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아스 호숫가에 펼쳐진 정겹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요한 21,4)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언젠가 그분을 만났던 어느날(루카 5,5 참조)처럼,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해 빈 배인 그들 앞에 나타나 물으시지요.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 "못 잡았습니다."(요한 21,5)
과연 제자들은 못 잡았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여전히 빈 배인 채로 있을 뿐입니다. 일생을 걸었던 스승을 잃고, 부활하신 그분을 몇 차례 뵙기는 했지만 이내 사라지셔서 딱히 무얼 어떻게 실행해야 할 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옛 터전으로 돌아와 그때 하던 일에 다시 손을 댑니다. 이상과 의미를 찾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려둔 채 떠났던(마르 1,16-20) 곳으로 되돌아와서 그때 버렸던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이미 잔뼈가 굵은 익숙한 일에 뛰어듭니다. '그래도 이건 자신있지' 하면서요. ... 하지만 여전히 빈 배입니다.
예수님의 조언과 순명, 그리고 만선의 놀라움과 기쁨... 이어지는 고백!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뭍에는 "숯불"이 있고 "물고기"가 있고 "빵"이 있습니다. 찬 새벽 공기, 피로에 젖고 물에 젖은 장정들, 타오르는 불길, 생선이 익고 빵이 구워지는 냄새 그리고 스승의 환대와 나눔... 얼마나 따사롭고 행복한 장면인지요.
숯불, 물고기, 빵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표상이거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물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뭍에서 당신 자신을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먹이려고 차려 놓으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밤새 수고한 이들에게뿐만 아니라 새 날을 맞는 모든 이에게 아침 식사는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차려 주시고 또 함께 나누는 아침 식사 역시 앞으로 펼쳐질 새 삶을 준비하는 동시에 스승과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을 갱신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3)
젖을 물린 엄마가 아기에게 주는 건 단순히 젖만이 아니라 엄마 자신입니다. 고된 노동으로 밥을 벌어온 아빠에게는 아이 입에 들어가는 것이 곧 자신입니다. 그래서 흐믓하고 뿌듯합니다. 어떤 고통도 수고도 피로도 괜찮습니다. 내 땀과 눈물 피와 살이 자식의 입으로 들어가 생명이 되고 활기가 되고 행복이 된다면 지옥인들 마다할 리 없습니다. 자식이 곧 나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도 주시고 물고기도 주십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 또 주셨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미 예수님의 생명은 제자들 존재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되고 그들이 예수님이 되어갑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현존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 누구도 그분이 누구신지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스승 예수님만이 그러실 수 있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한 21,14)
신학적으로 3은 완전한 숫자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 번째 발현은, 나중에 이어질 사랑 고백(요한 21,15-19 참조)까지 합하여 참으로 의미 깊고 완전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다시 한 번 온전히 주셨기에 제자들은 부족하나마 또 다른 예수로 살아갈 영육의 양분을 얻은 겁니다. 이제 그들은 성령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준비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사도 4,7)
불구자를 치유하고 백성을 가르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가 유다의 권세가들, 종교지도자들 앞에 섰을 때 받은 질문입니다. 사실 질문 중에는 답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정곡을 찌르는 '좋은 질문'이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 입장에서 꼭 듣고 싶은 질문이 아닐까 할 정도로, 고맙게도 그들의 이 물음이 딱 그렇습니다. 그 답을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본질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이니까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대답은 옛 베드로의 것이 아닙니다. 현재 베드로가 지닌 예수님의 이름이 주님의 일을 한 것이고, 베드로 안에 흐르는 예수님의 생명이 그 답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미 그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이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벗님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그 일이 신나고 기쁜 일입니까? 아니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입니까?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것 없어 보여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라 여기고 기쁘게 흔쾌히 일한다면 내가 상상치도 못하는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주님의 일로 여기고,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오늘 어부가 한번 되어 보실래요? 물고기를 잡든, 사람을 낚든 만선의 기쁨을 안고 즐거워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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