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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13주간 월요일 / 이수철 신부님 ~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추종의 자세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제의 끝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삶은 늘 끝이자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늘 깨어 새롭게 시작함이 영성생활의 요체입니다. 7월 달력을 펼치는 순간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가 떠올랐고 나눕니다. 7월이 되면 늘 떠오르는, 모두가 애송하는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빡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흡사 오매불망 스승을 기다리는 제자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만일 애국시인 이육사(1904-1944)가 주님을 만났더라도 훌륭한 제자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육사 시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평생을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옥사한 분입니다. 의열단에 소속된 시인은 갖가지 사건으로 대구와 북경의 감옥에서 무려 17회나 징역을 살았고 마침내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

 

 

 

육사의 시로서는 드물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초인’은, ‘내가 바라는 손님’으로 모습을 달리해 있고, 백마를 타고 오는 대신 ‘청포를 입고’ 찾아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많은 이들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킬 사람으로 추론하기도 합니다.

 

 

 

7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시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신선한 감동을 주는 맑고 깨끗한,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주님은 7월 첫날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처럼 우리를 죄와 내외적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찾아 오시고,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청포도의 시인처럼 주님을 환대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추종의 자세를 배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직의 엄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눈부신 치유이적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하면 민중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스타였을 것이며 제자가 되려는 열망도 지녔을 법 합니다. 아마도 이런 영향을 받았을 한 율법학자가 주님을 찾아 제자가 될 것을 청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율법학자의 감상이나 허영을, 환상을 일거에 거둬 버리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무소유의 정신과 삶으로 세상과 철저히 결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는지 묻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철저히 모두를 버린 하느님의 제자였음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율법학자가 주님을 따라나섰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독자인 우리에게 주님을 추종하는 자세의 엄중함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 중심의 삶을 살려면 세상 재물 욕심에 초연해야 하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옛 어른 다산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고난은 마음의 근육을 키워준다. 어른이 단단한 까닭은 겪어온 무수한 고난을 주름에 갈무리 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의 길은 꽃길이 아닌 산전수전, 무수한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 정화되어가는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자승자강(自勝者强),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진정 강한 사람입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는 이런 사람이겠습니다. 이어 주님의 제자들중 하나의 청원과 주님의 답변도 우리에게는 깊은 묵상감입니다. 역시 제자직의 엄중함을 환기시킵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제자직에 관한, 이해하기 힘든 참 난해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앞서 말씀이 소유와의 단절을 말한다면 이 말씀은 세인들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인정이 많으면 도가 성글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학자들은 주님의 말씀임에 동의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는 충격요법의 과장법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는 엄중한 의무도 참된 제자직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사지내는 것에 대한 거부라기 보다는 제자직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장례의 의무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만큼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대로라면 세상에는 살아있다 하나 죽은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주님은 이 말씀후에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주 예전 법정 스님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불자 수도승으로서 할머니의 장례식까지 참석 못했던 풋열심의 젊은 시절의 행태에 대한 반성입니다. 까짓 수도생활이 뭐라고 사랑했던 할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자신의 편협했던 생각을 크게 뉘우치는 스님의 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로서 평생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에 온힘을 다했던 분으로 하느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잘 드러나는 말씀이요,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해이해진 자세에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참 훌륭한 제자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철저하기로도 예수님과 막상막하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었던 백성이 주님의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하게도 사랑과 정의를 유린한 행태들에 열화와 같은 분노와 더불어 가차없는 심판을 선언하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활을 든 자도 버틸 수 없고, 발 빠른 자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며, 말 탄자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용사들 가운데 심장이 강한 자도, 그날에는 알몸으로 도망치리라.”

 

 

 

그 누구도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린 심판이기보다는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오늘날도 주변 곳곳에서 무지하고 무절제한 사람들이 자초한 심판의 징조가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함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중산층화 되어가는 교회에 대한 경고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화답송 후렴처럼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초발심의 열정과 순수로 주님을 찾고 따르는 제자로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참 제자답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8). 아멘.