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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 기념일 +++







축일:5월11일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OFM Cap.
Sant' Ignazio da Laconi Frate cappuccino
Laconi, Nuoro, 17 novembre 1701 - Cagliari, 11 maggio 1781
Etimologia: Ignazio = di fuoco, igneo, dal latino
Saint Ignatius of Laconi
Born : 17 December 1701 at Laconi, Sardinia
Died : 11 May 1781 of natural causes
Venerated : 26 May 1869
Beatified : 16 June 1940
Canonized : 21 October 1951 by Pope Pius XII
October 21, 1951 marked the date of the Canonisation of Ignatius of Laconi, Capuchin Lay Brother.

 

 

성 이냐시오는 1701년 12월 10일

사르디니엔 지방 라코니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착하게 보내다가,

1721년 카푸친 형제회에 평형제로 입회했다.

 

카글리아리에서 40년 가까이 애긍을 모으는 형제로 살았다.

이 때 세상에 겸손과 성덕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가 이룬 많은 기적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를 기적을 이루는 이로 찬양하였다.

17881년 카글리아리에서 선종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이냐시오 빈첸시오 페이스(Ignatius Vicentius Peis)는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섬의 라코니에서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들에서 힘든 일을 하며 자랐고 17살 때에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자 살아나기만 하면 수도자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살 때 그는 자신이 몰던 말을 통제하지 못하고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멈추고 조용히 걷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셨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수도성소에 응답하여 부온캄미노(Buoncammino)에 있는 카푸친회에 평수사로 입회하여 1722년에 서원을 하였다.
 

   그는 주로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애긍한 것으로 동료 수도자들을 도왔는데 그 일을 거의 40년 동안이나 하였다. 그는 병들거나 외로운 이들을 위로하고 거리의 아이들을 격려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 이냐시오 수사로부터 오히려 선물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고 죄인들을 회개시키며 문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그는 일부로 한 악덕 대금업자의 집을 들르지 않고 건너뛰었는데, 이를 알고 그 대금업자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장상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장상은 성 이냐시오를 그 집으로 보냈고 그는 배낭에 음식을 가득 넣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배낭이 텅 비워졌을 때 그곳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자 성 이냐시오는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입니다”라고 한 후 조용히 설명하기를 “이것이 제가 그 집에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이유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심을 지닌 그는 부드럽고 천진난만한 성품으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잔꽃송이에 버금가는 행적을 쌓았다. 그는 1951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홈에서)
 


 

이냐시오 빈첸시오 페이스는 사르디니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20세 되던 해에 카프친회에 들어갔다.

 

주로 문전걸식을 하여 얻은 애긍으로 동료 수도자를 도왔는데,

그는 이 일을 거의 40년 동안이나 하였다.

 

그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심을 지녔고,

그의 부드럽고 천진난만한 성품은 성 프란치스꼬의 잔꽃송이에 버금가는 행적을 낳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1975, 분도출판사)

 

이 책은 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에 관한 일화와 여러 이야기들을 엮은 것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총 53장으로 되어 있으며,

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몇몇 동료에 관해 수집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제2부는 "성 프란치스꼬의 오상에 관한 몇 가지 고찰"이라는 다른 제목을 갖고 있다.

이 부분은 단지 5장으로 되어 있으나,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에 가장 빼어난 사실 중의 하나인 오상에 관해 아주 상세히 말해주고 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잔 꽃송이’는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전기 가운데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인은 단순하고 순박한 분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인간의 단순함과 소박함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보기를 좋아했다.

 

성프란치스코는 복음 성서의 한 구절에서

"어린아이 같은 자라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르10.5)라는 구절을 특히 좋아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

 



 '길거리의 전도자'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가난의 맛도 신앙심의 맛도 잘 알다
어려서부터 가난을 경험해야만 했고 거지의 생활양식은 그의 평생 직업선택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인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아들이 된 가난한 농부 마티아 페이스(Peis)의 친아들이었던 이냐시오 성인(1701-1781)은 이탈리아의 경기도의 두 배 정도 되는 큰 섬인 사르데냐(Sardinia)의 라코니(Laconi)라는 마을에서 9명의 자녀 중 둘째로 1701년 12월 8일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산나(Sanna)는 그를 임신 중에 여러 어려움들을 만났고, 그 때 마다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도록 회복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중에 있는 아이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 봉헌하며 프란치스칸 수도회에 들여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프란치스코 이냐시오 빈첸시오는 그 아이의 세례명이었으나 라코니에서는 그저 빈첸시오라고 불렸다.

빈첸시오의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용하고 열심히 일하는 농부였고 좋은 모범으로 자녀의 신앙생활에 본을 보여주었다. 매일 아침에 성당에 다녔고 가족과 함께 매일 저녁에 묵주기도 바치곤 하였다. 신앙심 깊은 그의 어머니는 빈첸시오에게 기도와 교리를 가르쳤다. 빈첸시오는 비록 몸은 약했지만 성당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부모를 도와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기적으로 식량을 공급한 적 있었지만 무서운 놀이 친구였다!
마을 주민들은 빈첸시오가 어릴 때부터 그토록 많이 기도하고 성당을 '내 집'이라고 일컫곤 하니 그 아이를 '작은 성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평생 수많은 기적들로 유명해질 비첸시오, 증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몇몇 아이들을 막대기로 가리켜 '너는 하늘나라에 가게 될거야.' 하곤 하였는데, 신기하게도 그 아이들은 며칠 이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빈첸시오 어린이의 놀이 친구가 되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꾼들에게 줄 음식이 모자랐을 때, 빈첸시오는 아버지께 음식이 충분할거라고 설득했고, 마침내 모두가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남은 음식을 포장하여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미루어진 성소
그의 가족은 빈첸시오를 만 7살의 어린 나이에 견진성사와 첫영성체를 받게 하였고, 1707년 5월 17일, 그가 수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는 관상 생활에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고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성소에 대해 솔직히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주는 빈첸시오가 수도자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그는 몇 차례 심각하게 병을 앓게 되었고 그 때 마다 병이 낫게 되면 카푸친 형제가 되겠다고 약속했으나 회복 되어 살아난 뒤에는 잊어버리곤 했다.
 



결국 '착한 길'에 나서다
그러던 중 20세 때 말에서 떨어져서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그것이 하느님의 도우심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아버지와 함께 사르데냐 섬의 중심 도시격인 남쪽 끝에 자리한 칼랴리(Cagliari)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사르데냐' 관구 봉사자를 찾아 갔다. 그 형제회는 성 안토니오 형제회였고 칼랴리에서 부온카미노(Buoncamino - 착한 길)이라 불리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기대와는 다르게, 빈첸시오의 신체적 허약함을 본 관구 봉사자는 차갑게 그의 요청을 불허했다. 아주 엄격하고 금욕적고 힘든 카푸친 수도생활에 부적합 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을 돌봐주는 고향 라코니 지방의 후작에게 도움을 청하여 마침내 그의 도움으로 평형제로 수도회에 받아 들여져 1721년 11월 10일, 외딴 산 베네데토 아빠테(San Benedetto Abbate)의 카푸친 수련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 ‘이냐시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카푸친 수련기 생활은 순풍에 돛 단 듯 언제나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수련자로서 그는 다른 동기들보다도 훨씬 열중하였고, 침묵과 순종, 겸손과 섬김에 착실했으며 성사와 여러 신심 생활에도 뛰어났다. 심야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는 자주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모님께 오래 동안 다정하게 이야기하곤 했고, 제아무리 작은 규칙들이라도 회칙에 관해선 모두 빠짐없이 완수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엄격한 수련기는 순풍에 돛 단 듯 그렇게 언제나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한번은 물 한 항아리를 들고 위층으로 옮기는데 그 항아리가 너무 무거워서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계단 위쪽에 위치한 성모 성화를 향해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때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이 얼마나 큰 수난을 당해야 하셨는지에 대해 상기시켜 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성모님의 든든한 동반과 예수님의 모범은 이냐시오 형제에게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요리사와 직공
1년 후 1722년, 이냐시오 형제는 서원을 서약했고, 요리사와 옷감 제작 소임을 맡게 되어 15년 동안 그것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가 요리사였을 때 한번은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형제회 식품창고 열쇠를 우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동정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이 있었던 이냐시오 형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성모송 3번을 바친 다음 두레박을 다시 끌어 올렸는데 신기하게도 그 안에 열쇠가 있었다. 요리사로서의 소임을 마친 이냐시오 형제는 새 소임을 맡았는데 그것은 도읍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동냥하는 일이었고, 향후 40년 동안 그는 칼랴리의 부온카미노에 있는 형제회의 형제들을 위해 음식과 여러 필요할 것들을 구걸하며 살게 되었다.


그의 여전한 모습
배운 것이 없어 읽고 쓸 줄 몰랐던 그는 심한 사투리와 엉망인 문법을 구사했으나 칼랴리 시민들의 사랑, 특히 청소년들의 사랑을 톡톡히 받았으며 그들과 아주 친숙했다. 다른 형제들이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수도복을 입을 때 자신은 (봉사자의 허락을 받아) 여전히 거친 양털로 만든 낡아 빠진 수도복을 입고, 흰 수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구걸 자루를 어깨에 메고, 한손엔 Y자 모양으로 갈라진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손에는 묵주를 든 그 모습으로 늘 겸손히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매일 매일 길거리로 나와 구걸했으며, 구걸하면서 만나게 되는 청소년들에게 하느님과 성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성이나 시복을 받은 카푸친 형제들은 그에게 영감이 되는 모범들이었다
성인품과 복자품에 오른 카푸친의 모든 형제들이 그에게 큰 영감이 되었는데, 특히 그는 '식마링겐의 성 피델리스'같은 순교 성인들, 즉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 사람들이 지닌 용기와 그 지조를 높이 샀다. 그들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거룩한 부러움으로 들었고 그들을 본받기를 열렬히 소망했으며, 자신도 그들처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피를 흘리기를 바란다며, 그들의 죽음과 행적에 깊은 감동으로 탄식하곤 했다. 또한, 성체에 대한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의 신심에서도 크나큰 영감을 받아 하느님의 대한 그 성인의 타오르는 사랑을 자신의 '차가운' 상태와 자주 대조하곤 했고, '코를레오네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겸손과 인내심 또한 열렬히 본받으려는 자신의 소망을 크게 드러내기도 했다.


이냐시오의 겸손과 자기 죄에 대한 자각
이쯤 되자 사람들은 이냐시오 형제의 거룩함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주 극빈층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부족한 것에서 자선 행위 차원이 아닌 이냐시오 형제를 향한 개인적 존경심에서 형제회에 필요한 음식이나 물품들을 기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필요할 때 부탁하겠다는 말로 그것들을 극구 사양하였고, 오히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존경심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려고 했다. 자신의 죄스러운 상태와 하느님 자비의 필요함을 늘 잊지 않았으며, 글을 모르는 자신의 한계를 잘 의식하여 불필요한 허영을 피하고자 했다.      

사람들은 그를 '거룩한 신부님(Padre Santo)'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는 그 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나 야비한 놈" 혹은 "아무 일에도 쓸모없는 카푸친들의 당나귀"라고 칭했으며, 늘 자신을 "야비하고 쓸모없는 죄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쩌다 사람들한테 욕을 먹었을 때 "드디어 칼랴리에는 나를 너무도 잘 알고, 나를 있는 그대로 부를 줄 아는 사람이 하나 있구려!"하며 기쁘게 외치곤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의 기적들에 대해 열광의 함성을 지르면 "쉿! 쉿! 이 일은 주님의 일이니까." 라고 타이르곤 했다. 
 



성 이냐시오의 기적의 '잔꽃송이'
그러나 위에 그가 한 말을 무시한 채, 이냐시오 형제에게 일어난 몇몇의 기적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동네에 고리대금업자(부당한 이자를 챙기는 현대의 악덕 사채업자)가 있었는데 이냐시오 형제는 그 집을 그냥 지나쳐 가곤 했다. 그 사채업자는 이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느껴서 고리대금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이냐시오 형제의 봉사자에게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서 봉사자는 이냐시오에게 그 집에서도 구걸을 하라고 명했다. 이냐시오 형제가 그 집에서 구걸한 뒤 귀가해서 구걸 자루를 비우자 그곳에서 핏 방울이 떨어졌다. 이냐시오는 이것을 보고 "이것은 가난한 이들의 피이며 그래서 나는 그 집에서 그 어떤 것도 청하지 않았어요."라고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채업자는 회개하여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했다.

또, 우유에 물을 타서 양을 불려 파는 우유장수가 있었는데, 그에게 구걸한 우유를 이냐시오 형제의 자루에 넣었더니 우유에 포함된 물의 양만 자루에서 빠져나와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은 아무것도 구걸하지 못하여 동료 형제와 함께 빈 자루를 매고 귀가했다. 오는 도중에 길에서 돌을 주어 자루에 채웠는데, 어깨에 매고 오는 중에 자루에서 따뜻한 열기가 전해져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루를 열어보니 과연 돌 대신에 갓 구워진 빵이 굴러 나왔다.


 

한번은 올리브 기름장수에게서 기름을 구걸한 적이 있는데, 기름장수가 장난으로 기름을 담을 병이 없다며 그의 구걸 자루에 기름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 자루는 기름같은 액체를 담으면 다 새어버리는 자루였다. 하지만 이냐시오 형제는 한 방울의 기름도 새지 않은 채 그 자루를 형제회로 가지고 갔고, 이것을 본 기름장수는 너무 감탄하여 그 기름통 전체를 형제들에게 기증했다.

또 한 번은 양치기에게 치즈를 구걸 했는데 거부 당했다. 이냐시오 형제는 '인내심!'이라고 중얼거린 뒤 어깨를 으쓱이며 제 갈 길을 갔다. 그러자 기증을 거절당한 그 둥근 치즈가 스스로 바퀴처럼 굴러 이냐시오 형제의 뒤를 따라갔다. 이것을 본 양치기는 그 치즈와 함께 더 많은 치즈를 기증했다.

어느 날, 이냐시오 형제가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였다. 마침 한 일꾼이 성모상을 꾸미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높이 올라갔다. 그 일꾼은 미끄러져 그만 사다리에서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이냐시오 형제가 큰 소리로 "멈춰!"라고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일꾼은 공중에 그대로 멈추게 되었고, 이냐시오 형제가 사다리를 그의 발 밑에 옮겨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대로 정지된 상태였다. 

임산부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이냐시오 형제는 임산부들이 아기를 무사히 낳고 건강하게 기를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임산부들이 먹고 싶어 하는 과일을 제 계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소매에서 신선한 과일을 꺼내어 주곤 했다.


독자적인 증인
이냐시오 형제의 기적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타종교 외국신자들도 많아서 더욱 믿을만했다. 예를 들면 당시 사르데냐에 주둔해 있었던 오스트리아 개신교 군사들을 위해 사목 활동을 한 어느 목사가 쓴 책 (사르데냐 - 독일어, 1780년 작)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우리는 오늘날 여전히 교회안에 살아있는 기적들을 접하며, 그에 대한 믿음을 누리는 행운을 가졌다. 우리는 매일 매일 도시안에서 구걸하러 다니는 살아 있는 성인을 본다...그리고 그 상당히 많은 기적들 때문에 그는 동포들에게 존경을 얻게 되었다."


활동으로 표현된 믿음
이냐시오 형제의 기적들은 그의 신앙생활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의 신앙생활은 그의 열심한 기도생활의 결과였다. 이냐시오 형제의 말은 비록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신앙적 시각을 반영했다. 그에게 위로를 받으러 오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라는 말로 조언하였으며, 아픈 이들을 위로했고, 외로운 이들의 말벗이 되어 주었으며 거리의 아이들을 격려했다. 또한 근심에 찬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었고, 죄인들을 회개시켰으며 서로 원수가 된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게 해 주었다.


신기한 처방전들
이 수많은 사례들에서 보듯이 '거리의 전도자' 라는 그의 사도직 안에서 하느님의 치유의 힘이 흘러 나왔다. 사람들의 병을 고칠 때에 이냐시오 형제는 이상한 약들을 처방하곤 했다. 그의 손에서는 딱딱한 빵 부스러기들이나 말린 무화과 열매나 레몬 껍질이나 삶은 계란도 강력한 약제가 되었다.



비천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망각 속으로 묻혀버려야 합니다
'거리의 사도' 이냐시오 형제는 그의 마지막 생애 2년간 비록 앞을 못 보게 되었을 때에도 죽기 2~3 개월 전까지 구걸하는 사도직에 충실했다. 선종하기 전, 프란체스코 마싸(Massa)라는 화가가 몰래 눈먼 이냐시오 형제의 초상화를 그리러 왔을 때에 이냐시오 형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초상화로 그려질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비천한 사람들은 그려진 초상화를 결코 가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망각 속으로 묻혀버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매우 가까이 지냈던 그는 예수님과 함께 1781년 5월 11일, 금요일 오후 3시, 칼랴리 부온카미노에 있는 성 안토니오 형제회의 양호실에서 임종하였고, 천사들의 마리아 경당 옆에 따로 마련된 지하성당에 묻혔다. 그의 비석에는 '거룩한 갈채와 함께'라는 비문이 씌어있다.  


 

거룩한 카푸친의 동냥자 시신 2구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과 수도회들에 대한 탄압과 같은 큰 정치적 사건과 형제회 내부의 상충되는 이견들로 인해 1844년 7월 16일까지도 이냐시오에 대한 시복운동이 시작되지 않다가, 1940년 6월 16일,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1951년 10월 21일, 같은 교황에 의해 비로소 성인품에 올랐다.

200년 후,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일을 해왔던 제스투리(Gesturi)의 복자 나콜라오(1882 -1958)의 시신도 성 이냐시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그 곳 같은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제스투리의 복자 니콜라오(+1958) 축일 : 6월8일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 인준받은 회칙 1:1

 

“우리의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복음을 최고의 법으로 따르고
구원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처럼 우리 마음에서 새깁시다.”  -카푸친 회헌 1:6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던 작은 형제회의 최후의 개혁으로서
1528년 교황님의 인준을 받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기도와 가난과 더욱 작음으로써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의 생활양식을 할 수 있는 만큼 닮으려고 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