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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사 49,8-15)(요한 5,17-30)

 

제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서른여덟 해나 앓아오던 이를 고쳐주신 날이 하필 안식일이라, 유다인들은 안식일 법을 무시한다는 혐의를 씌워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수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런데 이 말씀은 유다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맙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죄인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 운운하다니!"

분명 안식일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쉬신 일곱째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니 이를 수호하려는 유다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을 쉬라 하신 건, 영육의 휴식이 필요한 모든 이들, 보호받지 못하는 종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제외됨 없이 차별 받지 않고 쉬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땅마저도 양분을 축적하도록 쉬게 놀리니까요.

쉼의 날을 통해 사람을 회복시키고 되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부를 축적하려고 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불균등한 거래를 금지하시려는 조치였지만,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정신은 희미해지고,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하는 세부 항목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사랑의 계명에 이바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간적·세속적 일은 목적 자체에서 구분이 되어야 하지만, 문자에 집착하면서 지킬 항목이 늘어나니 숙고와 성찰은 그쳐버렸습니다. "아,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까,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결론만 말해주세요!" 하는 식으로 율법을 익히다 보니, 원 뜻과 정신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도는 묻혀버리고 그저 기계적으로 가부를 판별하는 방법론만 늘어나고 만 것이지요.

한번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 복음사가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꽤 긴 부분을 반복해 할애하는 건, 성자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이 앞으로 펼쳐질 파스카 여정에 단초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에 대한 수용과 믿음이 듣는 이들의 구원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심판의 권한은 이제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이양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또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고 하시는데, 정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하며 탐욕으로 들끓는 자신의 실존적 처지를 처절히 체험하며 귀양살이 인생 순례길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이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엄청난 위안을 받습니다. 사실 철저한 믿음으로 아무리 열심히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심판이라는 단어 앞에 온전히 자유롭기는 어렵기에 그렇습니다. 과연 내 주제에 심판이라는 관문을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서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심판을 뛰어넘는 구원의 열쇠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는 마치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을 만난 듯, 지루한 컴퓨터 작업에서 단축키를 익힌 듯 반갑기 그지 없는 말씀인데, 유다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이는 어떻게 심판을 피하게 될까요? 그 답은 오늘 독서에 들어 있습니다.

"설령 여인들은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의 절정이 제 몸에서 낳은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이 그보다 더 짙고 깊고 뜨겁고 애틋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께서 아들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에게 어찌 심판의 항목들과 잣대를 들이대실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는 도저히 못할 일이 바로 그런 심판일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심판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고, 그 사랑의 결정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어느 여인보다 애끓는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율법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 가득한 사랑의 프리즘으로 우리를 비춰보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심판의 다른 말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입당송) 오늘 미사를 여는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과연 구원은 하느님의 자애를 입고 다가옵니다. 믿는 우리에게 자애는 심판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