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05.29.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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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순교(증거)의 의미를 들려 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밀알을 빗대어 증거의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밀알이 썩는다는 건 그 자체의 형상이 훼손되고 무너지는 겁니다. 고유하게 지녔던 형태와 내용이 사라져서 자기가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밀알이 땅에 묻히면 흙의 온도와 양분, 수분이 씨앗을 불리고 썩혀 형태를 무너뜨리지만, 그 대신 그 안에 내재되었던 생명력이 끌어내어집니다. 그러니 끝까지 제 형태를 고수하려면 흙이나 수분을 거부하면 되고, 반대로 더 많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썩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지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예수님은 섬김과 따름, 함께함을 하나로 엮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어 따르고, 그러면서 그분이 좋아하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을 섬기는 건 마치 한 호흡처럼 자연스레 이어지는 수순이지요.
그런데 이 따름과 섬김은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발화합니다. 사랑을 빼고서는 닮음이나 따름, 섬김이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반드시 물리적이지 않아도 그분과 늘 함께 머무르는 상태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곧 사랑 안에 머무름입니다. 순교는 결국 사랑하는 대상 안에 자신을 묻어 그분의 행위 안에 완전히 썩어서 녹아드는, 그래서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신비일 것입니다. 무수한 순교자의 죽음이 예수님의 희생제사 안에 하나로 합쳐져, 아버지께 바치는 같은 사랑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교 제사의 위협에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받아들인 엘아자르라는 현인이 등장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2마카 6,26)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눈속임을 제안 받은 엘아자르의 일갈입니다. 잠시의 기만으로 죽음의 손길은 피한다 해도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겠다는 각오지요.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2마카 6,30)
엘아자르가 고백한 경외의 마음이 곧 주님께 드리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자신을 해치고 훼손하여 물리적인 흔적을 지우려는 죽음의 손길도 마다하지 않게 하지요.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는 목숨을 잃어 사라질지라도 믿음의 증거이자 사랑의 증거인 순교는 영원히 남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며 시성을 기원하는 오늘, 교리와 성사를 제대로 접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주님께 뜨겁고 충실한 단심을 바쳐드렸던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에게도 그 은혜를 주십사 청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실 순교(증거)를 목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순교(증거)할 수 있는 겁니다. 썩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사랑이 시키는 일을 하나씩, 그렇게 하루씩 채워가다 보면 우리는 사랑 안에 주님과 하나 되어 사랑을 완성해 나가게 될 것이고, 그저 죽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풍요로운 생명의 열매로 탈바꿈할 것입니다. 증거의 삶으로 불리움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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