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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31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31주간 토요일(루카16,9ㄴ-15)

 

복음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9ㄴ-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재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 16,9)

 

재물이 불의한 재물과 의로운 재물로 나뉘는 걸까요, 아니면 모든 재물이 다 불의한 걸까요?  자칫 이원론이나 극단주의, 합리화로 빠질 수 있는 질문일 겁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주님의 애정이 짙게 깔린 루카 복음서에는 재물에 대한 복음사가의 다소 부정적인 견해가 드러나 있는 듯합니다.

본시 모든 재화의 원천은 하느님이시지요. 그분이 모두 창조하셨고 또 돌보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믿고 맡기신 인간들 사이에 탐욕이 불거지면서 재화의 분배와 소유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지요. 결국 하느님의 모상이라서 귀하디 귀한 사람들 사이에 계급이 생기고 격차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사실, 엄밀히 말하면 더 가진 자의 잉여분 재물은 잃은 자가 원래 소유했어야 할 '제 몫'인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루카 16,11)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루카 16,12)

 

예수님은 불의한 집사 비유와 연결하여, 재물을 다룰 때 성실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재물은 비록 불의하지만 성실히 다루어 의롭게 사용할 수 있고, 재물이 원래 하느님의 것이지만 성실히 다루어 공정을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자유경제 체제에서는 재물의 소유를 인정합니다. 소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소득에 부과되는 세금이겠지요. 세속의 사정이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 셈법은 어떨까요? 하느님께서도 재물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정당성이 나눔과 희사를 통해 획득된다는 것이 세속과 다를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희년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당신의 소유와 부유함을 주장하시지 않고 내려놓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모범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주권에 대해 완전한 순종과, 소유에 대한 완전한 비움을 통해 예수님은 오히려 모든 만물 위로 드높여지셨지요.(필리 2,10 참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예수님은 재물과 하느님을 각각 다른 편에 놓으십니다. 대충 두 팔로 뭉뚱그려 한꺼번에 안고 갈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생각은 바리사이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들 중 다수가 돈을 좋아하는 부자이면서 동시에 종교 권력까지 거머쥐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그들은 하느님과 재물, 둘 다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을 테지요.

그리스어로 재물을 가리키는 말이 우상을 뜻하는 "맘몬"에서 유래한다고 하네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재화가 결국 사람을 두루 이롭게 하는 도구 차원을 넘어서, 사람의 욕망을 쥐락펴락하는 우상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재물이 불의하게 남용되기는 너무 쉽고, 또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기는 더 어려워진 현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이상하게도 재물이 많은 이가 힘과 지식과 명예까지 움켜쥐는 세상입니다. 기회와 공정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지요. 사람의 내면과 인격을 보기보다, 소유와 겉꾸밈에 열광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폼 나게 더 가져보려고 이웃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전력질주 합니다. 가난을 무시하고 혐오하면서요. 그런데, 이 모든 노력은 하느님께 오히려 "혐오스럽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우러러보이고자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슬픈 결과를 얻는 셈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재물이 축복이 되는 지혜를 전수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하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필리 4,12.14)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누려도 교만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를 위한 필리피 신자들의 지원과 희사는 오로지 그들과 하느님 사이의 일이 됩니다.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서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재물이 가치와 정당성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은 향기로운 예물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입니다."(필리 4,18)

주님에게서 받은 양심을 순수하고 진실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점유하고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가난하고 도움이 절실한 이들의 몫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면 결국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되니, 재물이 주는 이와 받는 이에게 동시에 축복으로 변모합니다.

그런데 재물은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우상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끝없이 매달리다 결국 하느님도 영혼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상, 두 존재가 화합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말씀 묵상을 통해 만나는 벗님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 주신 것을 성실하고 의롭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많건 적건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 우상으로 돌변해 악취를 풍기기 전에, 고귀한 축복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손에서 베풀어지는 사랑과 더불어 우리 자신까지 "향기로운 예물,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이 될 것이니 이만한 영광이 또 어디 있을까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탐욕 사이에서 신앙의 외줄타기를 하며 사랑의 소명을 붙잡고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