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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5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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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금요일(예레20,10-13)(요한10,31-42)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독성죄가 될지, 혹시라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독성죄가 될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갈팡질팡하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기로 확실히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지 말고 당신이 행하신 하느님의 일을 보라고 하시지만, 이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십니다."(요한 10,40) 그곳은 당신이 세례를 받은 곳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체험의 공간입니다. 그때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당신의 관계를 확실히 규명해 주셨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을 믿어 주지 않는 상황에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생생히 들었던 선언의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물러가 머무르십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변할 수 없는 게 분명히 존재하지요.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에 대해 자신마저 의혹을 품게 되면, 소위 말해 '지는' 겁니다. 어쩌면 세상은 예수님에게, 그곳에서 당시 겪었던 하느님의 신비스런 계시와 성령의 현존이 자연현상을 동반한 착시나 환청, 망상에 불과하다고 속삭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 안에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가시며 일치 안에서 힘을 얻으셨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외적으로 겪고 계시는 상황을 요한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라고 종합해 서술합니다. 물론 아직 그 전초전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입니다.

독서에는 예레미야에 대한 군중의 음모와 배척이 먼저 나오고, 자기 민족에게 고스란히 당하는 예레미야의 절규가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세 절에 불과한 짧은 기도 안에 불평이나 저주, 절망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지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신"(예레 20,13) 하느님을 찬양하며 노래하라는 기쁨의 환호가 앞질러 등장합니다. 어쩌면 복음 속 예수님도,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루어질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감지하며 찬양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하느님의 부르심을 시작으로 응답해 떠나온 길인데, 어느 지점쯤에서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미 너무 와버려 돌아갈 수도 없는데, 세상은 애초에 첫 시작부터 착각이었다고 속삭입니다. 지금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세상 질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도움을 가장해 길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처럼 부르심의 원체험으로 물러가 머무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영혼 안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물러감은 후퇴도 퇴보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첫 부르심과 응답의 시간적 장소적 현장이 담고 있는 에너지가 우리의 순수와 열정을 되돌리고 더 심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송사를 맡겨"(예레 20,12) 드리고 예수님과 함께 나만의 요르단 강가로 물러가 머무릅니다. 거기서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 다시금 나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직 갈 길은 멀고 여정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드릴 말씀은 오직,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입당송)라는 기도뿐일 겁니다. 나머지는 그분께서 해주실 그분의 몫입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원체험의 시간과 공간으로 한번 돌아가 머물러 보면 어떨까요. 우리 삶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지 않고, 혹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은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면, 남들이 자꾸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들을 한다면, 나와 하느님과의 그 내밀한 만남과 대화의 때로 다시 돌아가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벗님을 그때 확실히 불러주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