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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부활 제 6주간 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제1독서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6,11-15
11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트라케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폴리스로 갔다.
12 거기에서 또 필리피로 갔는데,
그곳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첫째가는 도시로 로마 식민시였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13 안식일에는 유다인들의 기도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성문 밖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14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15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15장에서 16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라서 양쪽의 장이 다 걸쳐 있습니다. 15장 끝부분에서 예수님은 곧 오실 성령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하시리라고 하시고, 16장 앞부분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미리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 26-27)

"증언"은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만지고 감동한 내용에 대해 전하고 알리는 것이 "증언"이지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증언을 하는 주체는 분명 사람이지만, 그 사람 입에, 그의 안에 내용을 담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증언"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성령의 증언에 힘입지 않고 인간의 말재주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삼 년을 보고 들었어도 제대로 다 깨닫지 못했다는 걸 복음사가가 이미 우리에게 솔직히 전하고 있으니까요. 제자들이 체험한 것들을 성령께서 "기억하게" 해 주시고 "해석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필리피에서 말씀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 일행의 선교활동을 서술합니다.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전해지려면 "증언자"와 증언 "내용"뿐 아니라, 증언을 "듣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귀 기울이게 하시는 분, 즉 선교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존재가 선교의 필수요소인 셈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증언의 "현장"에 성부, 성자, 성령, 즉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증언자"인 제자와 성령의 내면에 담겨 있던 "내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듣는 이"의 귀를 통해 그의 마음과 영혼을 관통해 들어가 자리잡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내용이신 예수님께서 듣는 이를 꿰뚫고 들어가실 수 있게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분은 성부 하느님이시고요. 그러니 단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성삼위 하느님께서 사력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힘을 모으시는, 온 우주와 맞먹는 거대한 과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이 총체적인 사랑의 과정이 모두에게 순조로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1-3)

만일 하느님께서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주지 않으시면, 증언자에게서 발설된 증언의 내용이 듣는 이에게 침투되지 못할 겁니다. 마치 딱딱한 갑옷처럼 경직된 그의 존재가 예수님을 튕겨 내어 거부하면 그에게 복음은 스며들지 못합니다. 그는 이 순간 자기를 위해 일하시는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알지 못한 채, 무엇과도 섞일 수 없고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 돌같은 존재로 남을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어떤 씨앗도 품을 수 없고 싹도 틔울 수 없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돌덩이, 불모지처럼 멈춰버리게 되고 말지요.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닥쳐올 고난의 여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요한 16,1) 하시려는 것이고, 또 "그들의 때가 오면 (당신의) 말을 기억하게"(요한 16,4)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두가 다 알아볼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감추어진 보물이기에, 증언자에게 위험 요소들이 반드시 닥쳐올 터이지만, 그래서 복음을 위한 박해와 죽음이 더욱 가치롭고 의미 있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마음 준비를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천 년이라는 시간과, 지구를 빙 도는 거리를 지나, 역사의 길고 험한 과정을 거쳐 기적처럼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복음이,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요. 또 이를 가능하게 하신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작업이 얼마나 송구하고 감사한지요.

선교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너무 좋고 자랑스러워 타인도 그분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기쁨과 함께 터져 나와 분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우리 입을 통해 그분의 이름이 전해지는 순간, 선교는 우리 일이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일이 되지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을 듣는 상대방 안에서도 성삼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 현존하시며 협력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두려워 말고, 주님과 나누는 사랑으로 기쁨 가득한 마음을 드러냅시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화답송)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