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서는 사두가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늘 바리사이들의 공격을 받던 예수님께 이번에는 사두가이들이 다가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을 뿐더러 또 성경 중 오경만을 인정하는 사제 계급의 고위층입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루카 20,29). 그들은 완전한 수 일곱을 들어 우리의 귀에 상당히 당혹스런 예를 듭니다. 이는 누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제가 후사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역연혼 규정으로 신명 25,5-10에 근거합니다. 형제를 통해서라도 상속인을 마련해 주어서 하느님께서 나눠주신 가문의 상속 재산인 땅과 그 집안의 이름을 유지하려는 목적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루카 20,37).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는 율법서 안에서 답을 제시하십니다. 이미 죽어 묻힌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여전히 하느님 앞에서 생명을 누리기에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을 모세에게 "그들의 하느님"으로 소개하신 것입니다(탈출 3,15 참조).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38). 이 세상을 지배하는 생명과 죽음의 원리가 저 세상에서는 다르게 작용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뻔히 죽은 것으로 아는 이들이 실상 하느님 앞에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를 유지하고 자손을 이어가는 혼인 제도 역시 달리 작용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이들은 부부간의 사랑이나 생식의 원리가 아닌, 하느님과의 사랑으로 존재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일곱 형제의 순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언제 들어도 우리를 숙연케 만드는 장렬한 신앙 고백입니다.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 7,9). 모진 고문과 조롱, 모욕 앞에서 형제들이 내놓는 응답은 한결같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어 이교 예식에 당당히 저항합니다. 이방 민족의 폭력과 일방적인 배교 강요에 대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께 신의를 다하려는 그들은 육적인 생명을 초개같이 여깁니다. 이는 목숨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상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감과 신뢰에 기인합니다.
사두가이들에 의하면 이 일곱 형제의 죽음은 헛되고 무의미하겠지요. 있지도 않은 부활 때문에 처참히 고문 당하고 귀한 목숨까지 잃는 바보들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일관되게 영원한 생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화답송). 육신의 숨을 넘기고 죽음이라는 단계를 지나 새로이 눈을 뜨는 그 순간, 마치 아기가 처음으로 눈꺼풀을 들어올려 가족을 마주하는 환희의 순간처럼, 우리도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사랑 가득한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를 채울 흡족함이란 이 지상에서 맛본 어떠한 얕은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되리라 믿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엄청난 고통 앞에서 부활 신앙을 견지할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2테살 2,3). 초대교회 신자들 역시 박해와 순교의 위협에서 용기를 내어야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는 원동력은 자기의 인간적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북돋아주시는 힘이었지요. 세상의 악에 의해 스러지지만 죽음이라는 악, 그 마지막 원수에게서 구출되리라는 희망은 "주님의 성실하심"에 기인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2테살 2,5). 사도의 자상하고 사려 깊은 축복은 일상의 십자가에 흔들릴 우리의 실존을 깊이 이해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꼭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는 순교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견뎌야 할 도전은 만만치 않으니까요. 성실하신 하느님께 충실한 사랑으로 응답하려는 마음 역시 주님께서 일으키시고 이끄십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 살아 숨 쉬며 움직입니다. 모든 이가 함께 그분의 따사로운 사랑의 빛 속에서 감사하고 사랑하고 생명을 누립니다. 그 행복 속에 우리를 내리누르는 십자가와 고통은 지나가는 찰나의 스침일 뿐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영성체송). 이 아름다운 시편 구절은 찬란한 지상의 삶 뿐만 아니라 미지의 죽음 이후 삶까지도 열망하고 기대하게 만듭니다. 아늑하고 푸근하고 다정한 아버지의 가슴, 목자의 품에서 이 지상에서와 같이 천상에서도 행복하리라는 약속이지요. 심장을 찌르는 가시나 살을 베어내는 칼날 같은 세상의 고통 따위가 이 충만한 행복을 덜어낼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 부활을 믿는 우리는 이 행복의 연장선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