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창세 37,19)
여러분은 꿈을 많이 꾸시나요? 어떤 사람은 매일같이 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은 매일 5-6가지의 꿈을 꾼다네요. 다만 그것을 기억하고 하지 못하는 것 뿐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어떤 꿈을 주로 꾸세요? 주로 개꿈이 많은가요? 아니면 거룩한 꿈을 많이 꾸시나요?
어릴 적엔 참 꿈이 많았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꿈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만큼 현실적이 되어간다는 말이겠지요. 꿈은 현실보다는 이상과 관련있지요. 그래서 만약 내가 아직도 이루고픈 꿈이 많다면 나는 젊은 겁니다. 반대로 꿈이 없다면 나는 나이가 젊더라도 이미 늙은이이지요.
요셉은 꿈쟁이였습니다. 예수도 꿈쟁이였죠. 저의 사부 아씨시의 빈자 성 프란치스코도 꿈쟁이였습니다. 그들은 감히 하늘나라를 꿈꿨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그런 꿈을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실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이상주의자, 꿈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꿈을 꾸는 한 나는 살아있고 참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내가 더이상 꿈을 꾸지 않으면 나는 죽은 자와 다름없고 비관적 현실론자가 됩니다. 참 종교인은 그래서 꿈쟁이요 낙관주의자요 희망과 기쁨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서 실현됩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자식들이 함께 물려받듯이 이미 잘 살든 못 살든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기뻐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답니다. 참다운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릴려면,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처럼 이승에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고난을 겪더라도 그 때문에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그 영광된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필수과정이니까요. 오히려 고난이 없다면 그걸 문제시해야 할 겁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표시니까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태 21,42)
오늘 특별히 짠한 마음으로 머물게 된 구절입니다. 버려진 이, 이해 받지 못하고 미움 받은 이에 의해 역사가 이어지고 새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나게 되었듯이, 예수님을 통해 온 인류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걸까요? 요셉의 버림받음과 예수님의 죽음이 결국 이스라엘에게도 인류에게도 선익이 되었으니 악행으로 빌미를 제공한 요셉의 형제들이나 소작인들(로 비유된 이스라엘 기득권층)도 하느님의 뜻을 행한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은 자칫 선과 악의 경계를 흐려 과정 안의 악을 정당화하고 하느님의 뜻을 결과주의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선이시고 궁극의 선이시라 악을 심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이 악을 행하라고 부추기지 않으십니다. 선의 결핍인 악이 상처의 왜곡과 탐욕으로 인해 생긴 인간 마음 속의 틈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스며들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비극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창세기 성조들의 범죄 이야기에서부터 오늘날의 슬프고 아픈 폭력적 사건들을 통해 직접,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고요.
"그럼 하느님은 뭐하시는 분이냐? 이런 인간의 폭력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 거냐?"고 항변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란 최고의 선물을 주셨지요. 이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은 성인도 될 수 있고 타인을 해치는 범법자도 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더 그럴듯하게 꾸미시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거나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하느님은 인간이 상처를 왜곡하거나 탐욕에 빠져 망가뜨리고 훼손하고 짓밟은 지점에서 또다른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랬고 예수님의 경우가 그랬으며 무지와 두려움으로 한순간 무너졌던 우리 삶의 굴곡을 통해서도 그리 하셨습니다.
사순절. 우리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께 깊은 회개의 눈물을 분향처럼 올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존재 가득 새기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버려진 돌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드시는 하느님께서 요셉을 버림받은 형제, 이민족의 노예에서 민족의 구원자로, 예수님을 가장 치욕스런 형이 집행된 사형수에서 다시 살아난 하느님의 아들로 일으켜 세우셨듯이, 볼 수록, 또 알 수록 비천하고 수치스런 우리 죄악의 부끄러운 지점을 선과 생명의 출발점으로 바꿔주시기를 믿고 또 바랍니다.
수천 번, 수만 번 죽임을 당해도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는 순수한 신뢰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주인의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과 같이 적극적으로 악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그들 못지 않게 하느님 사랑을 못 알아들어 "제때에 소출을 바칠 줄 몰랐던" 배은망덕한 소작인에 불과했던 우리가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소작인"(마태 21,41)이 되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도 꿈을 꿉시다. 하늘나라의 꿈을 꿉시다. 그러면 우리는 상속자가 되고, 버림받은 돌이 머릿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부족하고 무지랭이같은 우리이지만 하느님의 자배로 이미 하늘나라의 상속자 되었음을 기뻐하며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지금 겪고있는 고난 때문에 아파하고 실망하지 말고 그 축복에로의 여정을 인내하며 잘 걸어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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