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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31주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31주일 (루카19,1-10)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참 정겹고 아름다운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캐오가 되어 달려 봅시다.

세관장이고 부자인 그는 꽤 많은 걸 소유한 사람이지요. 동족이나 이웃에게 미움과 경멸을 받고는 있지만 누리는 것에 비하면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자칭 정결하다는 이들의 손가락질이 삶의 방식을 바꿀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그에게 관심을 끄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자기 같은 이들도 꺼리지 않고 친구가 되어 주신다네요. 그는 예수님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루카 19,4).
그가 작은 키 때문에 군중에 가려진 예수님을 보기 어렵게 되자, 달려가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지요. 그만큼 그의 갈망이 컸다는 뜻입니다. 당장 무슨 결심이 선 것은 아니지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를 꼭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아래로 내려오신 분이 땅에서 고개를 들어 한 죄인과 눈을 맞추십니다. 낮은 곳에서 어둡게 살던 한 죄인이 위로 올라가 아래에 계신 분과 시선을 맞춥니다. 위 아래가 반복 교차되다가 한 지점에서 서로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려면 더 올라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내가 더 괜찮아지면, 더 깨끗해지면, 더 거룩해지면, 형편이 더 나아지면 그분과 스스럼없이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요. 그분도 내가 더 정돈되고 말끔해져야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초라하고 엉망인 형편을 보이면 그분이 멀리 도망가 버릴 것 같습니다. 루저, 실패자는 하느님도 외면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헛된 것으로라도 치장을 하고 올라가려 합니다. 그분은 나를 만나러 일찌감치 저 아래, 내 원래 자리로 내려오셨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묵기를 자청하십니다. 자캐오야말로 신이 났지요. 환대는 집 주인이 손님을 기꺼이 기쁘게 맞아 섬기는 덕행인데, 지금 이 순간 집도 없으신 나그네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캐오를 환대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동족에겐 별로 못 받아보던 온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세상의 냉대를 비웃으며 자기 안에 갇혀 살던 자캐오를 세상의 문 앞에서 환대하시는 겁니다. 이제 자캐오는 외적으로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환대해 맞아들이지만 내적으로는 세상의 환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은 영혼이 먼저 깨닫습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루카 19,6).
그런데 이번엔 사람들이 편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지만 율법을 준수하며 바르게 사는 자기들보다 세관장을 택하시다니, '예수님도 돈을 좋아하시나보군' 투덜거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대는 돈에 대한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개방화된 물신주의 사회입니다만,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캐오를 손가락질해 온 이들은 깊숙히 감춘 부러움과 질투의 숨은 욕망을 율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정당화했을지도 모릅니다. 죄인인데다 부자이기까지 한 자캐오와 그의 집에 묵으시는 예수님이 그들 내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만 것이지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사람들의 시끄러운 내면이 들렸을까요? 자캐오가 예수님께 먼저 제 결심을 밝힙니다. 누가 감히 먼저 제시할 수도 없는 통 큰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갈망, 그분을 향해 달리고 오른 여정, 그분과의 눈맞춤, 그분의 부르심과 앞지른 환대가 그의 영혼 안에서 새창조를 이루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지혜 11,26-12,1).
죄인이라 내쳐진 자캐오를 소중히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의 안에 잠재된, 아직 선하고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지 못한 주님 불멸의 영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냉대와 소외, 비아냥거림에 익숙한 자캐오는 예수님의 환대로 제 본래 모습, 하느님의 모상성을 되찾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2테살 1,11).
자캐오는 이제 자신 안에 심겨진 부르심을 그분의 힘으로 완성해 가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한 사람의 회심이 가족 모두, 집안 전체를 구원합니다. 죄의 연대성을 넘어서는 구원의 연대성입니다. 자캐오의 결심은 자기 영혼과 집안 전체는 물론 자선의 수혜자들에게도 구원이 될 것입니다. 자캐오의 통 큰 결심에 이은 예수님의 통 큰 구원 선언은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는 말씀에 기인합니다.

구원은 앞질러 달려가 오른 저 높은 곳에서가 아니라, 다시 내려와 땅을 딛고 선 내 삶의 자리에서, 곧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캐오 회심의 실마리는 영 새삼스런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일상에서 아우성치던 소음 중에 들어 있던 것이었지요.

어둠 속에 머물던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눈맞춤이 그 영혼 속에 파묻혀 있던 하느님 모상성을 흔들어 깨웁니다. 소중히 여겨 주며 세상의 품으로 맞아 들인 환대가 얼마나 크고 광대한 선의 파급으로 이어지는지 오늘의 흥미진진한 복음의 대목은 보여 줍니다.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아직도 더 오를 궁리, 더 나아질 기회를 찾아 달리고 있다면 이 말씀에 좀 더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지금, 여기, 이대로도 좋다고 하십니다. 우리 회심과 구원의 열쇠는 이미 우리 안에, 우리 존재와 역사 안에 다 들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