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로마 4,18)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앞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고 온통 절망 뿐입니다. 이제 다 내려놓고 그냥 스러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안 보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희망이 절벽'인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가장 큰 위기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가장 강력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닥까지 내려 간 사람은 이제 더이상 내려 갈 곳이 없고 올라 갈 일만 남았으니 희망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지는 사람은 그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두려울 뿐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바닥을 차고 올라 올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동네친구들과 냇가에서 멱감으며 깊은 곳 바위에서 다이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깊어서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중도에 발버둥치며 올라오다가 엄청 물을 많이 먹고 혼난 적이 있어, 물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렸다면 바닥을 치고 더 쉽게 올라올 수 있었을 것을 괜한 두려움에 억지로 발버둥치다가 더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삶의 진리 하나를 터득했습니다. "추락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지 않을만큼 견딜 힘을 주신다. 더 큰 기쁨과 축복을 위해 작은 추락은 마땅히 견디어내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올라가고 있나요? 그럼 힘차게 비상하십시오. 내려가고 있나요? 세상 바닥을 더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모두가 축복입니다. 오르막도 축복이고 내리막도 축복입니다. 올라감도 축복이고 내려감은 더 큰 축복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에 대해 경탄하며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사실 희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필요합니다. 이미 희망과 가능성이 예측된 상태에서는 믿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요셉에 대해서도 똑같이 경탄하며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요?" 나와 평생을 행복하게 함께 하겠다고 언약한 그 아리따운 나의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베어 왔는데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아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나요? 절망의 늪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희망의 꽃을 어떻게 보셨나요?
벗님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미래가 희망적입니까? 희망이 보이기 때문에 희망적입니까? 아니면 희망이 없어도 희망적입니까?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희망의 사람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 참 신앙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 신앙인입니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은 함께 갑니다. 신망애 삼덕은 그리스도인의 필수덕목입니다. 희망적이지 않는 사람이 결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 삶에 명확하고 실현 가능하며 성공까지 손에 잡힐 듯한 미래가 보장된다면 행복할까요?
아브라함과 요셉의 경우에서 보듯, 신앙은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을 때 발휘되고, 희망은 희망이 없어보이는 순간에 빛을 냅니다. 모든 것이 안전하게 보장된 상황이 인간적인 위안은 줄지언정,
영혼이 정신 바짝 차려 깨어 있지 않으면 믿음의 거품은 사그라지고 희망의 빛 또한 스러지고 마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니 믿음과 희망이 절실한 순간을 맞닥뜨렸다면 감사하십시오. 믿음과 희망 따위는 저만치 제쳐놓고 눈에 보이는 것만 붙잡고 따라가도 앞길이 창창하다면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구원은 산술적 논리와 인과 관계를 발판으로 다가오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드러나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 묵묵히 아무 말 없이 충직하게 성심껏 "없는 길"을 갈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좋은 일을 많이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요셉처럼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조차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음으로써,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의 선물을 주는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조 아브라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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