,5 cm National Gallery, London

 

 

(시편 26:8)

야훼여, 나는 당신께서 사시는 집이 좋사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들이는 곳이 좋사옵니다.

 

(시편 62:7)

내 구원 내 [영광]은 하느님께 있으니 그분은 나의 힘이신 바위, 나 하느님께 피신 하리라.

 

(시편 71:8)

나의 입은 당신께 향한 [찬양]을 가득 담았고, 날마다 당신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시편 72:19)

영광스런 그 이름, 길이길이 [찬미]받으소서. 그 영광 온 땅에 가득히. 아멘  

 

(시편 73:24)

나를 타일러 이끌어 주시고 마침내 당신 [영광]에로 받아 들여 주소서.

 

(시편 79:9)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당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의 죄를 없애시어 우리를 건져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