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16,19-21)
부유한 이들 중에는 이 이야기를 불편하게 듣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있는 재산으로 즐겁게 호의호식하며 사는 게 무슨 죄냐고, 라자로에게 딱히 잘 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쫒아버리거나 못되게 군 것도 아닌데 왜 죽어서 고생을 해야 하냐고 억울해 합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으니 이제 여기서 고초를 겪는 것'(루카 16,25 참조)이라는 인과관계도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가진 게 죄인가? 열심히 노력해 부자로 사는 게 죄인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항변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16,21) 그런데 실상 진정으로 "간절히 바란" 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저 간절히 바랐다고 하는 주체는 바로 라자로 안에서 굶주리고 계셨던 하느님이셨습니다. 라자로도 허기졌지만 하느님도 허기지셨습니다. 라자로도 아팠지만 하느님도 아프셨습니다.
"간절히 바랐다."(루카 16,21) 이 말씀 안에 깊이 머무르니 하느님의 굶주림, 허기, 소외감, 서러움, 슬픔... 모든 고통이 밀려옵니다. 라자로와 함께, 하느님과 함께 어느 누구도 관심 기울여 주지 않았던, 채워주지 않았던 가난에 잠깁니다
그렇지만 부자는 아직 자기 처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의 고통을 해소해 달라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라자로를 심부름꾼으로 지목합니다. 여전히 부자에게 라자로는 함부로 부려도 되는 가난한 이에 불과합니다. 그러고 보니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 가난한 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네요. 그의 존재를 몰라서 못 도와주었다는 변명은 꺼낼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루카 16,30) 자기 가족을 위해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할 때 부자는 결정적으로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알고 보니 그는 무엇이 잘못인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것 가지고 내가 즐기는 게 무슨 잘못인가?"라는 당당함 뒤에는 양심의 불편함이 없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양심을 통해서도 말씀을 하시기에 외면할 수는 있어도 몰랐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내 것이라 생각해서 나와 내 식구만 즐기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이웃 당사자는 물론 하느님을 얼마나 굶주리게 했는지 모르지 않은 부자는 결국 제 입으로 "회개"라는 말을 올립니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예레 17,10) 하느님께서 스스로 속을 떠보신다는 표현을 하시는 게 좀 불편합니다만, 하느님께서 부자에게 재산 축복과 더불어 함께사는 행복까지도 누리게 해 주시려고 라자로를 통해 그에게 계속 사인을 보내신 것이라 받아들이면 한결 받아들이기 쉬울 겁니다. 그 기회를 줄곧 외면한 부자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묵상이 부자를 단죄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흐른다면 그건 이 비유를 들려 주신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구원은 당장 눈 앞에 기적이 펼쳐지길 바라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믿고 따르는 데서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예수님의 말씀을 뒤집어 보니,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잘 듣고 본질을 깨달은 이라면, 예수님의 복음 역시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거란 의미로 들립니다. 세상에 살 때 "좋은 것들"을 받았건 "나쁜 것들"을 받았건, 부자였건 가난했건, 배웠건 못 배웠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동안 충실히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따르던 이들이 새로운 계약을 받아들이고 죽은 이들 가운데 살아나신 분을 믿는다면 구원은 당연히 가능합니다.
당시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이 오해했을 뿐,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을 뒤집어 엎어 버리는 전복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에게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 벗님에게 10억을 주시는데 지금 당장 일시불로 줄 수도 있고, 10년 후에 복리이자 붙여서 줄 수도 있고, 죽고나서 100배를 줄 수도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세요? 저는 참 슬프게 들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려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브라함도 힘을 써 줄 수 없는 그 큰 구렁이 어떻게 생긴 걸까요? 그건 부자가 생전에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거나 돕지 않은 횟수만큼 골이 하나둘씩 늘어나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깝고 두려웠습니다. 더욱이 이 골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자신만이 나눔과 베품을 통해서만 징검다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한 더 나누고 베풀어야 겠다고 되새겨 봅니다.
오늘 저와 함께 징검다리 하나 놓지 않으실래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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