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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사순 제 3주일 / 기경호 신부님 ~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또는 20,1-3.7-8.12-17>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2-25
형제 여러분,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살아 있는 성전 ♣

 

우리는 온전함과 순수함과 거룩함을 갈망한다. 그러나 유혹과 도전과 위기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 되라”는 근원적인 소명에 제대로 응답하기가 쉽지 않다. 거룩함에로의 부르심과 늘 그에 못미치는 응답 사이의 긴장을 우리는 살아간다. 오늘 복음에서는 채찍을 휘두르시며 분노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때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이 가까워진 날이다. 예수님은 바로 성지인 예루살렘의 성전 마당에서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채찍을 휘둘러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의 양과 소를 몰아내신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화가 나셨을까? 사건의 배경을 좀 더 살펴보자.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우리네의 추석만큼이나 큰 명절이다. 더구나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기념하는 종교적 의미가 담긴 명절로서 예루살렘에서 30km 이내의 거리에 사는 유대인 장년 남자는 반드시 유월절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에 사는 유대인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던 많은 유대인들도 참여하였다. 그들은 평생에 한번만이라도 고국의 성지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을 지내는 것을 평생소원으로 여겼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성전에 참배하는 19세 이상의 유대인들은 누구나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다.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로마,헬라, 이집트, 띠로, 시돈의 통화가 통용되고 있었는데, 성전세만은 유대 화폐인 갈릴리 세겔이나 성전 세겔로 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지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은 화폐를 바꾸어야만 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전상들이 바로 성전 마당에서 수수료를 받고 환전을 해주던 사람들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환전상들은 대단한 폭리를 취하였던 것이다.

또한 순례자들은 감사의 제물로서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다. 제물로서 소나 양, 비둘기가 사용되었는데 성전 뜰 안에서 파는 제물만이 흠 없는 것이고 성전 밖에서 사서 가지고온 소나 양, 비둘기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전 마당에서 파는 제물만을 사야했는데 이때 또한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순례자들에 대한 부당한 착취가 공공연하게 제도적으로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짜고 이루어지고 있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그러한 장사들을 일컬어 ‘안나스의 특매점’이라고도 하였다. 예수님의 분노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불의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불의에 대한 예수님의 진노는 곧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그분의 열정이며 또한 소외된 이, 천대받는 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난다. 장사판이 벌어지고 있던 성전 마당은 ‘이방인의 뜰’로서 유일하게 이방인들이 기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곳을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성경에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불의에 대해 단호히 부정하시고 타협하지 않으신 것은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 때문이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 공동체와 신앙인으로서의 우리들 자신을 한번 반성해보자.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정의로움이 추구되고 있는가? 불의한 제도나 억압받고 불이익을 당하는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애정이 있는가? 정의를 추구하려는 공동체 차원의 연대 노력이 있는가? 혹시 우리의 성전이 가난한 이들이 있을 자리가 없는 소외의 마당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참으로 성전으로 있는가?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을 상기하자.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예레 7,4-7) 우리 모두 이제는 성당을 다니고, 성전에서 기도하며, 제사를 봉헌한다는 것만으로 쉽게 안도감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을 모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의 계약을 존중하며, 주님과 같은 것을 바랄 때만, 주님이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성전이라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나의 전 인격을 통해 전 존재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삶이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참된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 사회도 정의를 추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세상 자체가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정의를 추구하고, 신자들끼리만의 독점이 아닌 지역사회의 가난한 이들과 나눔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다함께 노력했으면 한다.

 

그럴 때 우리 성전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지요 성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한국교회는 복음이고 예수인가? 오늘도 그러지 못하는 나를, 우리 공동체를, 이 한국교회와 사회를 보시며 분노하시며 내 안의 무관심과 이기심과 불의의 상을 뒤엎어 버리실 것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내 마음자리와 우리의 삶의 터에 미움과 증오, 거짓과 차별, 무관심과 불의가 있다면 어찌 성전이라 할 수 있을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