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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3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살다보면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내가 베푼 사랑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 형제같은 사람에게서 받게 될 때 정말 용서가 안되지요. 벗님 여러분에게도 아직 용서할 준비가 안 된 상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겠지만 그래도 용서가 하느님의 일이라 믿고, 스스로를 억지로 다그치고 밀어붙이기보다, 나와 그를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린 채 삶이 흘러가는 대로 가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아픔과 미움이 옅어지고, 어느새 언제 그랬나 싶게 희미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겁니다.

베드로도 오늘 정말 견디기 힘들었나 봅니다. 형제들 중에 누가 자꾸만 깐죽거리고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을 갖고 논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참아주었겠지요. 그런데 더이상 견딜 수 없는 모욕감에 예수님의 재가를 받아 오늘은 한대 멋지게 쥐어박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습니다. 

벗님도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하지요!? 예수님은 허허 웃으시네요.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구요?!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일곱 번을 참았다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참아주라는 말씀이겠지요. 무조건 참아라는 말씀은 아닐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을 수 없는 일이라면 애시당초 혼줄을 내주고, 이미 몇번이나 참았다면 끝까지 참고 용서하라는 뜻이 아닐른지요?

사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수없이 하느님 사랑을 배신하여도 끝까지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를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그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도 그럴 수밖에요. 오늘 나에게 잘못한 이, 그래서 용서가 잘 안 되는 이, 그를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 주고 하루 시작하면 어떨까요? 내가 용서하기 힘들지만 용서의 대가이신 우리 아버지께 맡겨봅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벗님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많지요?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는 더 많구요. 만약에 하느님께서 이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마저도 마음대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없나 봅니다. 우리의 주도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먼저 내 죄를 아파하고 용서받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고 싶지 않은 사람을 용서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자기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백성사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보통 기도와 희생, 돈으로 보속하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효험이 있는 보속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가 용서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는 몇 십배, 몇 백배로 내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러니 남을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몇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즉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가장 용서하기 힘든 상대는 누구일까요? 자기자신이 아닐까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듣고 자란 이는 마음의 미움과 분노를 외부로 돌리기보다 먼저 자신의 문제를 성찰하게 되지요. 그런데 "제 탓이오!"가 지나치면, 모든 잘못되고 어긋난 일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무지와 욕망과 잘못된 식별로 스스로를 망쳐버렸다는 죄의식에 갇혀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수도 있습니다.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에서는 네브카드네자르 임금이 명한 우상 경배를 거부한 유다청년 세 명이 불가마에 던져졌을 때, 그 중 한 명인 아자르야가 불가마 안에서 바친 기도가 나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다니 3,37)

여기서 그의 기도가 그쳤다면 불가마 안에서 올린 그의 기도는 자기비하와 신세 한탄으로 끝났겠지요. 그러나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자비에 무한한 신뢰를 드러냅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 얼굴을 찾으렵니다."(다니 3,41)

올바른 자기 인식은 이렇게 스스로를 구렁으로 몰아넣지 않고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상황에서도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이미 내 모든 허물을 탕감하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신뢰와 의탁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용서하신 자신에게 내가 또 다시 탓을 돌리는 것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임금과 빚진 종, 종의 동료 안에서 벌어진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혹 그러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러실리야 없겠지만,) 임금이 나중에 했던 것처럼 내게 베푸셨던 어마어마한 자비를 거두시기 전에 어서 스스로를 용서하도록 애써야겠지요. 허물과 부족함과 실수와 실패까지 포함해 자기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다지 쉽고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만,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 하셨으니 이제 우리에게는 꼭 해야 할 의무가 되어버린 겁니다.

내 못난 탓에 이제 다 끝났다고, 다 망쳐버렸다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울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너 대신 죽었으니 너는 내 생명으로 힘내어 살아라." 하시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화답송) 그분은 절망의 끝에서도 살 길을 열어 주시고 바른 길을 가르치시고, 또 친히 길이 되어 주는 분이십니다. 그 길로 다시 한 걸음만 꼭 한 걸음만이라도 시작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그분께서, 그분 자비가 하실 겁니다. 아멘.

오늘 용서야말로 가장 큰 은혜요 축복임을 가득히 체험하는 날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