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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2021.05.2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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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당시 예수님의 존재와 모습이 왜 파격이고 도전이 되었는지 보여 주십니다.

"자비, 용서, 표징, 기적, 불쌍히 여기심, 영광, 성취, 보답, 호의 ... "

제1독서 안에는 인간이 하느님께 기대하는 바가 담긴 단어들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위한 기도 내용으로 짜여진 집회서 36장에 백성의 바람과 간청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에서 구약의 백성이 바라보는 전형적 하느님관이 드러납니다. 크고 위대하시며 징벌하기도 하시고 용서도 하시는 하느님, 하늘 옥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분, 세상 모든 권력을 쥐고 영광을 떨치시는 분이 이스라엘을 소유하신 하느님이시지요.

그런데 그러한 기대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복음 속 예수님은 상이한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마르 10,32)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미 두 차례나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데 이어 세 번째로 다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순간으로, 이 배경 설명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예루살렘은 사형선고와 수난, 죽음의 도시이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한 발 앞서 나아가고 계시지요. 그분은 뒤에서 "진격!"을 외치며 부하들의 등을 적진으로 떠미는 장수가 아니라, 몸소 앞장서서 본보기가 되어 주시는 스승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43)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첫 자리를 달라고 청탁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을 불쾌히 여기는 동료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마치 철부지들을 붙잡고 타이르듯 간곡히 당부하시는 스승의 마음이 느껴지지요.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전형적인 하느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라서 그런 소망을 가졌을 겁니다. 전능하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측근인 자기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 기대했겠지요.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화를 낸 이유는 그들 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욕망이 숨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은 전형적인 신관에 파격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하느님은 기존의 모습이 아니라, 섬기는 신, 종의 자리로 내려간 신,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약의 백성이 섬기는 하느님과 다른 신이실까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으로서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행하는 분이시지요. 비움과 섬김과 죽음은 인류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고 완성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세도와 군림, 권력과 영화를 꿈꾸었다면 지금부터는 멘붕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앞으로는 그 바벨탑과도 같았던 꿈이 차근히 혹은 처절히 무너지는 체험의 과정을 밟아가게 되겠지요. 그 안에서 자신의 바닥을 체험하고 다시 자비의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진짜 하느님의 모습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영성생활이 이제 시작인 셈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어떤 모습의 주님을 따라 나섰는지 되짚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꿈이 하느님의 꿈과 이어져 있는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파격과 도전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가 있는 자리보다 더 낮고 비천하고 어려운 곳으로 내려가 우리를 지탱해 주는 분이시지요.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내어, 앞장 서신 그분의 뒤를 따라, 믿고 희망하며 나아갑시다. 이 길은 결국 사랑의 완성이신 주님과의 일치로 이어질 것이니 이 여정 안에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