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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부활 제 2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4월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영과 육에 대한 담화가 계속됩니다.

"영에서 태어난 이"(요한 3,8)는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육의 한계와 세상 법에 자유롭다는 것은 맘대로 어기고 무시하고 막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그 규정들이 없어도 삶에 제약을 받지 않을 만큼 오로지 하느님 뜻 안에 머물러 산다는 뜻일 겁니다.

"내가 세상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세상 일과 하늘 일", 예수님은 공생활 내내 유다인들과 이 부분에서 합치점에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매달리면서도 하늘의 일을 지극히 인간적 일로 제도화한 유다인들에게 진짜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생경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존재가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3)고 하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느님이시면서 온전한 인간이시기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추셨습니다. 육화하신 예수님은 모든 인간 조건을 다 지니셨기에, 육의 한계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인간 실존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분이시지요. 영과 육이 온전히 통합된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높이 들어올려지심으로써, 땅과 하늘을 잇는 연결통로가 생긴 것입니다. 세상의 한 변두리에 수직으로 세워진 십자가는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잇고 화해시키는 사다리가 됩니다. 자원하여 거기 매달려 계신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께서 몸소 인간의 치욕과 고통, 죽음이라는 한계를 떠안아 하늘 품으로 활짝 펼쳐 올리심으로써 하늘의 일로 승화시키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가 바로 다음 절에 이어서 나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영원한 생명!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본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용하신 것이었다가 원조의 범죄 이후 거두어졌지요.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 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2-24)

낙원에서 추방되고 생명 나무로의 접근이 차단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은 잃어버린 영의 세계, 한때 누리던 하늘의 삶이기에, 말하자면 영원한 본향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영적 세계나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에 대해 존재적 그리움과 회귀본능을 배냇병처럼 가지고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희생제사를 통해, 이미 세상 일에 인이 박힐 대로 박혀 영의 사정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영의 세계, 하늘의 일, 영으로 다시 태어나 영원히 누리는 생명을 되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이고요.

영과 육, 하늘과 땅, 하느님 일과 세상 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건 어쩌면 '주권' 문제일 것 같습니다. 세상은 세속의 원리로 돌아가고 하늘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시지요.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하느님 주권을 청원하고 고대합니다. 세상이 이기주의와 탐욕, 약육강식의 원리를 질서라고 부른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하늘의 원리, 영의 원리는 그 반대일 겁니다. 이기주의 대신 친구를 위해 죽는 가장 큰 사랑의 원리, 탐욕 대신 나누고 비우는 원리, 약육강식 대신 가장 약한 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원리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모인 그들은, 이렇듯 하느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사도 4,34)

영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이 하늘의 원리를 살고자 할 때, 물질적 궁핍은 물론 소외, 미움, 증오, 차별, 무시, 지배, 착취 등 인간 존엄성을 궁핍하게 피폐하게 만드는 악이 발 붙일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미 그들은 "영에서 태어난 이"(요한 3,8)로써 이 지상에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으니, 세상 물질과 권력 명예 계급에서 자유로울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자유는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 주권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청해야 합니다. 육의 조건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믿고 영의 원리와 통합해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께서 들어올려지심으로 화해시키신 영과 육의 조화를 살아가기를,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오늘의 미사는 이 모든 바람을 앞질러 선포하며 열립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세.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신다. 알렐루야."(입당송)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4월 한달 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그 수고의 열매가 영적 기쁨으로 보답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