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금요일
아니나 다를까! 당신 살을 먹으라는 예수님 폭탄 선언에 유다인들 사이에는 다툼까지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그들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예수님께서는 계속 살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니 설상가상으로 피 이야기까지 보태시지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건드려 주셔서 영의 귀가 활짝 열려야 알아들을 수 있는 차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인간적,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차원으로 넘어가 버린 게지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예수님의 살과 피, 즉 그분 생명을 받아먹는 사람 안에는 이미 그분께서 계시고 또 그도 그분 안에 있습니다. 머무름. 서로가 서로에게 머무르는 것은 일치입니다. 하나됨입니다. 그분이 내 영육으로 스며드시고 나도 그분 안에 스며들었으니 이제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말미암아"(요한 6,57)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시듯, 예수님을 먹는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말미암는다는 말은 원천이고 원동력을 뜻하지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아버지 때문에/덕분에 사시듯이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덕분에 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이유, 삶의 이유가 됩니다. 벗님이 자식 때문에/덕분에 살고, 부부가 서로 때문에/덕분에 살듯이, 참으로 사랑 안에 일치하여 사는 사람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이유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은 성체로, 말씀으로 현존하시고,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두 기둥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성체 신심은 있는데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 또는 "나는 말씀 연구는 재미있지만 이웃 사랑이나 봉사는 바빠서 못 해" 이런 말을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나눔과 봉사를 통해 직접 성체적 삶을 사는 것과, 말씀을 읽고 듣고 머무르고 실천하는 일은 별개가 아닙니다. 둘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삶이고 서로에게 머물러 일치하는 하나된 삶이지요.
말씀에 깊이 깊이 머무를 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알아들으려 말씀의 숲길을 샅샅이 헤치며 그분 자취를 찾고 말씀과 씨름하듯 끙끙거리며 애를 쓸 때, (이런 표현이 어떻게 들릴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흡사 주님의 몸을 세세히 뜯어 먹고, 잘근 잘근 씹고, 되새김질 하고, 또 입에 지그시 머금어 맛을 음미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는 실제로 '아,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샅샅이 구석구석 뜯어 먹고 핥고 되새기며 먹고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마치 말씀이 실제로 살과 피가 되셔서 제 앞 식탁에 놓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땐 주님의 육화, 즉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살이 되신 신비를 알아듣는 듯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어 주신 살과 피는 그분의 원 존재인 '말씀'이십니다. 살과 피를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이 그분 존재, 생명을 받아 모신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그분을 말씀으로 영하고 또 살과 피로도 영하는 우리는 참으로 복된 존재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선 우리, 그분 안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 성체적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서는 열혈 유다교 신봉자 사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모하게 된 극적 사건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사도 9,3)
빛은 밝기를 지닌 빛이었을 뿐 그를 땅에 엎어트릴 만한 폭력적, 물리적 세기의 접촉은 아니었을텐데, 번쩍이며 둘레를 비춘 빛만으로 그가 넘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빛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야기하고, 시편 저자 역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09,105)라고 고백하지않습니까?
사울은 이 빛의 타격, 말씀과의 접촉을 통해 자기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큰 빛 앞에서 작다란 빛도 못되는 인간적 시력을 잃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네요.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9)고 합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친히 파견하신 하나니아스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되지요.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사도 9,18-19)
인간적 시력을 잃었던 사흘 동안 그는 곡기도 끊습니다. 그동안 가진 신념이 무너지는 혼란과 두려움, 신비 체험에서 오는 충격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상징적으로 볼 때 그는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경계 지점에 있고, 죽음과 같은 진공적 휴지기를 통해 옛 인간의 흔적을 비워내는 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 그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고 하지요. 죽음의 시간을 거친 후 물과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어 영한 첫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사도행전 저자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 음식으로 기운을 차리고 며칠을 제자들과 보낸 후 곧바로 주님 선포의 길로 들어선 힘은, 그 음식의 영양학적 성분만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사울은 빛으로 오신 말씀과 음식으로 오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 변모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가 되어 불같이 타오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말씀, 빛, 살과 피, 우리 곁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더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분류하고 구분하고 나누던 제각각의 존재들이 하나로 통합됨을 느낍니다. 요한 사도가 갈릴래아 바닷가에서 외쳤듯이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아멘. 오늘 말씀과 빛, 살과 피로 또다시 벗님에게 오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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