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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 오상선 신부님 ~

그리스도왕 대축일

 

제1독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3
그 무렵 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2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1,12-20
형제 여러분, 12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빕니다.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35ㄴ-43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35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이 지상의 질서 속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의 원리를 추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순과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날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가 섬기는 임금,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1).

복음은 우리를 십자가 처형 장소로 데려갑니다. 세상 임금의 화려하고 영광스런 옥좌가 아닌 치욕과 수치의 자리가 그분의 왕좌입니다. 거기서 그분은 세상의 정의를 세우는 판관의 입에서가 아니라 한 강도에 의해 무죄를 선언받습니다. 우리 임금님의 결백을 한 죄인이 알고 있습니다.

통상 세상의 임금은 판관의 자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단죄하지만 우리의 임금님은 세상의 힘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입을 열지 않으신 채로(이사 53,7 참조)... 무죄를 주장한 이는 화려한 변호인단이 아니라, 같이 사형당하는 처지의 죄인과 이방인 백인대장 뿐이었습니다(루카 23,47 참조).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37).

이 말씀은 단순히 생각 없이 뱉는 조롱이 아니라 사람들이 구원자, 메시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암시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나 지도자가 백성을 위해 받은 권한이 결국 그 자신을 위한 것이 되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도합니다. 의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고 권력의 속성상 깨어 거부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고 있기도 하지요.

우리가 권력자, 지도자들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자기 영달보다 백성을 우선하는 이가 희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백성은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이용하고 착취하는 수단이고 배경일 뿐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권력은 그래서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백성의 마음을 더 각박하게 만들고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해를 입히고 말지요.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러 오지 않은 이상한 구원자를 만났습니다. 그로써 통념이 뒤집힌 것이지요. 백성의 목숨으로 자기 영화를 구축해온 권력자의 세상은, 그분 존재를 통해 자기 생명을 바쳐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진정한 구원자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참 메시아와 거짓 메시아,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갈라놓는 잣대는 "자기 중심성"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십자가에 매달린 분께 와글와글 떠들어 대던 주변의 소음이 가라앉자, 우리의 임금님께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선고를 내리십니다. 유죄 무죄 선언을 뛰어 넘는, 위엄에 찬 구원의 선포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하는 일은 오로지 그 나라의 주인이며 통치권자에게 있으니까요. 그 죄수는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열릴 하늘 문을 통과하는 첫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다윗이 유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서 왕권을 인정받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5,3)

사실 다윗은 이미 목동이던 소년 시절에 주님께 선택되어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었지요(1사무 16,1-13 참조). 이후 선왕인 사울과의 관계에서 무수한 위기와 우여곡절을 거쳐 비로소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의해 임금으로 들어올려집니다.

하느님의 선택으로 시작된 일이 사람들의 손을 거쳐 세상 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세상 질서를 허용하시고 기다려 주신 덕분입니다. 다윗의 왕권은 하느님의 뜻과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를 이룬 좋은 예라 보여집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가 아직은 바람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의 왕이실 수밖에 없는 근거를 유려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기술합니다. '그리스도 찬가'라 불리는 이 대목 안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이름, 영광이 단어들 마다에 속속들이 배어 있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임금님의 권능과 세력은 이렇듯 피 흘린 희생 제사로 발휘됩니다. 세상 권세와 극명한 차이지요. 그분이 아름다우신 건 강력한 힘과 세력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고, 부정한 우리의 죄를 떠안으신 비참한 몰골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기껏해야 자기 이익과 부합하는 이들의 지지와, 속 모를 한시적 찬사를 받을 뿐이지만, 피로 물든 예수님은 사랑을 받으십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세상 임금과 우리 임금님의 차이입니다. 그분의 약함과 자기를 버린 포기와 바보스런 선택은 배은망덕하고 냉담하고 무딘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지나 찬사 정도가 아니라 애끓는 사랑, 닮고 싶은 존경, 하나 되고픈 연정, 일치하려는 열망... 세상 누구도 받아보지 못했을 마음의 골수들이 피흘리시는 그분 발 아래 이렇게 쌓여갑니다.

종들의 종, 그 종의 종이 되신 우리의 임금님께 더 깊은 감사와 사랑과 경애를 드리는 축제의 날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