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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사순 제 3주간 화요일 / 기경호 신부님 ~

사순 3주 화요일/ 마태 18,21-35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사랑으로 한없이 용서하라! ♣


살다보면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지만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듯싶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을 때 그 첫 번째 피해자는 자신이니 어쩌랴! 오늘 복음에는 한없이 용서하라는 가르침과 더불어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인간이다. 고대 사고방식에 따르면 임금은 생사여탈권을 행사한다. 이 비유에서는 임금이 최후 결산(25,19)을 본다. 그 임금은 곧 주님(25,27. 31. 32. 34절)으로서 종들과 셈을 밝히려 했다. 빚을 갚을 길이 없는 종을 보고 일단 관례대로 그 종의 아내와 자식을 팔아 빚을 갚도록 한다.

종이 주인의 돈을 횡령했다는 말은 없고 단지 빚을 갚지 안했을 뿐이다. 종은 빚을 탕감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주인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빚을 용서해 준다. 32절을 보면 종이 빌었기 때문에 주인이 ‘빚을 용서’해 주었다지만 사실상 종은 시간적인 여유만 요구했다. 뜻밖에 주인이 그 종의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해 주었다. 여기서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안식일을 빼고 20여 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액수이다. 이 종이 탕감받은 엄청난 액수는 헤아릴 수 없는 용서의 가치를 말해준다.

그런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이 종은 친구의 사소한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18,30) 유대 법에는 채무자의 인신 구속이 없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고발이다. 자신은 늘 사랑받고 싶어하고 관대한 처분을 바라고, 조건없는 용서를 바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냉정하고 옹졸한 태도를 보이는 우리에 대한 고발이다. 무관한 사람들처럼 폐쇄적인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곳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이다.

주인은 다른 종들의 보고를 듣고 그 종을 불러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했다’고 한다(18,33). 용서의 원인은 주님의 자비하신 마음이지 종의 부탁이 아니다. 결국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18,34) 임금은 무자비한 종을 고문형에 처했다. ‘다 갚을 때까지’란 거액의 빚을 생각할 때 그 형벌은 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 종은 주님이 관용, 탕감을 순수한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친구간의 연대성과 우정을 무시해버렸으며, 필요 없게 된 친구의 돈을 강제로 요구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결국 친구간의 연대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봉변을 당하게 된다. 바로 그 종들의 친구들이(31절) 그 꼴을 보고 슬퍼했고 그들의 주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우리도 주인과 악한 종(32절) 사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친구들과 그들 사이에 맺어진 연대성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풀어진 용서는 나누어질 용서이다. 받은 용서를 나눌 줄 모르는 것은 용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이 화를 내면서 그 종을 형리에게 넘겼다. 말하자면 그 종은 용서의 거부가 초래한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용서는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을 하겠다는(창세 4,24) 라멕의 끝없는 복수심과 대조되는 용서이다. 한없는 용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표지이다.

우리도 청하기도 전에 자비를 베푸시고 빚을 탕감해 주시는 아버지의 용서를 서로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한없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그 자비로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18,35)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용서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전달하는 것이지 않는가. 우리 사이에는 갑을이 없고 하느님의 자애 앞에 연대하여 공유하는 길만이 남아 있다. 증오와 분노를 안고 산다면 형제를 살인하는 것이며 그 첫 번째 피해자는 자신임을 명심할 일이다. 냉정함과 미움은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져오고 자아분열을 일으킬 뿐이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