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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8,6-9; 19,1-7
그 무렵 6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8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9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2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3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4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6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7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거리"가 보입니다.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예수님 주변으로 각지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각자 나름의 청원과 바람을 품게 되었을 겁니다. 단순히 호기심이 생겨서 온 사람부터 절박한 필요를 안고 온 이들까지, 지금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예수님입니다. 군중과 예수님은 지금 매우 가까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마르 3,9)

군중은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오려고 서로 밀쳐 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까지 밀칠 지경이 되자 예수님께서 배를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배는 물에 띄워질 것이고, 군중은 호숫가에 남아 그분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많은 경우 다정한 접촉이 동반되기도 했지만, 실은 말씀이 중심이지요. 물리적 거리가 군중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 걸맞는 해법임을 알겠습니다.

"그들(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밀려드는 군중으로 가뜩이나 복잡한데 더러운 영들까지 소리소리 지르며 한 몫을 보탭니다. 주님을 아는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외침이 진정한 증언은 되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흘러나온 앎이 아니기에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이럴 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치유와 기적 효과를 넘어,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야 메시아의 신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준비 안 된 이들의 경솔하고 섣부른 폭로는 거룩한 이름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훼손하고 손상시킬 수 있기에 침묵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1사무 18,7).

승리에 도취된 여인들의 경박한 노래가 사달의 원인이 됩니다. 둘을 대놓고 비교하니 화 나고 속이 상한 사울이 다윗에게 시기심을 품게 된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의 정화되지 않은 시각, 진실의 채로 거르지 않은 말은 걷잡을 수 없는 역효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하느님까지도 죽음까지 몰아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1사무 19,5).

요나탄이 승리의 주인공는 사울도, 다윗도 아니고 주님이심을 일깨우며 지혜로이 부친 사울을 설득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각자 하느님과 두고 있는 "거리"입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이에서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도구로 쓰시느냐가 관건이지, 누가 잘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고 먹이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하느님의 일로 보지 않았기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것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들에게도 "우리" 일이니 함께 기뻐하며 응원했어야 옳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들 안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욕망과 바람으로 무질서하고 난폭하게 예수님을 밀쳐 대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있게 거르지 않은 섣부른 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며 시기와 질투를 내려놓는지, 예수님을 태운 거룻배가 되어 그분과 밀착하는지...

어느 모습 안에 있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침묵'입니다. 앎이 무르익고 봉인이 해제될 때까지, 주님이 원하시는 때까지, 우리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될 때까지 겸손히 침묵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시도록 말입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