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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미사의 독서들에는 '나아만'이라는 장수가 동시에 등장합니다. 이방인이고 나병환자였던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순종하여 치유를 받았습니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물론 그의 치유가 순조로웠던 건 아닙니다. 나아만 자신이 나름의 선입견과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영접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뭔가 눈에 보이는 주술적 치료 행위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러니 엘리사의 비대면 말씀 전달 방식이 못내 서운했을 터이고, 게다가 그저 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는 지극히 평범한 처방전도 못마땅했겠지요.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2열왕 5,14)

다행히 나아만은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감히 부하들이 나서서 예언자의 말을 따르도록 그를 설득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따랐고 깨끗해집니다!

사실 기적의 효험은 요르단 강물보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심부름꾼을 시켜 전한 예언자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순종한 덕입니다.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이방인 장수 나아만이 고백합니다. 이 선언이 국경 안의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피 한 방울 안 섞인 국경 밖의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 민족이 독점할 수 없는 온 인류의 아버지요 주인이십니다.

복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합니다. 방금 전까지 예수님께서 전하신 은혜로운 말씀에 감탄하던 나자렛 주민들이, 자기들이 익히 아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왈가불가하면서 돌변하는 통에 불안한 냉기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제1독서에서 보았듯이 누구나 선입견에 걸려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에 주저 앉아서 어긋난 기대치와 과거 타령만 하고 있다면 구원은 요원하지요. 몸을 돌려 하느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4,2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4,25).

나자렛 주민들은 자기들이 방금 듣고 놀라워했던 말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 선입견에 넘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거듭거듭 말씀하시지만 냉담하게 식어버린 그들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되려 그 말씀을 죽이려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기적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단번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날려버릴 약이 어서 등장했으면 좋겠고 아픈 사람은 얼른 나았으면 좋겠지요. 큰 피해를 입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제책도 하루빨리 시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살지 않으면 누가 아무리 많은 재화를 가졌다 해도 혼자만 안전할 수 없다는 걸 실감하고 사회적 연대성과 책임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구석구석 도처에서 작고 여린 하느님의 자취들이 보이고 또 들립니다. 가난한 이들의 나눔, 불편을 고수하는 양보, 이익을 포기하는 배려, 고된 희생, 용서... 사랑을 일으키는 그 마음마다에 하느님께서 속삭이고 계십니다. 그 선한 목소리에 순종하는 이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지요. 바이러스의 독한 기운을 사랑으로 희석시키고 정화하는 중입니다.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복음 환호송).

이 어려운 시국에 우리가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말씀을 바라고 듣고 순종하는 이는 자기도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그 마음들이 모여 온 세상을 정화하는 강물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