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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 판크라시오 순교자 / 헤르첵 노비의 성 레오폴드 사제 /성네레오와 성아킬레오, 성 도미틸라 순교자 기념일 +++

 

축일:5월12일

성 판크라시오 순교자

Saint Pancras

St.Pancratius

San Pancrazio Martire

Died:beheaded c.304 at Rome

Pancrazio = lottatore, dal tipo di sport greco

=lottatore, from the type of Greek sport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보며,

그의 무덤은 비아 아우렐리아에 보존되어 있다.

심마쿠스 교황은 그의 무덤 위에성당을 세웠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Sermo 17 psalmun Qui habitat, 4, 6: Opera omnia 4, 489-491)

 

환난중에 나는 그와 함께 있다.

 

"환난중에 나는 그와 함께 있다."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내가 환난말고 다른 무엇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그분은 또 "나는 그를 구하여 영화롭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 내 행복은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고, 그에 더하여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환난 중에 나는 그와 함께 있다"."내 기쁨은 사람의 자녀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신다.

따라서 주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마음 상한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내려오십니다.

또 "우리가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여정의 동반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우리가 노력한다면

후세에 본향에 들어가게 하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길이 되시듯이 그때 우리의 본향이 되실 것입니다.

 

주여, 나에게는 당신과 함께 환난을 당하는 것이

당신 없이 다스리고 당신없이 화려하게 지내고 당신 없이 명예를 즐기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여, 나에게는 환난 중에 당신과 더 밀접히 결합되어 불가마 속에서 당신을 모시는 것이

비록 하늘 나라라 할지라도 당신 없이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나에게는 천국 외에 무엇이 있고, 지상에서 당신 외에 또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금은 용광로 속에서 단련되고 의로운 사람은 환난의 시련 속에서 단련됩니다."

주여, 당신은 그 곳에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당신이 옛적에 세 젊은 이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 있는 바로 그 곳에 계십니다.

 

우리가 왜 두려워 하고 왜 설레이며 왜 이 불가마에서 도망쳐야 하겠습니까?

불은 맹위를 떨칩니다. 그러나 주님은 환난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맛서겠습니까?"

더욱이 그분이 우리를 구하시는데 누가 그분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겠습니까?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탈취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데 누가 망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오랜 세월로 그를 가득 채우리라." 이 말은 흡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목말라 하며 무엇이 그를 즐겁게 해주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금이나 은 덩어리를 기뻐하지 않고 쾌락이나 지식의 획득 또는 어떤 세속적인 품위도 즐거워 하지 않는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손실로 여겨 내던져 버리고 쓰레기로 여긴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자기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에다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

그는 자기가 누구의 모상으로 지음받았는지 알고 있고 얼마나 큰 것을 이룰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가장 큰 것을 이룰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가장 큰 것을 잃어버림을 뜻하는

그런 작은 것에 대한 집착을 피한다.

 

그러므로 나는 참된 빛으로써만 충족될 수 있고 그 영원성으로써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람을

"오랜 세월로 가득 채우리라."

실상 그 지속은 끝이 없도 그 광채는 쇠함이 없으며 그 만족은 결코 싫증이 나지 않는다.

(가톨릭홈에서)

 

 

 

시리아 태생인듯한 그는 일찌기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로마에 살던 삼촌에게 맡겨졌다.

그는 여기서 삼촌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이때 그는 불과 14세의 나이였다.

그는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크리스챤 박해때 로마에서 참수치명하였고, 칼레포디우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런던에 있는 성 판크라시오 철도역은 우리가 그에 대해 거의 아는것이 없는

초기 그리스도인 순교자에게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중에 14세의 어린 나이로 순교했다고 한다.

그는 후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동 묘지에 묻혔다.

 

교황 대그레고리오는 그곳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세웠고,

베네딕토회 회원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에 오자 그는 자기가 세운 첫 교회에

판크라시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철도역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판크라시오는 와이스먼 추기경의 소설인 ’파비올라’에서 소설화 되어 나타난다.

독일 농부들은 이름이 비숫한 세 성인들,

즉 판크라시오,세르바시오,보니파시오를 그들의 축일이 5월 12,13,14일인데도

계절에 맞지 않게 날씨가 싸늘하다 하여 ’차가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다시 그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 그의 생애와 죽음이

교회의 기억 속에 지금까지 고이 간직되어 온 또 한분의 성인을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득히 사라졌거나 갖가지 환상적인 전설과 뒤섞여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확고한 사실은 남아 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며,

그의 영웅적인 생애는 그 당시의 교회를 통하여 영감의 물결을 보내 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느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다.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때 어떻게 항변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가21,12-15)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축일:8월20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9월3일.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축일:5월27일.

 

 

 

 

순교성인이시며 이태리에서는 모든 가톨릭 액션 단체에 가입된 젊은이들의 주보성인이시다.  

디오클레지아노 황제의 박해 기간 중 순교한 이 소년에 대한 기념은

그를 기념하기 위한 달력에 특별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대한 추앙은 교황 심마코가 순교자의 묘지로 적당한 아우렐리아로에

그를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면서부터 확대되었다.

 

어린 소년들의 주보성인인 방그라시오는 그리스도 신자의 증거는

그리스도와 형제들과의 결합에서 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믿음 안에서 소년들을 보호하는 문제는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소년들이 믿음을 잃게 되는 주요 원인은 교회 공동체가

좀더 진지하고 개방적이며 포용력 있는 태도로 소년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시리아(Syria) 또는 프리지아(Phrygia) 태생인 듯한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 또는 판크라시오)는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5월 12일)와 함께 로마(Rome)에 와서 살았다. 그는 여기서 삼촌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이때 불과 14세의 나이였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14세의 어린 나이로 고문을 당하고 로마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아우렐리아(Aurelia) 가도에 있는 옥타빌라(Octavilla)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특별히 영국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가 그의 첫 번째 성당을 성 판크라티우스에게 봉헌하고 성인의 유해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는 중세 후기 14명의 수호자들 중 1명으로 여겨졌으며, 신생 국가와 청춘 남녀들의 보호자이자 병자들의 협조자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로마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여러 교회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형제, 성녀 도미틸라 동정, 성 판크라시오 동료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98-100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판크라시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843쪽.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판크라시오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14-115쪽. 

(가톨릭홈에서)

 

 


성 네레오와 아킬레오 형제,성녀 도미틸라,성 판크라시오 동료순교자
Sts. Nereus and Achilleus, Domitilla and Pancratius

 

교회내에서는 네 명의 성스러운 순교자를 함께 기념한다.
그들의 천국에 개선한 날짜는 동일하지 않지만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네레오 및 아킬레오 두 형제는 1세기 중엽 로마 군대에 들어가 시내 경비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명령으로 마음에도 없는 참혹한 형벌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도 종종 있었으므로
이에 싫증을 느껴 군대를 떠나 황제의 근친 프랄비아 가문의 공주 도미틸라의 시종관이 되었다.
그리고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성 베드로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도미틸라는 네레오 형제의 한결같은 부지런한 봉사에 감탄하여 살펴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이처럼 훌륭한 행위로 이끄는 종교가 그리워져,

그 형제들에게 자기도 신앙에 들어가리라는 뜻을 나타냈다.
형제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주인의 말에 기뻐하며 그 즉시 공주를 교황에게 모시고 가서
교리를 연구하게 하고 세례까지 받게 했다.

 

도미틸라 공주는 예전에 아우렐리아노라는 귀족 청년과 약혼을 맺었는데 그는 이교도였다.
그리하여 네레오와 아킬레오 형제는 결혼을 하면 혹시 공주의 구원 사정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하고
매우 염려하여 성의껏 공주에게 충고하자 공주도 그 위험을 깨닫고 아우렐리아노와의 혼인을 파기하고
평생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고 클레멘스 교황으로부터 동정 서원의 뜻인 머리수건을 받았다.

자기 가족중에서, 또 로마의 명예로운 군인 중에서 금지된 그리스도교를

봉행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황제 도미시아노의 놀람은 어땠을까?
도미시아노 황제는 즉시 도미틸라와 네레오 형제를 부러들여 배교하기를 명했으나 신앙이 견고한 그들이
듣지않자 황제는 그들을 본시아라는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갖은 영화 속에서 아무 불편 없이 도회지 생활에 익숙했던 도미틸라에게 있어서 이 유배는
얼마나 적적하고 고독했는지!
그러나 그녀는 일체의 모든 불편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하여 잘 참아나갔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점차 더 심해갔다. 보신아 섬에는 미누디오 루포라는 사말이 와서
신자들을 압작하기 시작했으나 도미틸라와 네레오 형제 세 사람은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네레오 형제는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며

마침내 테라치나라는 섬으로 다시 귀양가게 되어 그곳에서 순교했다.

 

도미틸라 공주에 대해서는 약손자 아우렐리아노가 다시 설득해 보기 위해
레오도라와 에우프로시나라는 두 부인을 로마로부터 보내 온갖 감언 이설로 유혹을 했으나
역시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주 편에서 그들 두 부인을 신자로 개종시켰기에
루포는 그들 세사람을 테라치나에 보내어 그곳에서 한 집에 몰아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도미틸라 및 네레오 형제의 유골은 후에 로마에 옮겨져 프라비아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어
교회 신자들의 존경을 많이 받게 되었다.

 

성 판크라시오는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시대에 청형되어 순교한 소년이다.
그는 교회에서 옛날부터 특별히 존경을 받아왔고, 로마에는 지금도 그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어
추기경좌의 높은 격식(格式)이 마련되어 있다.

판크라시오는 소아시아의 피리지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된 후 백부 디오니시오와 함께 로마에 가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학자의 소개로
마르첼리노 교황을 알현하고 교회의 진리를 깨달아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어, 겨우 14세 때에
꽃이라면 봉오리와 같은 홍안의 미소년으로서 용감히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명했다.
그는 칼레포디우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성녀 도미틸라 축일:5월12일.


축일: 5월12일(7월30일)
헤르젝 노비의 성 레오폴도 만딕 사제, OFM Cap.
San Leopoldo Mandic
30 luglio (12 maggio) 
Castelnovo di Cattaro (Croazia), 12 maggio 1866 - Padova, 30 luglio 1942
Etimologia: Leopoldo = che si distingue, dal tedesco
Saint Leopold Bogdan Mandic
Also known as : Adeodato Bogdan Mandic, Apostle of the Confession, Apostle of Unity, Bogdan Ivan Mandic, Brother Leopold, Leopoldo of Castelnuovo
Born : 12 May 1866 at Herceg Novi, Dubrovacko-Neretvanska Croatia as Adeodato
Died : 30 July 1942 at the Friary in Padua, Italy of oesophageal cancer
Venerated : 1 March 1974 by Pope Paul VI (decree of heroic virtues)
Beatified : 2 May 1976 by Pope Paul VI
Canonized : 16 October 1983 by Pope John Paul II
Leopoldo = che si distingue, dal tedesco(that it is distinguished, from the German)
Name Meaning: the God-given one (Bogdan) 



성 레오폴도는

1866년 5월 12일 카스텔노보에처 태어나, 카푸친 형제회에 입회했다.
영웅적인 희생 정신으로 일생을 거의 고백소에서 보냈다.
고해성사 때 그의 훈계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위로, 빛을 주었다.


그는 하느님께 동방 형제들의 회귀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1942년 7월 30일 파도바에서 선종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We have in heaven the heart of a mother,

The Virgin, our Mother,

who at the foot of the Cross suffered as much as possible for a human creature,

understands our troubles and consoles us."

- Saint Leopold Mandic,Capuchin

 

 

 

   1866년 5월 12일 달마티아(Dalmatia)의 카스텔누오보에서 태어난 성 레오폴두스 만딕(Leopoldus Mandic, 또는 레오폴도)은 매우 작은 키에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겸손함, 침착함,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자신의 전부를 내놓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지녔었다. 그는 우디네(Udine)의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1884년 수련기를 보내고,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와 베네치아(Venezia)에서 수학한 후 1890년 사제품을 받으며 레오폴두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동유럽에서 선교를 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네치아 지방에서 소임을 받았으며 파도바에서 40년 동안 살게 되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른 지역에서 성장한 그는 교회의 완벽한 일치로의 재건을 꿈꾸고 노력했다. 유명한 아르스(Ars)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처럼 성 레오폴두스의 특별한 은사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자신을 ‘새장에 갇힌 새’로 표현했듯이 그는 고해신부와 영적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1962년 성 레오폴두스의 복자품에 관련된 결의문에서 라라오나(Larraona)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분의 일상은 이러했다. 아침 일찍 미사를 지낸 후 고해소에 하루 종일 앉아 고백을 들었다. 어떠한 불만도 없이 40년 동안 이 소임을 충실히 해냈다.”

 

   그는 용서와 평화를 증진하는 중심이 되었고, 그의 삶은 화해의 성사(고해성사)의 중요성과 이 성사를 통해 지상 여정에서 얻게 되는 안식의 중요성에 대해 사제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그의 시복 시성은 단기간에 추진되었다. 당시 교회법은 후보자가 복자품에 오르기 전에 50년이 경과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성 레오폴두스의 성덕이 너무도 명백해서 30년이 조금 지난 197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983년 10월 16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아르스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OFS) 축일: 8월4일




인정이 넘치는 카푸친 고해사제, 헤르젝 노비의 성 레오폴도  


고해성사에 대한 나쁜 경험이 좋은 고해사제가 되는 동기가 되다
복단 요한 만디츠(Mandic)가 여덟 살 때에, 그의 누나는 어떤 사소한 잘못 때문에 복단을 혼낸 뒤 고해성사를 받으러 성당으로 끌고 갔다. 사제는 복단에게 보속으로 성당 한 가운데 한 동안 무릎을 꿇은 채 있으라고 했다. 나중에 그는 그 사건을 기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깊게 슬퍼하면서 거기에 머무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사소한 잘못 때문에 아이를 이토록 엄하게 다루어야 하나? 내가 크면, 형제가 되고 고해사제가 되어 죄인들의 영혼들에게 크나큰 자비심과 선량함을 행사하는 형제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하여 약속한 대로, 복단 만디츠는 '헤르젝 노비의 레오폴도'라고 불리게 된 카푸친 형제가 되었고, 교회의 가장 유명하고 다정한 고해사제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죄인들을 자비롭게 다루는 모든 사제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다문화적 배경
1866년 5월 12일, 복단 요한 만디츠는 현 모네네그로, '헤르제그 노비'라는 곳에서 카롤로따 짜레비츠와 베드로 만디츠의 열두번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이탈리아말로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라고들 하는 '헤르젝 노비(Herceg Novi)'는 '신성(新城)'이라는 뜻이다. 베니스의 관구에서 온 카푸친들은 1688년부터 헤르젝 노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먼저 해군 사목에, 그리고 나중에 설교에 종사했다. 헤르젝 노비의 다민족 주민들은 크로아티아, 그리스, 세르비아, 러시아, 터키 사람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은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매우 다각적인 지역이었다. 그런 만큼 로마 가톨릭 외에 정교회, 네스토리우스 교파, 그리스도 단성론자, 회교인들이 고루 섞여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이 힘차게 살아남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베니스의 카푸친들 덕분이었다.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이'가 하느님께 자신을 드리다
세례명인 ‘복단(Bogdan)’의 뜻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이(라틴어로 Adeodatus)' 라는 뜻이다. 복단의 부모님은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지만 정치적인 변동에 의해 그 동안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한 가족의 곤경과 고뇌를 어려서부터 접해온 덕분인지 복단은 특히 사회적으로 품위를 잃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

1882년 5월 2일, 열여섯 살인 복단은 집을 떠나 베니스의 카푸친 작은 형제들의 소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이탈리아, 우디네(Udine)로 갔고, 2년 후 1884년 5월 2일에 비첸사(Vicenza)에 있는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의 형제회에서 수도복을 입고 레오폴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1885년 5월 4일에 첫 서약을 했고, 1888년 10월 28일에 파도바에서 종신서약을 했다. 1890년 9월 20일, 24세인 레오폴도 형제는 베니스에서 사제 성품을 받았다.

 

 

선교 생활에 부적합한 이로 여겨지다
성인이 된 이후의 모든 삶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지만, 선교사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는 고향에 돌아갈 희망을 품은 이 젊은 사제는 이탈리아 국적을 여전히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던 제1차 대전 때에도 자신의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국적을 포기함으로써 고향을 배반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전쟁 기간 동안에 남이탈리아에서 국내 유배형(流配刑)을 살아야만 했다. 대전 후에 레오폴도 형제는 자신의 고향에 파견되어 설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특히 언어 장애가 있었고 더듬기까지 했기 때문에 설교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135센티 미만의 키에 연약한 몸은 굽었으며 얼굴도 창백했다. 시력도 안 좋았고 위장병과 신경통에도 자주 시달렸다. 그러한 이유로 카푸친회의 봉사자들은 레오폴도 형제를 설교와 선교에 적절하게 여기지 않았고, 대신에 그를 고백성사 사제로 임명했다.



교회일치에 헌신하도록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
사실 그는 1887년, 기도 중에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몸 바칠 부르심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고, 특히 성모님의 중재로 그 꿈을 이루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더욱이 동방 유럽으로 선교사로 파견될 준비로 그리스어와 그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와 슬로베니아어도 배우고 있던 터라 그에게 있어 순종이란 적지 않은 고통을 준 희생이었다. 레오폴도는 그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새와 같지만 내 마음은 바다 저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여인의 계시로 인해 자신의 이 특별한 사명은 선교지에 있지 않고 고백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인은 그에게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 고해성사 안에서 당신이 도와주시는 모든 영혼이 바로 당신의 동방(東邦, 선교지)임을 알려주라고 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레오폴도 형제는 교회일치의 사명에 대한 열정을 전혀 잊지 않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가 동부의 민족, 즉 '동방교회의 반체제인사'들의 구원을 위해 뽑힌 것에 대하여 나는 하느님 앞에서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봉사직무를 통해서 오직 한 목자 아래 단지 한 양 떼 밖에 없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도록, 나는 나를 은혜로이 뽑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선하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선교의 꿈은 고해실에서 이루어지다
비록 자신의 하고자 하는 일과는 달랐지만 레오폴도 형제는 그 임명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 일을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고백실 안의 훌륭한 목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국 장상들의 불허에 온전히 복종했던 것이다. 고요하고 자비로운 성품으로 타인의 위한 봉사에 항상 준비된 그는 애덕의 실천을 위해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그는 임명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의 사랑과 칭찬을 받았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었던 카푸친 형제회 안에서는 봉사에의 몰두 때문에 자주 공동체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로 오해하고 비난하는 형제들이 많았다. 또 고백자들을 너무 너그럽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 반기를 드는 형제들도 있었다. 하지만 레오폴도는 고백성사의 직무를 인간적 품위에 걸맞은 자애로운 존경심과 이해심으로 이행했다. 사제의 친절함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화해의 성사 안에서 고백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나쁜 모범' 따르기
어떤 사람들은 레오폴도 형제가 죄인들에게 '소매가 넓은(di manica larga)' 사람이라고 투덜댔는데, 생생한 관용 표현인 이 이탈리아 말은 죄인들에게 지나치게 너그럽다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레오폴도 형제가 주교에게 밀고 당했을 때에, 그는 주교관 벽에 걸린 십자고상을 가리켜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죄인들을 향해 소매가 넓다'는 이유로 저를 나무라신다면 저는 주님께, '파로온 베네네토(Paròn Benedeto : 이탈리아말, 베니스의 사투리로 복되신 보스라는 뜻인데 레오폴도가 흔히 하느님을 높여 이르는 말)', 이에 대하여 당신께서 저에게 얼마나 나쁜 모범을 보여주셨는지요! 저로서는 아직 영혼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 어리석은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는걸요!'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고백자들에게 과도하게 착하게만 군다고들 하는데, 사실 사람들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 저는 그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원한다는 충분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뛰어 넘습니다." 라고 말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매일 고해성사를 받아야 했던 성스러운 고해사제
하지만 레오폴도 형제에게 이런 부드러운 태도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성질이 불같이 과민하여 상처를 쉽게 받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타고난 성질 때문에 평생 동안 싸워야 했고, 그 때문에 분노라도 할라치면 언제나 고해성사를 받았던 것이다.

고해성사를 매일 받아야 했던 고해사제였던 레오폴도 형제는 그러한 자신을 이겨내며 고백자들에게 조그만 보속을 주고는 남는 보속을 늦은 밤에 자신이 직접 했다. 어쩌면 레오폴도 형제의 가장 큰 개인 보속이라면 겨울에는 냉장고 같으며 여름에는 불가마 같은 (넓이197.5, 길이127.5, 높이187.5 센치) 작은 고백실에서 하루 종일 머물러야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고해자들을 편안하게 해준 친절한 사제
그는 회개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안심하세요. 제 어깨에 모든 것을 지우십시오. 제가 떠맡을 거예요." 한 증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수년 동안 성사들을 받지 않았던 파도바의 한 신사한테 이런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그는 매우 당황되고 헷갈려서인지 고백실에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기는커녕 그만 사제석에 앉아 버렸는데, 레오폴도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해자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의 고백을 들어 주셨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의 '복되신 여성 보스'이셨다
레오폴도 형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이 있었는데, 그분을 자신의 ‘파로나 베네데타(Parona Benedeta)’ 또는 ‘복되신 여성 보스’라고 일컫곤 했다. 무염시태의 부속제단에서 미사를 거행했으며 자주 묵주기도와 성모소일도를 낭송하곤 했다고 한다. 1934년 7월, 파도바 교구의 루르드 성지순례에 참석한 그는 그 곳 성모님께로부터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성모님께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늘에는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어느 피조물인 인간이라도 겪을 수 있는데 만큼 모든 고통을 겪으신 동정녀이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우리의 고민을 이해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레오폴도의 애덕
또한 그는 임신부들과 어린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있어서, 병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파도바의 주변 병원에 자주 방문했으며, 또 아프거나 나이가 많은 형제들을 위로하려고 카푸친회의 환자실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레오폴도 형제는 의사들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반복하곤 했다. "하느님께서는 의사이시자 의약이십니다."




사목적 목표에 따른 평생 교육
사실 그는 의사들과 심리학 전문가들과 교류함으로써 더욱 더 좋은 고해사제가 될 방법들을 터득하고 노력했다. 그리고 평생 학생이길 원했던 레오폴도 형제는 죽을 때까지 성 토마스 데 아키노나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학 저서를 읽었고 최근의 윤리신학과 사목신학의 연구 자료들도 공부하곤 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인상만으로도 사람의 영혼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며, 회개자 스스로 죄를 고백하기 전에 그는 사람들이 지은 죄를 다 헤아릴 수 있었다. 이 능력은 한 편으로는 초자연적 은사이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 신학과 자연학 연구의 결과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선한 인성에 묻어난 배려심의 결과였다.

 


커피에 대한 의존도가 그의 죽음을 재촉했나?
고백실에서 그의 모든 생을 헌신한 레오폴도 형제는 졸음을 피하기 위해 뜨거운 커피를 많이 마시곤 하였는데 결국 그 커피 때문에 고통스러운 식도암에 걸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를 찾아오는 회개자들에게 "자! 저 여기 있어요. 그냥 들어오세요! 편히 쉬시지요!"라고 말하며 환영하였다. "사제는 오로지 사도직의 수고로 인해 죽어야 합니다. 그 외 다른 죽음은 그 어느 것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권고를 끝까지 실천한 것이었다. 

 

끝까지 노고하시다 결국 죽음 자매를 만나다
마침내 1942년 7월 30일, 레오폴도는 미사 제의를 입다가 제의실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자신의 독방으로 실려가 병자 성유를 받은 뒤, 그곳에 모인 온 형제들과 함께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를 낭송하는 도중에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 부분에서 선종했다. 그가 76세가 된 해, 카푸친 형제회에 입회한지 60년이 되었고 사제품을 받은지 52년이 되던 해였다. 그의 죽음은 역시 식도암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분 신체의 다른 곳은 모두 부패했지만 '고백성사' 사죄경을 주었던 그의 오른손은 오늘날 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1976년 5월 2일, 바오로 6세 교황은 헤르젝 노비의 레오폴도 형제에게 시복을 주었다. 그리고 1983년 10월 1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에게 시성을 베풀었다. 오늘날 성 레오폴도는 그의 삶의 지향과 모범으로 인해 '일치의 사도', '고백성사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루어진 예언
죽기 전에 레오폴도 형제는 고백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형제회 건물마저 호되게 (폭탄을) 맞을 것이지만, 이 작은 독방은 맞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영혼들에게 그토록 큰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곳은 당신의 선하심에 대한 기념물로 남아야 합니다." 그 예언대로 1944년, 성당과 형제회의 건물은 미국 공군의 공습을 받아 완전히 무너졌는데 성 레오폴도의 고해실과 성인이 좋아했던 성모상만은 무사히 남았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성모신심이 깊은 이 고해사제의 평생 헌신에 대한 이 얼마나 좋은 기념물인가!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성 레오폴도 만딕 사제는  1976년 5월 2일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3년 10월16일  시성하셨다.


[고해성사의 중요성 재천명] 만딕 신부 시성식…그 배경과 의미 (상)

성년 · 시노드와 맥락 함께해, 화해와 용서의 모델로 제시

 

지난 10월 1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례로 거행된 복자 레오폴드 만딕 신부의 시성식에는 10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참석, 일생을 고백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자했던 한 크리스찬의 시성을 지켜보았다.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 발표와 더불어 거행된 만딕 신부의 시성식은 내년 103위의 시성을 앞둔 한국교회의 관심을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불러일으켰다. 다음은 레오폴드 만딕 신부의 시성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이정운 신부의 참관기이다. <편집자註>
 

시성식이 거행된 10월 16일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위 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또 10월 초부터는 그리스도의 구원성업 1950주년을 기념하여 선포된 특별 성년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기 위해 ‘화해’를 주제로 한 주교 시노드가 열리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 평생 화해의 직무를 이행한 한 사제의 시성도 현대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사목적인 뜻과 그리스도의 참뜻을 전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세상에 자비로우신 구세주를 닮아 세상을 밝히는 위대한 성인의 생애를 우리에게 바로 새기기 위해 현대의 성인 레오폴드 만딕 신부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으신 것이다.

구원의 특별성년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린 인간을 죄의 속박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가까이 가면서 자비로우신 구세주의 마음에 달려가도록 함이 그 목적이다. 말 그대로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상징하는 성년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성년문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고, 이 사랑을 받아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사랑을 전하는 사도적 사명 안에서 교회는 구원성년을 선포하고 이 성년 안에서 전세계 각처에서 모인 주교 시노드의 주제를 하느님의 사랑에 귀의하는 인간의 참회를 역설하면서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열라고 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문으로 오라고 하고 있다.

용서를 청하러 와도 마음 안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모진 마음을 열기위해 하느님의 구원의 문, 성년문, 사랑의 문, 용서의 문을 열어놓았다. 성년문이 열려있다. 이는 바로 천국의 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성업 1950주년 기념성년을 기해 모든 참회자들을 받아들이는 고백성사에 대하여 현상(現象)에만 집착하고 있는 수많은 신자들의 나태성을 일깨우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모두 나에게 오라고 이르시는 주님의 마음에 초대되기 위하여 마련된 것 주교 시노드이다.

9월 말에 개최하여 10월 말에 폐막된 화해와 일치, 참회와 용서, 사랑과 만남에 대한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구세주의 마음 안에 달려가는 자신을 도로 찾고 자신도 사랑과 자비의 문을 열어 용서를 청하는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전해주는 각성을 요청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이 거룩한 해를 보내면서 세계 신자들의 목자로 계시는 교황님과 주교님들은 한가지로 자비로우신 구세주를 닮아 참된 목자로 살며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찾아서 항상 용서와 사랑의 문, 성년문, 화해의 문, 일치의 문을 열어 놓고서 이 성년문의 참뜻을 찾아내었다.

그래서 평생 고백소에서 지낸 레오폴드 만딕 신부를 이 기회에 성인반열에 올렸다.
[가톨릭신문, 1983년 12월 11일, 이정운 신부 · 수원교구 사목국장]


 

[고해성사의 중요성 재천명] 만딕 신부 시성식…그 배경과 의미 (하)

평생을 고백신부로 살아, 참회자들을 주께로 인도

 

이는 모든 신자들과 사제들에게 주님의 사제 직무를 알게 함이었고 새로운 신자들은 항상 자비로우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사제들은 신자들의 고백을 언제든지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레오폴드 만딕 신부님의 전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었다.

레오폴드 만딕 신부님은 1866년 5월 12일 까스뗄노보(Cast-einovo)에서 탄생, 1884년 5월 2일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890년 9월 20일 사제로 서품되었고, 1942년 7월 30일 선종하였다. 76세의 생애 동안 이태리 북부 파도아(Padoa)에서 50년간을 고백신부로 일하였다. 그는 생애 동안에 하루도 건강이 좋은 날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작은 키에 갸냘픈 체구였고 언변도 부족하여 설교도 잘하지 못하였다.

그는 오로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루에 12시간 내지 15시간 고백성사를 주며 지냈다. 그가 고백성사를 집전한 고백소는 여름에는 가마솔같이 뜨겁고, 겨울에는 냉장고같이 추웠다한다. 밤중에도 고백성사를 요청하는 많은 참회자들에 “예, 어서 오시오” 하고 항상 반갑게 맞이한 것은 그가 사제가 되는 순간부터 화해를 위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그의 사명이 화해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제가 되자 처음에는 동부 유럽에서 전교하기를 희망했으나 장상들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지방인 달마티아(현재 유고슬라비아)에서 평생 일하기를 원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로마와 달리하는 동방교회가 있어서 이 교회와 일치를 목표로 살고자 결심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상들의 허락이 내리지 않자 그는 파도아에서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을 오로지 고백성사 사목에만 전념하였다. 성녀 소화 데레사가 가르멜 봉쇄수도원에 속하여 평생을 평화를 위하여 일을 하였듯이 그는 작은 골방 고백소에서 주님의 뜻에 복종하여 생애를 바쳤다.

그에게 찾아오는 모든 참회자들 가운데는 다른 이교도도 있었다. 그는 더욱 하느님께 이교도들을 하느님의 하나의 양우리에 들어오게 할 수 있게 하기위한 영신적 봉사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였다. 그는 그가 선종하기 바로 전날에도 50명의 사제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나의 전생애의 목적은 ‘하느님의 계획’이었다. 나는 비록 하잘 것 없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명하는 대로 갈라진 형제들이 돌아오도록 노력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항상 고백소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거기에서 그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또 이르기를 “역시 나는 나의 보잘것없는 생애보다 더욱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영혼들 때문에 내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는 순간까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겠다.”고 말하였다.

약한 건강으로 오로지 영혼들을 건지려는 열망 안에 살아온 만딕 신부님을 구원의 1950주년 기념성년이 이루어지고, 맺고 푸는 권한을 베드로에게 맡기신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5주년이 되는 날 주님의 사제로써 이 구원의 성사인 고백성사를 평생 주면서 살으신 신부님의 시성식이 거행된 것이다.

구원의 1950주년 기념성년 안에 우리는 참된 고백성사를 받고 성년 지정성당을 순례하면서 그 성문이 바로 로마 베드로 성전 성년문, 주님의 사랑의 문, 자비의 문, 사슬에서 풀린 자유의 문을 새겨야 하겠고, 고백성사를 잘 받아야하고, 진정 우리는 두려움 없이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달려가야 하겠다.
[가톨릭신문, 1983년 12월 18일, 이정운 신부 · 수원교구 사목국장]
(가톨릭홈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 인준받은 회칙 1:1

 

“우리의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복음을 최고의 법으로 따르고
구원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처럼 우리 마음에서 새깁시다.”  -카푸친 회헌 1:6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던 작은 형제회의 최후의 개혁으로서
1528년 교황님의 인준을 받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기도와 가난과 더욱 작음으로써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의 생활양식을 할 수 있는 만큼 닮으려고 했다.

 


 

형제애 - 카푸친들은 형제들이다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다.”  마태오 23,8-9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수도회로서 우리 카푸친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모든 피조물의 맏형이 되신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는 형제들이다.

사실 우리 형제회를 하나로 묶어 주시는 분께서는 주님의 성령이시다.
그래서 같은 부르심을 받은 우리 수도회의 모든 회원들은 사제든 평수도자든 차별 없이 형제라고 불린다.

참 형제로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어려울 때 서로를 도와주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서로를 위로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형제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만나든지 한 가족임을 서로간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신뢰심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서로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정성되이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준받은 회칙, 6:7-8

 

우리의 형제애는 우리 자신들에게만 제한되있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에까지 퍼져야 하는 것이다.

위계적이고 왜곡된 권위에 기초한 사회 제도들과 인종 차별, 민족간의 분쟁,
빈부간의 계층갈등, 노동력 착취, 생태계의 파괴 등에 찢어진 세상에
우리가 무엇보다도 이바지할 점은 바로 우리의 복음적 형제애이다.

 

 


관상 - 하느님께 기도하는 형제들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오 6.6;8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는,
프란치스코를 기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스스로가 곧 기도 자체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는 카푸친 형제들의 생활 목적이기도 하다.
개인의 관상기도와 공동체의 전례기도는 우리 카푸친들의 생활양식과 모든 사도직을 가능하게 한다.
카푸친 회헌에서 기도에 대한 다음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릴 기도는 사랑의 호흡으로서, 성령의 활동에서부터 비롯하여
그 활동으로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내면적인 사람은 귀담아듣는다.” -회헌 6:45

 

우리 카푸친들의 관상기도는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매일매일 자연과 인류역사,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양심,
성서에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담아 듣는 기도라는 뜻이다.

이 관상기도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침묵과 고요와 충분한 시간과 고독이 필요하다.

 

이런 조용한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그분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서부터 부르짖는 소리로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를 바치신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과 성체에 대해서 자주 묵상하여
마음으로부터 불타 오르는 사랑으로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노력했다.

그리스도의 육화와 수난, 성체에 중심이 되는 우리 카푸친들의 기도도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마음의 기도 또는 정신적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긴밀히 체험하며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한다.
이 긴밀한 체험과 관계는 전례 시간 외에도 침묵 속에서 바치는 개인기도 시간으로 길러진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St Domitilla with Sts Nereus and Achilleus-POMARANCIO

c. 1598-99 Oil on canvas, 275 x 170 cm Chiesa dei Santi Nereo e Achilleo, Rome

 

축일:5월12일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순교자

St. NEREUS and St. Achilleus

San Nereo Martire e Sant’ Achilleo Martire

Died:beheaded. sec. III

Canonized:Pre-Congregation

Nereo = gran nuotatore, da Nereo, dio marino greco = great swimmer, from Nereo, Greek marine God

Achille = bruno, scuro, dal greco = tawny, dark, from the Greek

 

 

 

이 순교자들은 직업 군인이었으나, 신앙에 귀의한 후 군대 생활을 떠났다.

이 때문에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가 치세하던 무렵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들의 무덤은 비아 아르데아티나에 보존되어 있고 거기에 기념 대성당이 세워졌다.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또는 아킬레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순교자로서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다.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원래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가 4세기 말에 쓴 그들의 무덤 묘비에 따르면, 그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손녀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5월 12일)를 죽이라고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받아 도리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이를 '신앙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로마에서 폰자(Ponza)라는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세 사람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테라치나(Terracina)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그들의 추방 자체가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고 하였다. 이 섬으로 유배된 후에 성녀 도미틸라는 화형에,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의 묘에 안치되었다. 그들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공경되어 그 이름이 5세기 로마의 축일표에 기재되었고,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는 그들의 축일 미사 전례문이 수록되어 있다. 398년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는 그들을 기념하여 성녀 도미틸라의 묘에 성당을 세웠고, 이 성당에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대교황은 재임시 그들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강론을 하였다. “이 성인들은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발 아래 놓았습니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는 그들을 기념하여 새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형제, 성녀 도미틸라 동정, 성 판크라시오 동료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98-100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 '네레오와 아킬레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5년, 1348쪽.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네레오와 성아킬레오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13-114쪽. 
(가톨릭홈에서)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Ps 61,4: CCL 39,773-775)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을 지니신 한 사람이십니다.

그 분은 몸의 구원자이시고 또 몸의 지체이시기에 하나의 육신안에, 하나의 목소리 안에,

하나의 고난 안에 둘이시고 이 죄스러운 세상이 다 사라져 버릴 때 하나의 안식 안에 둘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와 몸으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머리로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분의 지체 중 하나인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여러분이 누구이든 간에,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건 지금 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그리스도의 지체라면 틀림없이 듣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이들에게서 당하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고난입니다.

 

그 때문에 그 고난을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고난으로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고 흘러 넘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머리로서 고난당하셨고 또 이제

당신 지체인 우리 자신 안에서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전체 고난에 기여하여야 하는 만큼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역량에 따라, 그리고 어떤 일정한 고난의 규범에 따라서

일종의 공동 복지에 우리가 기여해야 할 바를 기여합니다.

모든 고난은 이 세상이 끝날 때라야만 다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악인으로부터 박해받은 의로운 사람들과 심지어 주의 오심을 미리 전하려고

주님에 앞서 온 이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도읍에 속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온 도읍은 의인 아벨의 피에서부터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말해 주고 있고,

그 후 같은 한 도읍은 요한의 피에서 시작하여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피와 또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피를 통하여 말해 줍니다.

(가톨릭홈에서)

 

 

 

교황 성 다마소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의 순교자들은 크리스챤이 된 로마 군인이었으며,

더 이상의 군복무를 거절하여, 비아 아르데아띠나의 도미띨라 묘지에 안장되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은 플라비아 도미띨라의 종들이었는데,

그들의 종교 때문에 그녀와 함께 귀양가서 사형되었다고 한다.

 

이 두 성인에 대한 신심은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로마 군대의 치안을 맡은 군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테라치나 섬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순교했다.

그들의 시신은 후에 도미틸라 묘지라고 알려진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896년, 데 로시의 발굴에 의해 390년에 시리치우스 교황이 건축한 지하 교회에서

그들의 빈 무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죽은 지 200년 후에 교황 대그레고리오는 그들의 축일에 즈음하여 28번째 설교를 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존경하고 있는 이 성인들은 세상을 경시하고 평화와 부와 건강이 세상의 매력을 줄 때에

그 세상을 발 아래 내던졌습니다."

 

많은 초기 순교자들의 경우처럼 사건 자체가 역사의 안개속에 가려져 있음에도

교회는 그 기억을 고수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들이 고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세계-무력과 물질주의,

잔인하고 비판적인 세계-에 살고 있었지만 살아 계신 분의 현존에 의하여 내부로부터 변화되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용기는 우리보다 앞서

신앙의 표적과 그리스도의 상처로 흔적을 남기고 간 남녀 영웅들에 의해서 활기를 되찾는다.

 

다마소 1세 교황은 4세기에 그들을 위한 비문을 썼다.

그 비문은, 비석이 아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때 그것을 읽은 여행자들에 의해 알려져 있었지만

후에 데 로시가 발견한 파편들로도 그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네레오와 아킬레오 순교자들은 군인의 신분으로서 폭군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잔인한 직무를 실천하며

언제나 공포에 떨며 푹군의 명령에 따를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오, 신앙의 기적이여! 갑자기 그들은 그들의 미친 짓을 그만두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들의 사악한 지휘관의 진영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들은 그들의 방패와 갑옷 그리고 피에 물든 창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면서 기꺼이 신앙이 승리한 것을 증거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마소 1세 교황의 기록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9월3일.

*성 다마소 1세 교황 축일:12월11일.

 

성녀 도미띨라 순교자

St. Domitilla

St. Flavia Domitilla

 

플라비아 도미띨라는 로마 원로원 플라비우스 글레멘스의 아내이자 도미씨안 황제 여동생의 딸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그녀의 남편이 96년에 순교한 후에 티레니아해의 판다타니아 섬으로 유배되었다.

우상에게 제물 바치기를 끝내 거절하므로 화형에 처해졌다고도 한다.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황제 티투스(Titus)와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의 질녀이다. 성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는 95년 로마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 6월 22일)의 부인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질녀인 도미틸라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고 가예타(Gaeta) 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판다타리아(Pandataria) 섬으로 추방했다. 이교도 역사학자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는 도미틸라가 로마 제국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은 무신론자 또는 신성 모독자라는 죄명으로 고발당하여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둘째 이야기에 의하면, 역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성녀 도미틸라가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질녀라고 전한다. 평생 동정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신자임이 발각되어 판다타리아 섬에서 북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진 폰티아(Pontia) 섬으로 추방되었다. 도미틸라를 죽이라고 파견된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는 오히려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을 받아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고 도미틸라와 함께 추방되었다. 이후 도미틸라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말처럼 순교와 마찬가지의 긴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마침내 테라치나(Terracina)에서 도미틸라는 화형에,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아 함께 순교하였다. 이 때 그녀의 수양자매인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와 테오도라(Theodora)도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녀 도미틸라와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의 유해는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의 묘에 안치되었고, 398년 성 시리키우스(Siricius) 교황은 그들을 기념하여 이곳에 성당을 세웠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는 새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되었다. 수많은 초기 순교자들처럼 도미틸라 성녀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실들이 전해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긴 교회 전통 속에서 성녀 도미틸라는 황제의 질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목숨으로 신앙을 지켰음을 전해 주고 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형제, 성녀 도미틸라 동정, 성 판크라시오 동료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98-100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도미틸라, 플라비아',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1777-1778쪽. 
(가톨릭홈에서)

 

 

 

St. Gregory, St. Maurus, St. Papianus and St. Domitilla-Peter Paul Rubens.   

1606. Oil on canvas. Gemaldegalerie, Berlin, Germany.

 

성 네레오와 아킬레오 형제,성녀 도미틸라,성 판크라시오 동료순교자

Sts. Nereus and Achilleus, Domitilla and Pancratius

 

교회내에서는 네 명의 성스러운 순교자를 함께 기념한다.

그들의 천국에 개선한 날짜는 동일하지 않지만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네레오 및 아킬레오 두 형제는 1세기 중엽 로마 군대에 들어가 시내 경비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명령으로 마음에도 없는 참혹한 형벌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도 종종 있었으므로

이에 싫증을 느껴 군대를 떠나 황제의 근친 프랄비아 가문의 공주 도미틸라의 시종관이 되었다.

그리고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성 베드로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도미틸라는 네레오 형제의 한결같은 부지런한 봉사에 감탄하여 살펴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이처럼 훌륭한 행위로 이끄는 종교가 그리워져,

그 형제들에게 자기도 신앙에 들어가리라는 뜻을 나타냈다.

형제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주인의 말에 기뻐하며 그 즉시 공주를 교황에게 모시고 가서

교리를 연구하게 하고 세례까지 받게 했다.

 

도미틸라 공주는 예전에 아우렐리아노라는 귀족 청년과 약혼을 맺었는데 그는 이교도였다.

그리하여 네레오와 아킬레오 형제는 결혼을 하면 혹시 공주의 구원 사정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하고

매우 염려하여 성의껏 공주에게 충고하자

공주도 그 위험을 깨닫고 아우렐리아노와의 혼인을 파기하고 평생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고

클레멘스 교황으로부터 동정 서원의 뜻인 머리수건을 받았다.

 

자기 가족중에서, 또 로마의 명예로운 군인 중에서 금지된 그리스도교를 봉행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황제 도미시아노의 놀람은 어땠을까?

도미시아노 황제는 즉시 도미틸라와 네레오 형제를 부러들여 배교하기를 명했으나

신앙이 견고한 그들이 듣지않자 황제는 그들을 본시아라는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갖은 영화 속에서 아무 불편 없이 도회지 생활에 익숙했던 도미틸라에게 있어서 이 유배는

얼마나 적적하고 고독했는지!

그러나 그녀는 일체의 모든 불편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하여 잘 참아나갔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점차 더 심해갔다.

보신아 섬에는 미누디오 루포라는 사말이 와서 신자들을 압작하기 시작했으나

도미틸라와 네레오 형제 세 사람은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네레오 형제는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며 마침내 테라치나라는 섬으로 다시 귀양가게 되어 그곳에서 순교했다.

 

도미틸라 공주에 대해서는 약혼자 아우렐리아노가 다시 설득해 보기 위해

레오도라와 에우프로시나라는 두 부인을 로마로부터 보내

온갖 감언 이설로 유혹을 했으나 역시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주 편에서 그들 두 부인을 신자로 개종시켰기에

루포는 그들 세사람을 테라치나에 보내어 그곳에서 한 집에 몰아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도미틸라 및 네레오 형제의 유골은 후에 로마에 옮겨져 프라비아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어

교회 신자들의 존경을 많이 받게 되었다.

 

성 판크라시오는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시대에 청형되어 순교한 소년이다.

그는 교회에서 옛날부터 특별히 존경을 받아왔고,

로마에는 지금도 그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어 추기경좌의 높은 격식(格式)이 마련되어 있다.

 

판크라시오는 소아시아의 피리지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된 후 백부 디오니시오와 함께 로마에 가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학자의 소개로

마르첼리노 교황을 알현하고 교회의 진리를 깨달아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어, 겨우 14세 때에

꽃이라면 봉오리와 같은 홍안의 미소년으로서 용감히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명했다.

그는 칼레포디우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희생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는 로마의 군인이었다.

그들은 직업상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해야만 했는데,

그 일을 하는 동안 하느님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네레오와 아킬레오의 개종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결국 테라치나라는 섬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는 자신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경우 당하게 될 위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위험과 맞부딪힐 때는 하느님이 함께해 주시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정한 희생이 없으면 영원한 상급도 없으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때는 아니다.

대신 우리는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을 죽이고 우리가 소유한 물질에 대한 그릇된 애착을 버림으로써

하느님의 모상이 되어 가도록 소명을 받았다.

우리도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처럼 마음과 삶을 오롯이 하느님께 드리고 그분을 완전히 신뢰한다면

원래 우리 것이 아닌 것들을, 우리의 생명까지도 봉헌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희생은 무엇인가?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어떤 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